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과연, 그리고 어떤 공동체인가?

이신건


교회는 과연 공동체인가?

7월 28일에 열린 '2006 성서한국대회'의 한 모임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과 공동체 운동'이라는 주제 아래 토론회가 진행되었는데,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공동체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고, 그들은 각자 공동체에 대한 열정을 품은 채 자신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들이 말한 '공동체'란 반드시 교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교회에 대한 강한 기대와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 보도한 인터넷 매체 '뉴스앤조이'(7월 31일)에는 다음과 같은 네티즌들의 댓글이 눈에 띄었다.

 

공동체 만든답시고 헌금 많이 하는 신자 우선이 된 교회가 혐오스럽다. 교회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장이 되어야 하거늘, 목사는 돈 많은 신자 눈치보며 아부하기에 급급하다. 하나님의 사역이란 결과뿐 아니라, 과정에서도 승리해야 하거늘.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가면서 복음주의와 이상주의를 혼돈하는 먹사들 때문에 예수님만 또 십자가형을 받으시는 한국 교회!

신앙생활은 세속 공동체에 속했던 자신의 호적을 신앙공동체로 옮기는 것이지요. 그것을 안 하고 신앙생활을 하려니 온갖 변형된 복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호적을 옮깁시다. 하나님의 나라로. 그런데 어디 호적을 받아주는 공동체가 있어야 말이지요. 우리가 만듭시다. 실제로 사람들이 호적을 옮겨올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공동체가 답이 아니라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가느냐가 더 좋은 답일 듯한데, 그런 좋은 모델상을 제시하는 것이 더 좋은 해답일 듯...

신앙공동체라는 말을 많이들 하지만 성경적 핵심은 삶을 실제로 책임지는 공동체이지요. 부모도 자식도 형제도 결국은 못하는 그 일을 지체들이 상호간에 하는 것이 아가페 사랑이라고 봅니다. 자기 삶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소외된 인간의 처절한 실존이지요. 그 인생의 처절한 짐을 서로가 나누어지는 것, 그것이 신앙공동체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그것. 내 부모, 내 자식, 내 식구라는 본능적 자기 방어 기제까지 무너져야만 할 수 있는 그것. 검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의 삶의 공동체.....

 

교회 공동체에 대한 여전한 기대와 깊은 실망감을 거침없이 쏟아낸 글들이다. 기대든 실망이든, 모두가 교회가 공동체여야 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일치를 보인다. 그런데 교회는 과연 공동체인가? 교회는 언제나 공동체임을 스스럼없이 표방할 수 있는가? 누가 들어도 어리석을 법한 이런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본다. 교회가 공동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교회(敎會)라는 이름 자체부터 이미 모임, 공동체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이 이름은 여전히 미흡한 듯이, 사람들은 흔히 '교회 공동체라'는 말을 쓰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동어반복(同語反覆)이 아닌가! 물론 우리말에는 이런 현상이 꽤 흔한 편이다. 예컨대 역전 앞이니, 처가 집이니, 돼지 족발 등 ... 이루 셀 수가 없다. 하지만 교회에다 굳이 공동체라는 사족(蛇足)을 다는 이유는 우리만의 고유한 언어 습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실로 '교회 공동체'라는 말은 "교회는 모름지기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공동체가 아니다"라는 비판과 함께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내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몰트만)은 더 나아가 '공동체적 교회'라는 말을 제안하기도 한다.

당연히 공동체여야 할 교회가 왜 실제로는 공동체가 아니라고 사람들은 느끼는 걸까? 사소한 이유일지는 몰라도, 어떤 사람들은 말꼬리를 붙잡기를 좋아한다. 작고하신 대천덕(토레이) 신부는 언젠가 교회를 한자어로 '敎會'라고 쓰지 말고 '交會'라고 고쳐 쓰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비록 세상의 사교 모임과 구별되기 어렵다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그래도 모처럼 듣는 신선한 말이었다. '사귐과 모임!'이라니,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이 한층 더 두드러져 보이지 않은가! 솔직히 옛날에 비해 오늘의 교회는 상당히 썰렁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름이라도 참신하게 고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참으로 무뚝뚝하고 비사교적인 독일 사람들도 오래 전부터 교회를 Gemeinde(공동체)라고 불러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한자를 즐겨 쓰지 않는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대천덕 신부의 제언도 그다지 달갑게, 살갑게 다가오지 않는다. 차라리 우리말로 기사모(기독교를 사랑하는 모임) 혹은 예사모(예수를 사랑하는 모임)라는 이름이 현대인들과 젊은이들에게 더 어필하지 않겠는가!

