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과연 우리를 구원할까?

- 김대식 박사의 '사중복음과 美'에 대한 논평 -

이신건

 

 

 

바야흐로 미(美)의 시대가 무르익고 있다. 비록 미인대회는 아직도 진선미(眞善美) 순으로 서열을 매기지만, 실로 현대인들은 점점 더 미에 도취되어 가는 듯하고, 그래서 미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는 듯이 보인다. 예부터 우리 조상도 미와 멋을 무척 사랑해왔지만, 요즘만큼 미와 멋에 관심을 기울인 시대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가령 화장품 수입과 성형 수술에서 한국인은 단연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한 통계에 따르면 13-43세 여성 10명 중의 7명은 "외모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생각하고, 10명 중의 8명은 외모 가꾸기를 멋이 아니라 생활의 필수 요소로 생각한다고 한다. 35-43세 중년 여성은 외모를 부(富)의 상징 혹은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얼마 전의 한 여성 신학자(정현경)도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거야"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내용적으로는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여성의 상처를 극복하는 내면의 힘을 강조하려고 했지만 말이다.

  이런 시대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기라도 하듯이, 김대식 박사(이후로는 김 박사)는 활천 마당에서 '사중복음과 美'라는 표제 아래 작은 글을 연재하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평자는 미학에 관해서는 거의 문외한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무관심한 편이었다. 아마도 진(眞)과 선(善)은 교육과 학습을 통해 습득해야 하지만, 미(美)는 본능적, 직관적으로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리라. 더욱이 신학에서 미학(美學)의 수용은 매우 더딜 뿐만 아니라 희귀하기조차 하다. 그러므로 김 박사의 글을 종종 흥미롭게 읽어보긴 했지만, 이를 평가할 자리에 서게 될 줄은 차마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청탁자의 간곡한 부탁에 떠밀려 학술적인 논의보다는 주관적(직관적)인 인상을 피력하고자 한다.

  김 박사가 10회를 넘기며 연재하고 있는 이 글은 종전에 12회로 마감한 '사중복음에 대한 생태영성적 조명'에 이어 다시 시도되는, 사중복음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혹은 사중복음의 새로운 읽기의 한 시도다. 일단 사중복음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과 참신한 해석의 시도 자체부터가 가상할뿐더러 무척 아름답게도 느껴진다. 지금까지 그 어떤 선배도 시도하지 못한 일이기에 평자로서도 먼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김 박사에게 한 수 배우는 마음으로 그의 글을 읽었지만, 지면과 평자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열 번째 가름 '사중복음과 쇼펜하우어의 해방의 미학'만을 간단히 평가해 보기로 하겠다.

  미학은 주로 철학에 의해 주도되었으므로 철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할 것이다. 그래서 김 박사는 여러 철학자들과 대화하는 중에 쇼펜하우어(Schopenhauer)라는 철학자까지 주목하게 된 것 같다. 김 박사의 폭넓은 관심과 깊은 혜안에 경의를 표한다. 예술 혹은 미학을 직관의 영역에 둔 쇼펜하우어와 대화한 것은 일단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헤겔(Hegel)의 말대로 종교도 직관 혹은 표상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과 신학의 만남은 대등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 자칫하면 김 박사는 철학적 미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건전한 신학적 미학을 수립하는 것 못지않게, 이를 훼손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미학은 인간의 주관적 직관 혹은 몰입을 통해 다가오는 본질의 현상에 주목하지만, 신학적 미학은 이를 통해 혹은 이를 극복하는 가운데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계시적 행동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사중복음에 대한 생태영성적 혹은 창조영성적 이해를 이어서 김 박사가 그에 대한 미학적 이해를 통해 해방의 미학을 발견한 것은 놀랍다. 특히 성결교회에서 오랫동안 간과되어온 창조 영성과 해방 영성을 연이어 새롭게 부각하는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사중복음에 대한 다양한 시각 자체가 이미 미적인 기쁨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짜임새 있는 체계와 새로운 표현도 매우 아름다워 보인다.

  다만 신학적 미학의 분명한 확립이 없는 가운데 성급히 이루어지는 철학적 미학과의 대화 때문인지, 아니면 아름다운 언어의 발견이 쉽지 않은 탓인지는 몰라도, 종종 내용이 난해하며 표현도 덜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내용적으로는 가령 무(無)의 관심, 집착과 소유로부터의 해방(자유), 인간의 욕망적인 삶의 덧없음을 깨닫는 것, 없음의 존재이자 있음의 존재인 하나님 등이라는 표현은 불교(철학)적인 느낌까지 강하게 풍긴다.

  철학적 미학은 헬라인처럼 조형적, 정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신학적(히브리적) 미학은 역동적, 미래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괴테의 말(김 박사의 마지막 인용구)처럼 아직은 자신과 세계와 완전히 조화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더욱이 이 세상이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신학적 미학은 여느 미학과는 달리 진과 선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진과 선 혹은 진실한 사람과 선한 사람은 아름답다. 그러므로 진과 선 혹은 그런 사람은 구원하거나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진과 선과 분리된 미는 종종 아름답지 못할 뿐더러, 영혼과 세계를 더럽히고 타락케 하기도 한다.

  예수는 진리와 선함으로써 구원하지만, 미모로써는 그리하지 않는다. 예수는 오히려 외모의 추함 혹은 그를 향한 투신(사 53:2)을 통해 구원한다(그래서 예수는 진정 아름답다)! 그리고 바울의 공동체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도 아름다운 자가 아니라 오히려 아름답지 못한 자다(그래야만 모두가 아름다워진다(고전 12:23)! 이를 간과하는 미학은 진정 신학적 미학이 아니다. 김 박사는 앞으로 이 점에 꼭 유의해 주길 바란다.  

<활천 2006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