조직신학이 설교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신건

 

기이한 사실

필자는 조직신학을 전공한 자로서 오랫동안 조직신학을 배우고 가르쳐 왔으며, 지금은 교회에서 설교에 가장 큰 비중을 두는 목사로서 일하고 있다. 학자든 목사든, 필자가 가장 자주 접하는 것은 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필자의 관심을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도 단연 책일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은 정보의 원천과 정보 습득의 방법이 매우 다양해졌고, 그래서 책의 가치가 날로 떨어지는 것 같아서 매우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여전히 최대의 정보원임이라는 사실은 아직까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다른 사람들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의 서재가 얼마나 풍성한지, 그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새로운 책들을 읽고 있는지, 그들이 무슨 책을 즐겨 읽는지, 그리고 혹시 필자가 썼거나 번역한 책들도 그들의 서재에 꽂혀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자의 오래된 습관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필자가 참으로 기이하게 생각해 온 일이 사실 하나가 있다.

먼저 신학자들의 서재를 살펴보면, 전공의 차이에 따라서 책의 종류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일 수밖에 없다. 점점 더 세분화되고 가파르게 변화하는 신학의 추세 때문에 신학자들은 자기 분야에만 전적으로 매진할 수밖에 없다. 특히 호주머니 사정 때문에 신학자들은 자신의 전공에 한정된 책들을 주로 사 모으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이치다. 하지만 참으로 기이한 점은, 다른 분야를 전공하는 신학자들의 서재에 조직신학과 관련된 책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간혹 발견되는 조직신학과 관련된 책들도 다른 사람이 기증한 책들이 주종을 이루며, 그런 책들도 거의 읽히지 않은 채 서재의 부피를 자랑하는 일에 기여할 따름이다. 왜 그들은 조직신학을 이토록 멀리할까? 그들은 조직신학이 자신의 사고와 실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기이한 현상은 다만 신학자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늦게나마 교회 현장에 나와 보니, 이와 유사한 현상이 목회자들에게도 쉽게 발견된다. 목회자들의 서재는 신학자의 서재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편이다. 그런데 그들의 서재에는 교회 현장에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책들, 즉 설교와 목회 방법론에 관한 책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목회 현장에 쉼 없이 밀려오는 무거운 책임과 새로운 도전 앞에서 목회자들이 당장 써먹을 만한 실용적인 책들을 골라 읽는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조직신학에 관련된 책을 거의 읽지 않은 편이며, 그들의 서재에 꼽혀 있는 조직신학과 관련된 책들도 대개 남에게서 받은 것들이다. 그들도 역시 이런 책들을 거의 열어 보지 않는다. 왜 그들은 조직신학을 이토록 멀리할까? 그들은 조직신학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거나, 아니면 조직신학이 설교와 목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므로 조직신학을 전공하지 않는 신학자들과 교회 현장에서 일하는 목회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조직신학에 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필자에게 그들이 때로는 고리타분하고 옹졸한 교리주의 혹은 교파주의를 초월하여 매우 자유롭게 사는 성령의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번거롭고 까다로운 교리 체계 앞에서 자신감을 잃거나 아예 교리를 도피해 버린 비겁한 사람처럼 보인다. 간혹 교회를 위협하는 듯한 이단과 사이비를 판별할 때를 제외하면, 평소에 그들은 조직신학에 관한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대신학의 새로운 문제 혹은 특별한 경향에 대해서도 그들은 거의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갖고 있는 조직신학과 관련된 책들은 손 떼가 전혀 묻혀 있지 않다. 아무리 쉽게, 아무리 실용적으로 조직신학을 풀이하는 책이 나와도, 그들은 조직신학을 거의(전혀!)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런 기이한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조직신학은 교회 현장에서 그야말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는가?