공동체적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름을 쓰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그보다는 뒤틀린 이름을 되돌려 놓는 것이 더 바람직할 듯싶다. 옛날이 더 좋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옛날에 우리는 '교회'라는 말보다 '예배당' 혹은 '교회당'이라는 말을 더 즐겨 썼다. 물론 이것은 건물 혹은 장소를 일컫는 말이다. 당연히 교회는 예배를 위한 모임만은 아니다. 더욱이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장소 혹은 교회 건물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한 언어적 오류다. 그래서 "교회에 간다"거나 "교회를 짓는다"는 말은 완전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은 그 어디나 교회다. 사람이 교회당을 지을 순 있어도, 교회를 지을 순 없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교회당을 짓지 않고 성전(聖殿)을 짓는다고 하는가! 하지만 왜 건축할 즈음에 이르러서만 하필, 그리고 갑자기 성전 타령인가? "교회든 교회당이든, 뜻만 통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절대 아니다. 하이데거(Heidegger)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언어는 습관을, 습관은 성격을, 성격은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만약 교회당을 교회와 계속 혼동하다보면, 교회의 성격과 운명도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교회(당), 즉 건물을 떠난 교인들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닌 셈이 된다. 교회(당) 안에서도 공동체적 성격이 날로 약해지는 마당에 교회(당) 밖에서는 무슨 공동체적 성격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용어부터 정확히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어떤 공동체인가?

말이 어떠하고 현실이 어떠하든, 교회가 공동체라는 진리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단 성서가 공동체에 관한 용어를 얼마나 풍성하게 제공하는가! 하나님의 백성, 선택된 백성, 새로운 이스라엘 혹은 참 이스라엘, 새로운 가정, 사랑하는 자들, 그리스도의 몸, 포도나무와 가지, 자녀들, 양떼, 제자들, 형제들, 성도들, 성도의 교제, 새 성전 ... 등이다. 하지만 르와시(A. Loisy)의 말대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왜 교회가 왔는가? 이 말은 원래 르와시가 부정적으로 쓴 게 아니었다고 하는데, 그의 뜻과는 달리 주로 부정적으로 사용되곤 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가 교회를 설립하거나 기대하였는가?"를 되물을 때마다 이 말은 구호처럼 애용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대체물인가, 아니면 연속체인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단계(前段階)인가, 아니면 그 표징(表徵)인가? 달리 질문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인가? 학자들마다 견해가 엇갈리고, 그래서 아직도 토론이 분분하다.

지금까지 이와 같은 지루한 논쟁에 중요한 획을 그은 학자들이 적지 않게 나타났지만, 여기서는 특히 공동체의 개념과 관련하여 성서신학적 해결을 모색한 한 사람을 중심으로 말을 이어갈까 한다.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칼 바르트의 교회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던 필자는 어느 날 카톨릭 신학부가 개설한 강의 목록을 우연히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필자는 교회론과 관련된 강의 하나를 발견했다. 강의 제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강의를 담당한 교수의 이름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게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이다. 비교적 연로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얼마나 청아하던지! 마치 필자를 위해 특별히 배려하려는 듯이, 그의 독일어 발음은 매우 또렷하였고, 강의도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다. 더욱이 강의 내용은 너무나 명쾌하였다. 그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필자는 그가 쓴 책 두 권을 사들고 귀국하였는데, 어느 날 그 중의 한 권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름하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라는 책이다. 독일로 건너가기 전에는 한스 큉(H. Küng)의 책 '교회란 무엇인가'가 교회에 대한 관심을 크게 자극하더니, 귀국 후에는 그의 책이 교회를 향한 사랑을 더 한층 깊게 해 주었다. 이로 인해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처음부터 카톨릭(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의 원 제목은 "Wie hat Jesus Gemeinde gewollt?"이다. 고로 직역하면, "예수는 어떻게 공동체를 원했는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책의 참된 목적은 "예수가 어떤 형태의 공동체를 원했는가?"라기보다는 "예수가 어떤 방법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기를 원했는가?"를 밝히려는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자가 붙인 이름이 훨씬 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들린다. 다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책은 실제로 두 가지 주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 즉 이 책은 "예수가 어떤 형태의 공동체를 어떤 방법으로 형성되기를 원했는가?"를 말하고 있다. 부제(副題)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차원"을 논한다.

