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신학동향

 

 

 

이신건

 


 

현대(Modern)라는 표현은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대를 통칭하기 위해 쓰인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현대는 근대(近代)의 뜻으로 널리 쓰인다. 근대의 탄생은 이성의 탄생으로부터 비롯한다. 오래 전부터, 예컨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성(Nous)을 말해왔지만, 실로 근대 이전의 인류는 대부분 미몽의 시대, 즉 신화와 신앙 혹은 전통과 미신의 시대에 살았다. 크게 말하면, 인류는 오랫동안 자연 혹은 비과학적인 세계관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 인류는 이와 같은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위한 가장 유용한 도구는 곧 이성(理性)이었다. 전통과 교회의 권위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이성은 과학의 눈부신 발달과 신대륙의 발견을 초래하였으며, 이는 곧 자본주의적인 삶의 양식의 급격한 발전을 낳았다.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에 적응 혹은 대응하려는 신학이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은 흔히 '문화개신교신학'이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문화와 신학, 혹은 시대와 신학의 종합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즉 자유주의 신학은 자신의 시대와의 화해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로 성서학적으로는 역사비평적인 방법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조직신학(교의학)은 교회의 권위와 전통보다는 이성과 경험에 호소하였다. 

 

하지만 이성의 지나친 확장은 곧 자신의 부정(否定), 즉 야만의 확대로 나타났다. 근대의 도구적 이성은 한편으로는 인간을 미몽과 미신으로부터 해방하고 매일의 삶을 윤택하고 편리하게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적인 전쟁과 인류와 문명의 파괴, 더 나아가 자연의 착취를 낳았다. 이것은 결국 자유주의 신학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을 향해 조종(弔鐘)을 힘차게 울리면서 등장한 새로운 신학, 이른바 '신정통주의 신학'은 탈근대(현대)주의의 시조(始祖)로 여겨질 만하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이성보다는 계시를, 경험보다는 신앙을 더 강조하였고, 자본주의의 폐허를 딛고서 종교사회주의를 제창하였다.

 

특히 현대신학계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던 칼 바르트(K. Barth)의 신학은 '그리스도론 중심적 신학'이었는데, 이는 교회일치 운동의 신학적 토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서 교회 봉사(설교)와 교회 갱신(선교)에 큰 자극을 주었다.

 

하지만 바르트 신학도 한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한계성은 새로운 성서론(계시론)이나 성서비평의 수용,'그리스도론적 일원론'이라기보다는 여성과 자연에 대한 평가절하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현대신학은 대체로 삼위일체론을 근거로 하여 삼위 하나님 안에서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평적인 사귐을 강조한다. 이를 주도한 신학자는 필자의 스승 몰트만(J. Moltmann)이다. 종말론적 희망(희망의 신학)에 충실하면서 삼위일체론 위에 서 있는 그의 신학은 자연과 여성, 생명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민중, 어린이)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필자는 이를 기초로 하여, 아니 이를 조금 더 발전시켜 ‘어린이 신학’을 제창한 적이 있다. "하나님은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몰트만)일 뿐만 아니라 '어린이'이기도 하다!"는 필자의 주장은 아마도 매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혹은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공명되어 가리라고 본다<2007.5/기독교신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