 

조직신학의 기능

신학은 크게 이론신학과 실천신학으로 나뉜다. 조직신학은 이론신학에 속한다. 조직신학의 일차적 자료는 성서이기 때문에 조직신학자들은 성서신학 전반에 관한 책들을 광범위하게 읽어야 한다. 그리고 조직신학자들은 교리 혹은 교리의 역사, 현대신학에 관한 책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조직신학자의 관심은 다만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성서와 교리가 형성된 배경을 알기 위해 조직신학자들은 다양한 인문학(종교, 문화, 역사, 철학, 심리 등)에 관한 관심도 놓쳐서는 안 된다. 더욱이 조직신학은 실천(신학)을 위한 방향도 제시해야 하므로, 그리고 조직신학자도 현실에 몸을 담고 살아가고 있고 때로는 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기도 해야 하므로 윤리와 설교에 대해서도 전혀 무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자들의 서재는 온갖 분야에 관한 책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광범위하게 독서해야 하고 복잡한 이론과 학설을 체계적, 조직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 하는 조직신학자들의 어깨와 머리는 매우 무거운 편이다. 혹시 조직신학자들의 머리가 다른 신학자들에 비해 비교적 휑하게 벗겨진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까?

조직신학은 성서신학과 실천신학의 가교 역할을 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성서신학은 재료에 해당할 것이고, 조직신학은 뼈대에 해당할 것이며, 실천신학은 장식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재료가 아무리 좋고 외형적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집이라도, 뼈대가 허약한 집을 어떻게 지을 수 있겠으며, 그런 집이 얼마나 오래 풍상을 견딜 수 있겠는가? 이처럼 조직신학적 사고를 등한시하는 신학자들은 자기 분야에서는 해박한 지식인이 될지는 몰라도 뼈대와 줏대가 없이 시류에 쉽게 영합하거나 시류에 전혀 무관심한 사람이 되기 쉽다. 그리고 조직신학적 사고를 등한시하는 목회자들도 설교와 목회의 중심이 없이 대중의 기호와 시류에 따라 설교하거나 세상의 권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 되기 쉽다.

물론 필자는 여기서 새삼 협소하고 옹졸하며 보수적인 교조주의를 주창하는 것은 아니다. 교리도 유한한 인간의 산물로서 영원불멸하지 않으며, 더욱이 '교리를 위한 교리'는 아무 소용도 없다. 교리도 결국 교회의 산물로서 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리고 크고 높은 집일수록 뼈대는 견고하면서도 동시에 지진과 강풍에 적응할 만큼 유연하기도 해야 한다. 사람의 뼈 가운데도 매우 견고한 것과 매우 유연한 것이 긴밀하게 협력한다. 그리고 견고하든 유연하든, 모든 뼈들은 몸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화롭게 유지하고 움직인다. 이처럼 조직신학 혹은 교리도 신학과 교회를 조화롭게 유지하고 유연하게 움직이게 한다.

 

