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교회학교 교육을 위한 발돋움

(아현교회 교사대학 특강, 1999, 5, 27)


목차
제1강: 희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제2강: 참 교사의 모습



제1강: 희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들어가는 말

우리 시대의 화제거리는 압도적으로 "미래, 21세기, 새로운 밀레니엄"입니다. 21세기(2001년)는 앞으로 1년이 더 남았지만, 새로운 천년(밀레니엄)은 1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100년을 못사는 사람으로서 천년이 바뀌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짜릿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년이 바뀌는 것이 뭐 그리 대수냐?" 하고 묻는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만, 한 해가 바뀌는 것에도 쉬이 감격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세기적 전환이라는 것이 보통 큰 사건이 아닙니다.

1천년이 진입하던 그 시대에도 흥분이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과 함께 특히 종말적인 분위기가 크게 확산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앞으로도 새로운 종말론이 굉장하게 활개치리라 예상이 됩니다. 노스트라다무스를 비롯한 온갖 현자들의 예언과 생활 환경의 급격한 변화 등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가운데서 그럴싸한 종말론이 우리를 또 한번 흔들어 놓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거짓 희망도 나쁘지만, 거짓 절망도 나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가오는 미래를 열렬한 희망 속에 맞이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본래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기술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런 희망을 더욱 부풀리고 있습니다. 정말 하루밤 사이에도 엄청나게 변화하는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얼마나 크게 바꾸어 놓을지 정말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공상 과학에서나 상상하던 것이 오늘날에 거의 다 현실화되었듯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온갖 공상 과학, "X 파일"의 내용과 같은 것들이 우리의 현실이 될 날도 머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 손자, 증손자는 아마 완전한 별종의 인간, 새로운 인간이 되어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만큼 우리는 급속히 달라지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가오는 미래는 우리를 엄청나게 설래게 하고 있습니다.

1. 역사의 양면성

하지만 역사를 냉철하게 되돌아 본다면, 인류 문명의 발전이 결코 좋은 면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20세기만을 생각해 보더라도, 20세기는 역설, 모순의 세기였습니다. 인권이 크게 신장된 만큼 폭력과 전쟁도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경제적 풍요를 누린만큼 공황과 빈곤도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문명이 발달한만큼 반문명의 징후도 더욱 커졌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도도히 다가오는 새로운 물결, 즉 세계화와 정보화도 야누스와 같은 두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더욱 가까워지는 지구촌으로 변하는 만큼 지역 문화의 특성, 개성은 도태당하게 됩니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투자와 자본 이동의 자유가 커지는 반면, 인류는 20대 80 사회, 즉 20%의 부자와 80%의 거지로 나뉘어진다고 합니다. 아니 부익부-빈익빈의 현상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해질 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세계의 삼대 부호가 가장 가난한 20개의 나라의 총재산보다 더 많은 부를 장악하고 있다고 합니다.

생명공학과 우주공학, 정보통신 기술의 놀라운 발달은 문명의 질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지만, 인류는 점점 더 큰 불안, 공허감에 노출되어갑니다. 인간 욕망의 무한한 양적 팽창이 점점 더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킴으로써, 지구 문명과 인류가 되돌릴 수 없는 종말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진지하게 고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오면, 인구 증가와 지구 자원의 고갈, 물과 식량의 부족 때문에 인류가 큰 곤경에 빠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참으로 우리 인간은 진화와 퇴보, 문명과 반문명, 풍요와 빈곤, 안락과 불편, 생존과 멸종을 동시에 누릴 수 밖에 없는 역설적 존재입니다. 바울이 한때 육적인 존재와 영적인 존재 자신 사이에서 고민하며 탄식하였듯이, 오늘날의 인류도 지금 두 세계 사이에 끼여서 갈등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누가 우리를 이 곤경으로부터 구원할 것입니까? 도대체 인류의 희망과 구원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과학입니까? 영웅입니까? 미국입니까? 교회입니까?

2. 희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인류에게 선사한 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서와 탈무드를 비롯한 훌륭한 정신 유산, 예언자들과 현자들을 포함한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인류에게 선사한 가장 위대한 선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칠 줄 모르는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메시야 기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나타났으며, 지금도 이런 희망이 인류를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인류가 시도한 혁명, 유토피아의 꿈도 대개 여기에서 발원하였습니다.

