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죽으면, 하늘나라에 가는가?

강단 언어와 찬송가의 시급한 시정을 촉구하며!

  이신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늘을 섬겨왔다. 무속과 불교, 유교 등이 성행하는 가운데서도 우리 조상들은 항상 하늘을 경배하고 하늘을 향해 제사를 드려왔다. 매우 짧은 시기 동안 기독교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은 기존 종교들과 국운(國運)이 기운 탓도 크겠지만,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뿌리내린 인격적인 하늘(하느님)에 대한 경건한 신심의 탓도 크다. 즉 우리 조상의 '하늘' 신앙은 기독교의 '하나님' 혹은 '하느님' 신앙으로 인도하는 몽학(蒙學) 선생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지평융합(地坪融合)은 기독교가 반길 만한 유익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하늘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지평융합은 기독교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그 구체적인 증거는 역사적 초월을 희망하는 미래적, 종말론적인 기독교가 내세적 초월을 희망하는 현실도피적인 기독교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그 원인을 모두 한국인의 하늘나라 신앙에 돌릴 수는 없다. 한스 큉(H. Küng)이 그의 책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분도출판사)에서 상세히 분석했듯이, 부활을 통한 역사적인 희망을 대변하던 원시교회의 묵시문학적 패러다임은 영혼불멸을 통한 역사초월적인 희망을 말하던 고대교회의 헬레니즘적 패러다임에 의해 서서히 대체되었다. 그 이후에 생겨난 다른 패러다임들은 여러 종파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면서 끈질긴 생명을 유지해 온 반면, 유독 원시교회의 묵시문학적 패러다임은 마니교와 이슬람에 의해서만 계승되고 있다고 큉은 말한다. 물론 그의 분석에는 지나친 일반화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교회와 신학이 묵시문학적 패러다임을 깡그리 외면해 오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현대에 이르러서 이것이 다시금 활발하게 논의된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자주 지적되었다시피, 특히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인 신앙은 여러 과정과 이유로 인해 이미 상당히 탈역사화한 모습을 띠었다. 비록 한국 교회가 묵시적인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날로 격해지는 일제의 탄압과 교회 지도자들의 오도(誤導) 속에서 순박한 성도들이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내세적인 하늘나라 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륵불(彌勒佛) 신앙과 격암유록(格菴遺錄), 정감록(鄭鑑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 우리 민족에게도 역사적, 묵시적인 희망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해방 이후로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참여를 이끌어온 온 여러 가지 운동과 신학에 의해 뒤늦게나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건전한 이해가 상당히 폭넓게 확산되었음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신학대학을 졸업하던 당시(1977년)만 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는 책은 거의 없었다. 대개의 한국교회의 강단과 교인들의 언어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고, 입만 열면 온통 '천국', 혹은 '천당', 즉 '하늘나라'였다. 평범한 성도들이 친숙한 이 단어를 쓰는 것이 뭐 그리 큰 대수이겠는가? 문제는 그들을 오도하는 지도자들에게 있다. 오늘날에도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지도자들이 강단에서 설교하는 내용을 들을 때도 필자는 어김없이 기독교의 소망 혹은 사후의 상태를 '하늘나라'와 연결해서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하늘나라'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꺼려서 대신 사용한 '하나님의 나라'와는 내용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이런 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진부하게 들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문헌들을 제대로 뒤져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주제를 놓고 씨름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낡은 주제를 새삼스럽게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다가 이제는 작은 시골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 자리를 바꾼 중년의 필자에게, 비단 강단에서만이 아니라 장례식을 치르면서, 늘 진지한 고민거리로 다가오는 주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다. 왜 한국교회는 예수가 목숨을 걸고 선포하고 실천한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를 철저히 외면하고, 완전히 왜곡된 '하늘나라'를 그토록 좋아하는가? 숱한 학자들이 지적했을 법한 문제 제기가 한국교회에는 왜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가?