설교의 혼란과 위기

그렇다면 조직신학이 등한시되는 설교는 대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설교 횟수가 너무 많아서 그렇고,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에서 설교가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어쩌면 이보다 더 무거울 듯한 짐은 설교를 준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수고가 들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무거운 짐은 설교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된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 해명하는 일과 성서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부터 이미 너무나 벅찬 일이거늘, 달리 무슨 한가한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갈피마다 켜켜이 쌓여 있는 전승의 층으로부터 성서 본문의 의도를 정확히 해명하고, 이를 목회 현장에 정확하게 적용하는 일만 해도 이미 감당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거늘, 설교자가 다른 일에 한눈을 팔 겨를이 있을까! 하지만 설교자는 유명한 성서신학자들의 든든한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부담은 한층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문과 상황의 연결만으로 설교는 완전히 작성될 수 없다. 아무리 짧은 설교도 하나의 작은 논문, 작은 조직신학 이론과 같다. 왜냐하면 설교는 단순히 본문의 주석과 상황의 적용에만 그치지 않고 해석학적 해명, 즉 조직신학적 작업을 반드시 거쳐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설교는 성서의 맥락과 의도, 저자의 신학, 다른 저자와의 관련성, 다양한 교리의 형성과 발전, 현대인의 사상적 경향 등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 가운데서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바로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설교는 짧은 시간 안에 분명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물론 설교학자의 입장에서는 다음과 항변도 가능할 것이다. 회중은 탁월한 이론을 듣기 위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온갖 문제 속에 얽혀 살아가는 회중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마음의 위로와 치유다. 이와 같은 항변은 전혀 부당하지 않다. 필자도 회중 가운데서 설교를 들을 때마다 현실적인 적합성을 상실한 구태의연하고 공허한 설교에 식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다만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회중에게는 위로와 치유만이 아니라 회개와 심판도 선언해야 한다는 점이 아니라, 설교를 들을수록 회중의 신앙이 점점 더 성숙해지고 그래서 그들의 신학의 뼈대도 옹골차게 여물어져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변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성도들 간에는 신학적 수준의 차이가 별로, 아니 거의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미숙한 성도들에게 성숙한 신앙고백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으며, 불신자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안내하도록 그들을 어찌 무장시킬 수 있겠는가! 조직신학이 결여되거나 허약한 성도는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교활한 지도자와 세상의 풍조를 무분별하게 따르는 어리석은 대중으로 돌변하기 쉽지 않겠는가! 설교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조직신학은 다만 목사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나 설교 준비를 위한 재료로만 필요하거나, 특정 교리를 주입하거나 보수하기 위한 도구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조직신학 혹은 교리는 설교 그 자체의 핵심적 뼈대로서 언제나 설교의 행위에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현황은 어떠한가? 필자도 목회에 들어선 이후로 설교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에 관한 관심이 시나브로 커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인터넷과 서적으로 남의 설교를 자주 엿보게 된다. 그리고 공중파를 잡기 어려운 시골에서 케이블 방송으로 유명한 목회자 혹은 대중 설교자의 설교를 자주 듣게 된다. 당연히 가르치는 자는 그 이전에 배우는 자다. 그러므로 필자도 설교하기 이전에 그들로부터 많이 배운다. 그리고 이제는 신학자보다 목회자가 더 살갑게 느껴지고, 한편의 설교를 위해 애면글면 애쓰는 그들이 참으로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필자는 제3의 방관자 혹은 목회자와 거리를 두는 신학자가 아니라 심정적, 실천적으로 그들과 깊이 연대하는 동료 설교자로서 설교를 말하려고 한다.

조직신학적 확신이 약하거나 그런 확신을 경시하는 설교는 교리적 일관성 혹은 통일성을 상실한 채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되기 쉽다. 아쉽게도 이런 현상은 한국의 설교자들에게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한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할 때에는 "이렇다"라고 설교하다가, 다른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할 때에는 "저렇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물론 이런 현상은 성서 본문과 전혀 상관없거나 성서 본문과 정반대가 되는 설교를 하는 현상보다는 훨씬 낫다. 물론 성서로부터 교리를 추출하지 않고 성서를 교리로 해석하는 것은, 성서 본문으로부터 말씀을 해명해 내지 않고 본문 속으로 설교자의 의도를 주입하는 것만큼 위험하다. 하지만 한 편의 설교 가운데서도 그러하지만, 수많은 설교들 간에도 유기적 통일성 혹은 일정한 방향성을 상실한 설교는 결국 설교자 혹은 회중의 기호에 맞춰 설교하기 쉽다. 이런 설교의 바탕 위에서는 건전한 신학이 발전할 수가 없다. 비록 한국교회의 역사가 비교적 짧긴 하지만, 우수한 조직신학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의 하나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조직신학에 대한 냉대 혹은 무관심은 조직신학자에 대한 홀대와 무관심만이 아니라, 더 불행하게도 교인과 교회의 정신적 혼돈과 미성숙을 낳는다.