희망은 절망 때문에 꺾이기도 하고 절망에서 싻트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은 절망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희망, 아니 절망적 현실에 맞서는 희망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 희망이 역사적 환경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환경을 초월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희망이 인간의 조건과 역사적 환경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주어진 것, 하나님의 위대한 초대,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하십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서 "새 하늘과 새 땅, 하늘로부터 내려오눈 새 도성"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21세기나 새로운 밀레니엄 때문에 웃고 울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꿈꾸는 미래가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꿈의 연장일 뿐입니다. 인류의 미래가 제 아무리 휘황찬란하게 그려진다고 하더라도, 그 빛 아래에는 언제나 절망의 그림자도 함께 깊게 드리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는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더 이상 고통도 탄식도 없는" 미래입니다.

인류의 시계는 현재로부터 미래로 흐르지만, 하나님의 시계는 미래로부터 현재로 흐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희망도 미래로부터 옵니다. 희망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먼저 그 나라를 구해야 하며,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여기서 잠깐 우리가 전하고 가르쳐야 할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의 특징에 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3. 하나님 나라의 특징

1) 하나님으로부터, 그러나 이 세상 안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나의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요 18:36). 그러나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개역성서에는 이 본문이 "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번역됨으로써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오해될 여지를 주고 있지만, 예수님의 뜻은 원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오지는 않지만 바로 이 세상 안으로, 이 세상을 위해 들어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 가소서"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요한도 "주여, 어서 우리를 데려가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무리 새롭고 탁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나라는 바로 이 땅, 이 우주 안에 세워질 하나님의 통치이지, 그 어떤 다른 우주에 세워질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더불어, 아니 이 세상이 구원받기를 간구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멸망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 올리시려고 하늘 두레박을 내려보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실만큼,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까이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찾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선물, 그러나 우리의 협력을 통해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이지, 우리가 스스로 쟁취,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지, "너희들이 친히 그 나라를 실현하라"고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눅 12:32).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상황이나 인간, 제도에 너무나 큰 기대를 걸 필요도 없으며, 또 그것들 때문에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기대와 노력 너머에 있는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기서도 오해하지 마십시오.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순수한 선물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을 향해 입벌리고 앉아서 그 나라가 떨어질 것을 기다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회개와 협력을 요구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순수한 선물이지만, 그 나라는 우리의 기도와 순종, 우리의 협력을 통해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실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도 악귀를 추방하고 병자를 치유할 권능을 주셨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임무를 위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의 일꾼, 그 나라의 전령이 될 수 있습니다.

3) 샬롬의 나라,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경고

도로변에서나 전철에서 전도하시는 분들 중에서는 "신앙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시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저는 그들의 전도열심에 대해서는 경탄해 마지않지만, 그 전도 구호가 못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호는 성서에도 없는 "천당"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죽어야만 우리가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가르치기 때문이며,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제게는 마치 "지옥으로 떨어지지 싫으면, 예수를 믿으라"는 협박의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소식은 그야말로 모든 백성들에게 미칠 크고 놀라운 소식, 복된 소식,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처럼 "도끼로 찍겠다"라는 무서운 말을 써가면서 회개를 촉구하시지 않고, "너무나 좋은 나라, 특히 가난하고 병든 백성에게 정말 반가울 수 밖에 없는 기쁜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이 나라에 다같이 참여하자"는 초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자주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으며, 친히 잔치의 주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 나라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 해방과 평화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은 본질적으로 만물에게 미칠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혼인 잔치가 베풀어지니까, 동네 사람들이여, 와서 함께 축하하며 즐기자, 거지도 와서 먹고 마시라"고 하지, "혼인 잔치에 오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끝까지 이 초대를 거절하는 자, 기쁜 소식을 받기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경고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복수를 즐기시는 잔인한 하나님의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대를 거부한 자에게 떨어질 자연스러운 운명입니다. 굶어 죽어가면서도 잔치에는 참가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셈이며, 문 앞에 굴러온 복을 발로 차는 셈입니다. 요한의 말처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은 죄인을 그대로 방치하심으로써, 심판하십니다.

4) 보편적인 나라, 그러나 당파적인 활동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내용은 복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난"이라는 말에는 물론 경제적인 빈곤만이 아니라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소외와 차별 등의 뜻도 포함되어 있지만, 분명한 점은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시고 "부자들"에게는 화를 선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들에게는 당연히 기쁜 소식일 수 밖에 없지만, 부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거지 나사로 앞에서 호의호식하는 부자,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던 부자 청년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예수님을 따랐고, 복음을 믿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이라고 무조건 그들을 축복하신 것은 아니며, 가난 그 자체를 복된 것으로 미화하시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사회 구조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기에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도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들의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적으로,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자들을 무조건 증오하셨거나, 그들을 타도하자고 선동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원칙적으로 구원에서 배제하셨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부자들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과 이웃을 보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존재만이 아니라 어리석고도 불쌍한 존재로 비쳤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

하지만 레위나 삭개오처럼 자신의 탐욕을 뉘우치고 가난한 자들의 운명에 동참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지만,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에게 가능합니다. 즉 더 이상 부자이기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었던 부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열려 있는 나라, 보편적인 나라입니다.