이 책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 뗄 수 없는 상관성을 지니며,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삶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명쾌하고, 매우 설득력 있게 변증한다. 예수가 원한 것은 영혼의 위로와 구원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소집이며, 교회는 '산 위의 도시'로서 만인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피안화(彼岸化)와 개인화(個人化)에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로핑크는 이렇게 묻는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사회적 차원이 인간들에 의해 표출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지상에 도래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제자 공동체, 새로운 가정,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의 이상 사회가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사회적 실재라는 것이다. 이 사회 안에서는 일체의 사회적 장벽들이 무너지고, 일체의 폭력과 지배가 단념되며, 진정한 형제애가 실천된다.

이런 사회를 로핑크는 대조사회(對照社會: Contrastgesellschaft) 혹은 대척사회(對蹠社會: Gegengesellschaft)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이 용어는 교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용어로서 한국 교회에 널리 애용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종종 이를 대안사회(對岸社會 혹은 代案社會)로 고쳐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세상과 마주보는 다른 세상을 만든다"는 부정적인 의미와 함께 "세상 안에서 다른 세상을 만든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갖는다. 로핑크의 생각에도 이 두 가지 관점이 분명히 들어가 있다고 믿는다.

병든 하나님의 백성을 치유하고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소집하려는 예수의 의도는 초기의 공동체들로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이는 '서로 함께'(알렐론)라는 상호 대명사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가에 의해 입증된다. 서로 앞장서서 남을 존경하라(롬 12:10). 서로 합심하라(롬 12:16). 서로 받아들여라(롬 5:7). 서로 충고하라(롬 15:14).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롬 16:16). 서로 기다려라(고전 11:33).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라(고전 12:25). 서로 사랑으로 남을 섬겨라(갈 5:13).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라(갈 6:2). 서로 위로하라(살전 5:11). 서로 건설하라(살전 5:11).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살전 5:13). 서로 선을 행하라(살전 5:15). 서로 사랑으로 참아 주라(엡 4:2). 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엡 4:32). 서로 순종하라(엡 5:21). 서로 용서하라(골 3:13). 서로 죄를 고백하라(약 5:16).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약 5:16). 서로 진심으로 다정하게 사랑하라(벧전 1:22). 서로 대접하라(벧전 4:9). 서로 겸손하게 대하라(벧전 5:5). 서로 교제하라(요일 1:7).

이처럼 서로를 한 몸처럼 사랑하고 한 마음으로 섬기는 교회를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비록 '생활 공동체'(생산 공동체, 소비 공동체)는 아닐지라도, 이 정도라면 적어도 '운명 공동체'라고 불러야 합당하지 않겠는가! 물론 "다 함께 생활하지 않는 공동체가 어떻게 운명 공동체가 될 수 있겠는지?"를 날카롭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결과야 어떠하든,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는 처음부터 생활과 운명 공동체를 지향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예수는 모든 사람들을 이와 같은 공동체로 부르지는 않았다. 지역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제자들의 공동체를 후원한 흩어진 공동체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비교적 소상히 알려졌지만, 그들 상호 간에 어떤 연대(공동체)를 이루었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도 같은 소망(하나님 나라)을 공유하며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때때로 사회적 의무와 향락을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사회로부터 거부와 차별과 박해를 받았으며, 종종 사회와 심한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이 모든 일이 어찌 개인적 결단과 소영웅주의로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공동체를 위한 교회의 사명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의 위기를 말한다. 교회가 위기에 빠진 진정한 원인은 교세의 감소와 대형 교회의 추태, 그로 인한 사회적 신뢰도의 추락 등과 같은 표면적인 현상보다는 이보다 더 근원적으로 교회가 자신의 본질 혹은 방향을 잃어버린 사실에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교회는 대조사회(對照社會)로서 언제나 세상 의 인기와 존경만을 누릴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는 대안사회(代案社會)로서 세상 사람에게 진정한 대안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로핑크의 말대로 그리스도인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대치될 수 없는 봉사는 아주 간단하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럴 때에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암울하다. 유감스럽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은 날로 약해지고 있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천민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교회의 세속화, 상업화와 그로 인한 양극화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 다른 교회들과의 공동체적 결속은 두 말할 것도 없고, 한 교회 안의 교인들의 공동체적 연대도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최근에 유행을 타고 있는 셀(Cell) 교회 운동이 이런 현상을 조금은 완화해 줄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이런 운동이 대안사회와 대조사회로 발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처럼 생활과 운명 공동체를 꾸려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와 교인의 숫자를 늘이기에만 치중하지 말고 모인 사람들이 초기 공동체처럼 최소한 운명 공동체로 발전해 가려고 몸부림을 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최소한 예수가 세우길 원했던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 부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공허한 공염불인가, 아니면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 이상인가? 필자는 여기서 잠깐 몰트만(J. Moltmann)의 아름다운 설명을 빌려, 사도행전이 전해주는 믿기 어려운 기적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고 싶다.