 

비빔밥 설교를 넘어서

지면 관계로 한 가지 중요한 실례만을 들기로 하자. 필자가 여러분의 명망가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기이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현상은 예수님의 복음과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하늘 나라 혹은 신국)에 대해 거의 설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설령 간혹 그런 설교를 하더라도, 그들은 천국, 천당,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 낙원 등과 같은 다양한 용어들을 분명하게 구분하거나 해명하지 않은 채, 더러는 서로 모순되게 마구 혼용한다는 사실이다. 더 안타까운 현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그 당시에 살아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성취하려고 했다면,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압도적으로 사후의 축복으로 돌린다. 그 결과로 성서 본문이 죽은 자를 주로 "잔다"고 말하는 사실과는 달리, 많은 설교자들이 "성도는 죽어서 천당에 가고, 불신자는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낙원 약속을 받은 오른편 강도 이야기 등을 근거로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

이와 같은 현상이 성서 본문과 기독교의 주요 교리와 상당히 충돌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교자들은 오늘도 태연히 그렇게 설교한다. 만약 죽음으로써 죽은 자가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 직행했다면, 예배 중에 회중이 늘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내용대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예수님이 재림하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사후의 영혼이 누리는 천국의 복락과 몸의 부활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이와 같이 애매하고 모순적인 현상은 무엇보다도 조직신학적 훈련 혹은 교리적 확신의 결여에서 비롯한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자들이 모두 비빔밥처럼 "맛있는 재료는 모두 섞어라"는 식으로 혼합주의 혹은 실용주의와 은밀히 타협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대중추수주의 혹은 실용주의는 아마도 최근에 "이야기 설교 이론"이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부터 더욱 심해진 것 같이 보인다. "이야기 설교 이론"의 장점과 당위성을 몰라서 필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와 같은 최근의 설교적 추세는 조직신학 혹은 교리의 중요성을 더 심하게 훼손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얼마 전에 필자는 이야기 설교를 강조하는 어느 설교학자로부터 "설교의 권위는 성서로부터 나오지 않고 회중으로부터 나온다"고 당당히 주장하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란 적이 있다. 아무리 이념과 사상보다는 실용과 이익이 더 중요시되는 시대라 하더라도, 이와 같은 태도는 단기적인 성과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위험을 내포한다. 신앙의 성숙과 조화로운 신학의 형성은 결코 단기간에 성취되지 않는다. 성서 본문의 권위가 이토록 훼손되는 마당에 조직신학 혹은 교리의 유용성은 얼마나 더 훼손되기 쉽겠는가! 이럴수록 설교는 중심을 잃고 더욱 우왕좌왕, 횡설수설, 좌충우돌하게 될 것이다. 꿩 잡는 게 매가 아니다. 매는 꿩만이 아니라 온갖 동물을 다 잡는다. 그처럼 회중을 감동시키는 것만이 좋은 설교가 아니다. 좋은 설교는 회중을 감동시킬 뿐만 아니라 회중을 반성하게도 한다.

이런 점에서 조직신학은 과거보다 더 무시될 것이 아니라 더 중시되어야 한다. 조직신학적 뼈대가 탄탄히 갖추어져 있는 설교는 회중의 일시적인 만족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견고한 만족, 즉 인생의 목표와 목적, 중심과 본질을 분명히 세워줄 수 있다. 물론 날로 심각해지는 교회 성장의 위기 속에서 회중의 흥미를 유발하는 설교도 어느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시대에 동떨어지지 않은 현장 중심적인 설교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때로는 시대를 거스르고 때로는 시대를 넘으며 때로는 시대를 이끌어 가는 설교도 해야 한다. 이런 설교야말로 회중의 시선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맞춰서 회중을 거기로 안내하는 진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오직 부단한 조직신학적 훈련을 통해서만 비로소 성취될 수 있으리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월간 프리칭 2006년 8월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