4. 절망하는 어린이

그리고 중요한 사실, 정말로 중요하지만 너무나 자주 망각해 온 또 하나의 막중한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이"에게, 아니 오직 "어린이와 같은 자"에게만 약속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오늘의 주제에 더 접근할뿐만 아니라 복음의 핵심에 더 깊이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부자"에게 약속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약속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상황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에게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는 통로가 두 가지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오직 가난한 어린이로서만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자는 때때로 어린이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는 언제 어느 때나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는 온유하지 않을 수 있고, 마음이 깨끗하지 않을 수 있으며, 애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유하지 않고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며 애통하지 않는 어린이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어린이가 있다면, 어른처럼 길들여진 영악한 어린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의 길, 즉 어린이가 되는 길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어린이에게만 임하는 복입니다.

그러나 옛날 옛적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어린이야말로 최고로 푸대접받는 존재입니다. 아니 푸대접이 아니라 정말 학대받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요즘 어린이는 옛날에 비해 너무나 호강하며 사는 것이 아니냐? 오늘날처럼 어린이가 존중받는 시대가 어디에 있었느냐?" 그러나 어린이가 존중되는만큼, 이에 비례하여 어린이 학대도 더욱 증가해 왔습니다.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지나친 배려도, 이것이 어른의 욕심을 채우려는 수단인 한, 또 다른 형태의 어린이 학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 방임도 또 하나의 어린이 학대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가정해체로 인한 아동 학대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웃사랑회가 최근 밝힌 1/4분기 아동학대 상담사례 통계에 따르면, 학대사례 가운데 45%가 가정해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매년 2십만명 내외의 아이들이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어머니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있습니다.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들의 70% 이상이 살아있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어린이 학대, 어린이 성폭력도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 있으며, 방황하는 청소년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 나라 청소년 흡연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청소년 폭력예방재단이 지난 해까지의 학교폭력사례를 분석한 결과, 집단 폭력은 97년 20%에서 98년 45%로 급증했으며, 왕따 현상도 97년 33.5%에서 98년 42.6%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가정과 학교를 벗어나면, 온통 유해환경 뿐입니다. 청소년의 49%가 이성친구나 애인과 함께 비디오방을 찾았으며, 이들은 주로 성인용 비디오를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제위기로 가정해체가 진행되면서, 청소년 가출 문제도 커지고 있습니다. 애정 없는 가정, 성적 위주의 학교, 유해 환경 등 청소년 가출 요인은 갈수록 늘어나지만, 청소년에 대한 관심은 매우 미미한 편입니다.


[처음으로]

제2강: 참 교사의 모습

1. 부권지배와 페미니즘을 넘어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겪는 고통과 문제는 바로 어른의 책임입니다. 왜냐하면어른이 그들을 낳고 길렀으며, 그들에게 나쁜 환경과 습관을 물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린이는 선한 존재로 태어났는데, 그들을 망친 자는 어른이다"고 말하면서, 모든 원인과 책임을 죄다 어른에게 돌리려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어른이 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보고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면, 누가 책임을 맡겠습니까? 운명 타령이나 하라는 말입니까?

지금까지 인류의 문명을 지배했던 자는 남자 어른이었습니다. 남자 어른이 가정과 사회, 국가에서 주도적인 일을 맡았고, 여자나 어린이는 보조 역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가부장적인 유교 사회의 정신적 뼈대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였는데, 여기서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가부장적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충(忠)과 효(孝)는 바로 그 실천적 덕목이었는데, 이것은 계급사회적인 봉건 시대의 남성중심적 덕목이었습니다.