큉의 말대로 묵시적 종말론을 문자 그대로 선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정신적 지형 속에서 복음을 재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던져지는 과제로 남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복음은 수 차례 모형변화를 겪어왔으므로 한국에서 새로운 모형변화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리고 외국 선교사들이 전해준 말을 곧이 그대로 앵무새처럼 지껄이느니 차라리 친숙한 우리말로 복음을 풀어내는 토착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또한 모형교체는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당분간 두 모형이 애매하게 뒤섞일 수도 있다. 더욱이 한국 사람들의 심성은 비빔밥처럼 얼마나 혼합적인가! 더욱이 요즘은 한국 사회에서 퓨전(Fusion) 문화가 새삼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니 골치 아프게 어려운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느니, 기왕에 쓰던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기독교의 구원관이 완전히 뒤틀린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나마 요즘에 들어서는 '천당'이라는 국적 불명의 용어보다는 하늘나라를 사용하는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된다. 하지만 천당이든 천국이든 혹은 하늘나라든, 한국교회에서 실로 이런 말은 결국 같은 내용을 담는 말이다. 최근에 우리는 불행한 사고로 많은 분들을 멀리 떠나 보냈다. 그들의 명복을 비는 마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더 이상 아픔이 없는 '하늘나라'에 가길 바라는 아름답고 순박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난 분들이 기왕이면 더 좋은 곳으로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말이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쓰는 말이든, 내세를 한국인이 즐겨 쓰던 '하늘나라'라는 말로 일컫는 것을 굳이 탓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말은 고인을 기리고 유족의 아픔을 달래는 치유와 위로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하늘나라가 단순히 일반인의 의례적인 애도의 차원을 넘어서 기독교가 선포하는 구원의 본질과 연결될 때에는 크나큰 혼동과 착오가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늦었지만 이 용어를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 만약 이런 현상을 계속 방치한다면, 기독교인은 일종의 정신분열자 혹은 위선자, 심지어는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마땅할 것이다. 필자가 문제점을 심각하게 느낄 때는 특히 장례식장에서 찬송가를 부를 때이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지적해 보기로 하자.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289장)

...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290장)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 믿는 맘 가지고 가겠네(291장)

본향(하늘나라!?) 가는 길 보이도다. 인생의 갈 길을 다 달리고(292장)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 아침 거기서...(293장)

저 뵈는 하늘집(하늘나라!?)으로 띠띠고 어서 가세(534장)

빛난 하늘 그 집(하늘나라!?)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541장)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열린 천국문 내가 들어가(544장)

 

장례식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마치 사후의 영혼불멸을 연상케 하는 찬송가를 지적하기로 하자.

내 갈길 멀고 깊은데 빛되신 주, 저 본향집을 향해 가는 길 비추소서(429장)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434장)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저 하늘나라 나 올라가(490장)

 

성도의 구원의 종국적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천국 혹은 하늘나라)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성도가 죽으면, 곧장 하늘나라로 간다고 믿는 점에 있다. 여기서 구원은 곧 사후의 운명과 직결된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부르는 찬송가는 기독교의 구원관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만약 성도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다면, 그는 더 이상 부활을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된다. 죽은 자들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심판도 이미 끝났으므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예수의 재림도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된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생각은 오직 영혼불멸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한 생각이고, 그래서 이것은 완전히 헬레니즘적, 샤마니즘적 혹은 불교적인 구원관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중에서도 이런 구원관을 견제하는 몇 안 되는 다음의 찬송가들 때문에 그나마 필자는 위로를 받는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95장).

어둔 밤 마음이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새 하늘 새 땅아...(261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 주 예수의 나라 이 땅에 곧 오겠네...(265장)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의 희망이었고, 죽은 자가 누릴 복이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자들이 받아들이고 경험하고 실천해야 할,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였다. 예수는 살아 있는 자들에게 임박한 하나님 나라 앞에서 결단을 촉구했다. 죽은 자들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예수는 상세한 사변적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죽은 자에 관해서는 예수와 바울은 '잠잔다'는 비유적인 표현 이상을 쓰지 않았다. 마치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처럼 예수는 "죽은 자에 관해서는 죽은 자가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을 하는 듯하다. 영혼불멸 사상에 낯선 유대인들에게 죽은 자들의 상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따름이다.