이것은 그 당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황금시대'에 관한 역사적 보고가 아니라,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가능성을 열어 주는 이야기다. 오순절 이야기는 새로운 사회론이 아니라, 하나님 체험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도래하여 영혼과 육체를 관통하고 이들을 새로운 사귐으로 인도하는 성령에 대한 체험이다. 이 체험 안에서 사람들은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능력으로 충만해짐을 느끼고, 새로운 양식의 삶을 살도록 격려되고 있음을 느낀다.

1. "사도들이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이것은 첫 번째 요인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 일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생명, 영원히 사는 생명의 충만함이 개시되었다. 죽음은 힘을 잃었다. 죽음의 위협은 이제 효력을 잃었다. 영원한 생명과 깨어질 수 없는 생명 희열이 임했다. 부족하다는 것은 생명의 즐거움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뜻한다. 부족하다는 것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부족하다는 것은 아프고 외롭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생명 자체를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가장 큰 결핍, 절대적인 결핍은 죽음이다. 우리가 생활 가운데서 느끼고 겪는 모든 다른 결핍은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죽음이 삶으로부터 빼앗아 가는 것이다.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생명을 누려도 우리에겐 만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면, 죽음이 결코 죽일 수 없는 생명, 언제나 넉넉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지금 살아 있는 자들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도 족히 넉넉하다.

2.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이것은 두 번째 요인이다. 이 요인과 더불어 더 큰 일이 일어났다. 수많은 무리의 사람들로부터 하나의 공동체가 생겨났고, 이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 이것은 공동체적인 영에 대한 체험이다. 공동체적인 영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 안에서 사람들 간의 분열이 극복되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 억압이 사라졌다. 인간에 의한 인간 비하가 끝났다. 인간에 의한 인간 소외도 제거되었다. 주인과 종이 형제가 되었다.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이 모두 친구가 되었다. 인간 사회로부터 특권과 차별이 사라졌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된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어떤 하나님?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 공동체적인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이다. 우리는 고독을 박차고 나와서 공동 생활로 들어간다. 서로에 대한 우리의 불안과 적개심은 단숨에 웃음거리로 변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넉넉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살아 움직이면서, 자신의 공동체적인 영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한 마음 한 뜻"이 되도록 초대하기 때문이다.

3.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것은 세 번째 요인이며, 모든 것은 다 여기로 귀착된다. 부활의 영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적인 영에 대한 체험 안에서 그 누구도 자신의 소유에 집착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영생의 확신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재물이 주는 모호한 확실성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의 재물은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사용하기 위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물건을 통용하였으며", 바로 그래서 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재물을 소유하였던 사람들은 이를 사도들에게 가져왔고, 사도들은 이를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제안은 이렇다. 가장 좋은 것은 적절한 크기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며, 서로와 함께 서로를 위하는 공동체 생활을 지향하려는 생각을 강화하는 것이다. 가난의 반대는 소유가 아니다. 가난과 소유의 반대는 공동체이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부유해진다. 친구와 이웃, 동무와 동지, 형제와 자매로 부유해진다. 공동체로 살아가면, 우리는 대개의 곤경 속에서도 자신을 도울 수 있다. 사람과 이념, 능력과 에너지는 실로 충분하다. 이 모든 것들은 단지 개발되지 않았고, 위축되었으며, 억압되었을 뿐이다. 우리의 부유함을 재발견하자. 우리의 연대성을 재발견하자. 공동체를 만들자(J. 몰트만, 이신건 옮김, 생명의 샘, 대한기독교서회, 135쪽 이하).

 

<기독교사상 2006년 9월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