남자 어른들이 만들었던 역사는 한편으로는 진보와 풍요, 문명의 역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과 지배와 약탈의 역사였습니다. 남성 어른의 힘, 즉 권력과 재물과 지식 위에 건설된 문명은 갈등과 경쟁의 구조를 더욱 고착시켰습니다. 물론 민주화와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봉건 질서와 독재자 지배는 무너졌고, 그래서 권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성과 어린이는 여전히 소외되고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여성 해방운동, 페미니즘 운동이 거세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오랜 역사 동안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오직 남성의 객체와 대상이 되어온 이상, 이들의 항의는 정당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조차 "만인사제직"(萬人司祭職)을 주창하면서도 이 만인(萬人)에서 여성을 배제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가부장적 질서의 극복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느끼게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여성을 교회의 중직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냉전 체제가 끝나고 세계화의 시대가 도래하는 이 때, 여성적 가치관은 점점 더 요구되고 있습니다. 여성적인 배려와 포용의 정신, 여성적인 감성과 몸의 중요성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연이 황폐해지는 전 지구적인 위기 속에서 모든 피조물의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성적 가치관을 더 많이 수용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여성 인권과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대하면서, 우리는 또 하나의 슬픈 기현상을 보게 됩니다. 그 동안 무시되었던 여성의 역할과 가치관이 재발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성의 열등감이 조장되는 현상도 일어났습니다. 가정을 돌보는 여성들은 열등한 존재로 비하되기도 하고, 가정을 지키고 남성을 도와주는 여성들은 모자라는 여성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여성 운동을 주창하는 많은 여성들을 보면, 결국에는 그들이 구호처럼 남성과 평등하게 협력하는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이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과도기 현상일까요?

그리고 페미니즘이 남녀 간의 평등과 연대를 주창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여성들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심지어는 남성을 지배하는 것은 어인 일입니까? 물론 남성들이 좀 더 여성화되고, 여성들이 좀 더 남성화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의 구분이 완전히 무너진다든지, 성의 역할이 포기된다면, 가정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습니까? 남성들이 가사를 지금보다 더 많이 분담해야 하지만, 여성들이 자아 실현과 사회 진출의 이유로 출산과 양육, 가정을 자꾸 포기하려 든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점점 더 많은 남성들은 도리어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포기하고 무력해져지고, 남자 아이들도 "마마 보이"(Mama-boy)가 되어가는 기현상도 나타납니다.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천국문 앞에서 베드로가 남자들을 두 줄로 세우고 있습니다. 베드로 왈, "오른쪽 문으로는 그 동안 아내가 시킨 대로 살아온 남자들이 들어가고, 왼쪽 문에는 그 동안 아내가 시킨 대로 살아오지 않은 남자들이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남자들이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유독 한 남자만은 왼쪽 문으로 들어가길래, 베드로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남자가 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아내가 이쪽 문으로 들어가라고 그러던데요." 제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만, 우리 남자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줄까요? 학교에서도 여자 아이들이 남자 아이들보다 훨씬 거칠다고들 하던데, 사실입니까?

가부장 사회도 페미니즘 사회도 인류에게 참다운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이런 사회는 어른 중심적 가치관만을 중시하고, 여전히 남녀 간의 권력 행사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는 여전히 갈등과 경쟁의 구조를 계속 양산하고 고착화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가장 연약한 존재, 즉 어린이입니다. 앞의 통계에서도 우리가 보았듯이, 가정의 해체와 붕괴, 아빠와 엄마의 싸움 등살에 치여 가장 큰 상처를 당하는 존재는 어린이입니다. 청소년입니다. 이러면서도 우리 어른은 그들을 계속 가르치고, 타이르고,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을 소유물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이 신학"

그러나 예수님에게 다가가면, 우리는 인간과 사회, 어린이를 보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보게 됩니다.

1) 첫째로 "누가 교사인가?"라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유대인만큼 어린이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민족이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유대인은 자녀 교육을 철저하고도 엄격하게 실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성서 안에 자녀 교육에 대한 많은 교훈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해서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으며, 심한 육체적 형벌을 가하면서까지 엄격한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매로 때려야 하며(잠 13:24), 심지어는 자녀들을 훈계할 때 죽지 않을 정도까지 채찍으로 때려도 괜찮다(잠 22:15)고 말할 정도로 가혹하게 교육시켰습니다. 어린이는 귀머거리, 백치(白痴)와 같이 종교적으로 미성숙한 자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교육과 훈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는 이런 태도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습니다. 그분도 유대인으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셨을 법한데, 자녀교육에 대한 그 어떤 말씀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되십니까? 예수님은 어린이 교육에 대해 무지하셨거나 무관심하셨다는 말입니까? "하늘과 땅의 주재가 되시는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이 같은 자에게는 나타내 보이시니 찬양합니다"(마 11:25, 눅 10:21)라는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약속과 계시는 지혜 있는 자와 율법 학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는,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리한 어른들과 지식인들은 머리와 문자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어린이와 어린이 같은 자는 하나님을 가슴으로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안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예수님은 어린이도 하나님의 우주의 기적을 깨달을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다고 고백한 시편 8:1-2의 말을 인용하시면서, 하나님이 "어린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다"(마 21: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지식에 관한 한, 어른인 우리가 아니라 바로 어린이가 참으로 지혜의 교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이전에 그들로부터 중요한 것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2) 둘째로 "누가 삶의 중심에 있는가?"라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이 어린이를 데려와 예수님의 안수를 요청했을 때, 제자들은 이를 꾸짖었습니다(마 19:13, 막 10:13, 눅 18:15). "종교적으로 귀머거리와 백치와 같은 어린이가 어찌 감히 어른들의 틈에 끼이느냐?"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을 꾸짖으시고 어린이를 "껴안으셨습니다"(막 9:36 이하, 10:16).