죽은 자들이 거하는 스올(음부)도 원래는 땅 아래의 허망하고 어두운 영역을 의미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스올이 의인들과 순교자들에게 점차로 밝고 복된 것으로 묘사되기는 했지만, 이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헬레니즘이 본격적으로 교회 안으로 파급된 이후로 비로소 사후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했고, 결국엔 땅 밑의 천국은 하늘의 천국으로 승격되었다. 여하튼 죽은 자들의 사후 상태를 천국과 동일시하는 것은 예수와 바울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내세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내세적인 천국관을 부추기는 가장 강력한 성서 본문은 아마도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일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예로부터 비유를 상당히 많이 만들고 전해왔다. 그 중에 아주 흔한 이야기를 하나 들자면, '곶감과 호랑이' 이야기가 있다. 어느 깊은 두메 산골의 작은 초가집에 부모가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호랑이가 온다고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가 곶감을 준다니까 울음을 뚝 그쳤고, 때마침 집 앞을 서성거리던 호랑이가 곶감 이야기를 듣고는 곶감이 자기보다 더 힘센 놈인 줄로 착각하고 도망을 갔더라고 하는 줄거리가 주된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무슨 깨달음을 얻었으며, 우리의 생각과 태도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가? "옛날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구나!"하는 정보를 얻었는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누가 지어낸 허황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아니면 "호랑이는 실제로 곶감을 무서워하니까, 위험한 산골을 지나갈 때에는 반드시 곶감을 지참해야지"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가? 그것도 아니다. 실제로 호랑이는 곶감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이도 저도 아니면, "만약 전체적 맥락 혹은 전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도 호랑이처럼 어리석게 착각하기 매우 쉽다"는 진리를 깨달았는가? 이것도 분명히 이야기가 전달하고 하는 교훈의 핵심이 아니다. 이야기의 핵심과 목적은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으로는 무서운 협박보다는 달콤한 먹이가 훨씬 더 낫다는 교훈을 주는 데 있다. 폭넓게 생각하자면, 채찍보다는 사랑이 훨씬 더 교육적이라는 교훈이다.

'곶감과 호랑이'의 이야기를 오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후의 천국을 입증하는 강력한 본문으로 곡해되어 왔다.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실제로 있었을 법하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이기적인 부자들도 많이 있고, 부자 집 대문 앞에서 걸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당시에 근동 지방에 유사한 형태로 널리 퍼져 있던 민담 혹은 전설 중의 하나이다. 예수는 그 당시의 청중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려고 친숙한 이 비유를 끌어왔다. 우리는 이 비유의 목적 혹은 초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비유는 현세와 내세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주려고 하기보다는 청중에게 회개의 결단을 촉구한다.

만약 이 비유에서 우리가 "사람은 죽으면 곧바로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 들어간다"는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본문의 의도와 핵심을 상당히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부자는 무조건 지옥에 가고, 거지는 무조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것도 상당한 오해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선한 일을 많이 행한 부자들 혹은 하나님을 잘 섬긴 부자들은 참으로 억울해 할 것이다. 그리고 단지 거지로 살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죽어서 천국에 가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공평한 횡재를 한 셈이 된다. 물론 예수는 부자를 향해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 매우 어렵다"(마 19:23)고 분명히 말한 적이 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갈 수 없듯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어려운 게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눅 6:20)라는 예수의 말은 가난한 자는 천국에 무조건, 자동적으로 들어간다는 말로 오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자는 실제적인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갈구하는, 그래서 마음까지도 가난한(마 5:3) 자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비유에는 '나사로'가 하나님을 잘 믿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하나님이 그를 돕는다"는 뜻을 의미하는 나사로의 이름은 그가 경건한 자였음을 암시한다.

천국에 가는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지옥에 가는 부자는 불꽃 가운데서 목이 타는 고통을 당한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상당한 오해를 낳는다. 왜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지 않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가? 그리고 몸이 없는 영혼이 뜨거운 불 속에서 혀가 타는 고통을 당한다는 말도 우습지 않은가? 지옥에 있는 자가 천국에 있는 자와 대화하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더욱 우습지 않은가? 그리고 아브라함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말하지 않고,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나서 부자의 아들에게 가서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가? 마치 죽은 자가 살아나서 이승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듯한 느낌을 풍기지 않는가?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윤회' 혹은 '환생'을 믿는 자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본문의 말 그대로 이해하면, 그럴 듯하지 않은가? 이 비유는 이런 상세한 정보를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곶감과 호랑이'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거나, 호랑이가 실제로 곶감을 무서워한다거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야기의 의도와 목적을 착각하고 만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한다. 이 비유는 물질적 성공이 반드시 의로움의 표시가 아니며, 가난이 반드시 악함의 표시가 아님을 말한다. 이 비유는 무엇보다도 부자를 향해 경고와 충격을 준다. 부자는 화려한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즐기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율법의 요구(신 15:4)를 무시하였다. 비유에 나오는 거지는 식탁에서 땅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어먹으며 겨우 생명을 유지할 정도로, 그리고 부자 집의 개가 그의 상처를 핥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그를 전혀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실로 불의한 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유의 핵심 혹은 초점, 즉 교훈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만약 부자가 가난한 자를 계속 방치하고 외면하는 불의를 행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본문에는 심판이 죽은 후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을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단지 죽은 후에만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셔서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심판하시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너그럽고, 어떻게 보면 상당히 게으르고, 어떻게 보면 상당해 무책임한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비유는 불의하고 불공평한 현실을 고치려는 동기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의한 현실을 두둔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의한 세상은 결국 죽은 후에야 비로소 뒤집어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현실을 묵묵히 참고 살자"는 식의 체념과 방관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 때문에 민중의 희망이 되어야 할 기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세상을 썩게 만드는 '세상의 설탕'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본문의 의도와 완전히 어긋난다.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내용은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본문은 부자의 교만과 무책임을 지적하고 언젠가 반드시 닥쳐올 운명의 뒤바뀜을 예고함으로써, 부자의 회개를 강하게 촉구한다. 그리함으로써 부자가 이 땅에서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기를, 이 땅에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이 없기를, 부자와 가난한 자의 엄청난 차이와 차별이 사라지기를 촉구한다.

사후의 세계에 관해 상세한 정보를 준 적이 없는 예수는 더욱이 사후의 세계를 '천국' 혹은 '지옥'이라고 부른 적도 전혀 없다. 우편의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예수가 약속한 '낙원'을 많은 학자들은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로 보거나,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기록된 '음부'(죽은 영혼이 머무는 옥)와 동일시한다. 물론 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본 성도들이 죽음과 동시에 그 기쁨을 깡그리 잃어버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 살아 있는 우리보다 더 큰 평안을 누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때까지 벌거벗은 몸으로 안식하는 영혼이 어찌 하늘나라에 이르러 춤추고 노래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필자는 이 자리를 빌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심각한 반성과 특히 찬송가 가사의 조속한 개정을 강력히 촉구한다. 만약 우리가 이 점을 계속 시정하지 않는다면, 이 땅은 천국행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 정도로 격하될 것이고, 이 땅의 수고는 결국 차표를 사기 위한, 기껏해야 천국에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예약 행위로 오인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우리의 책임과 몸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덧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 다음에 남게 될 것이라고는 오직 기독교 복음의 쇠퇴, 아니 기독교의 멸망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소서!

<기독교사상 2003년 8월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