예수님은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난 어린이를 어른의 '한복판에'(막 9:36) 세우셨습니다.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어린이를 예수님은 용납하셨고, 보호하셨으며, 사회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회와 교회의 중심에도 마땅히 어린이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셋째로 "누가 하나님 나라의 주역인가?"라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용납하시고 껴안으시고 사회의 중심에 세우셨을뿐만 아니라, 어린이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음을 천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른으로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나 높은 자리를 탐하며 싸우는 우리 어른들은 하나님 앞에서 도리어 낮은 자이며, 낮고 작고 연약한 어린이가 오히려 높고 큰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천사요, 그 나라의 주역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린이에게 그 무엇을 가르치기 전에 배우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어린이 신학"에서 본 참 교사

이제 예수님의 이러한 "어린이 신학"에 근거해서, 참 교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십시다. 예수님이 그토록 높이 칭찬하신 어린이의 모습에 비추어서, 모름지기 어떤 교사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참 교사인지를 유추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하나님만을 철저히 의지하는 신앙인

어린이의 가장 분명한 심리적, 정신적 특징은 부모에 대한 원초적이고도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이를 그토록 칭찬하신 것도 어린이가 잘나고 훌륭해서가 아니라 어른보다 더 천진스럽게, 아니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린이, 청소년을 가르치는 교사는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2) 약자와 연대하는 자

남자에 비해 여자가, 어른에 비해 어린이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더 민감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어린이는 모든 면에서 어른들보다 더 수용적입니다. 그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타자를 수용함으로써 성장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도 타자를 수용합니다. 어린이는 동료의 아픔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 줄 압니다. 어린이는 아직까지 규범과 제도, 이해관계와 가치판단에 낯설기 때문에, 마음이 유연하고 개방적이기 때문에, 마음이 민감하고 따뜻하기 때문에 어른보다 훨씬 더 이웃의 고통을 쉽게 체득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는 어린이의 심정을 갖고 연약한 어린이의 처지에 동감하고 그의 아픔에 참여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3) 언행일치의 교사

우리는 어른보다 어린이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순수(순진)하다는 것을 압니다. 어린 아기의 맑은 눈망울과 꾸밈이 없는 자태만 보아도, 우리는 언뜻 어린 천사를 대하는 듯한 환상에 빠집니다. 그래서 동화와 전설에서 어린이는 자주 천사의 모습처럼 형상화되고, 또 아기 천사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것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이것은 비단 동화와 전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님도 어린 아이의 수호천사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마 18:10).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위선자를 가장 미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깨끗함, 분열되지 않은 전체적인 삶, 즉 내적인 태도와 외적인 행위의 일치를 요구하셨습니다. 어린이는 바로 이런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교사는 말과 행동, 인격과 생활이 일치하는 진실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보다는 모범적 행동을 통해 더 많은 영향을 받는 어린이에게 교사의 인격은 큰 강력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4) 온유하게 섬기는 자

겸손, 자기 낮춤의 태도는 바로 어린이의 특성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어린이는 스스로 낮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어린이는 더 이상 낮출 것이 없도록 낮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하신 예수님은 천국이 온유한 어린이에게 이미 속해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는 예수님과 어린이처럼 온유한 인격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5) 놀이하는 친구

인간은 모두 놀이하는 존재이지만, 실로 어린이처럼 왕성하게, 완전히 그리고 성스럽다고 할 정도로 진지하게 놀이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어린이는 놀이 속에서 자기의 내적 세계를 스스로 표현하고, 자기의 내적 본질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서 세계를 표현합니다. 놀이는 어린이에게 가장 귀하고 순수한 정신적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어린이처럼 재미있게 놀이하는, 어린이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가급적 재미있게 가르치고, 어린이처럼 즐거움을 동반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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