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위한 교회의 사명


2007.5.20 / 아가포세 교회(김종오 목사 시무) 특강



이신건

 

 

 

올해로 한국교회는 평양 부흥회 100주년을 맞이한다. 그래서 100년 전에 평양에서 시작되어 마치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간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오늘에도 다시 일어나기를 기원하면서, 여러 단체들이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한다. 때마침 한국성결도 이 땅에 사중복음의 씨앗을 뿌린 지 100주년을 맞이한다. 그래서 우리도 지금까지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다음 주일 오후에는 전국의 성결가족들이 함께 모여 큰 기념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가난과 억압, 무지와 미신이 가득하던 절망의 땅에 희망의 복음이 들어온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였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그 무슨 말로도 다 형용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다 갚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 위에 기적적인 성장 부흥을 이룩한 신앙 선배들의 희생적인 헌신에 대해서도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유에 관해 우리는 여러 가지 설명을 내어놓을 수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로서 우리가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한국의 초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훌륭히 감당하였다는 사실이다. 불교의 쇠퇴와 유교의 피폐, 무속의 혼란과 국운(國運)의 위기 속에 들어온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 민족에게 그야말로 새로운 희망의 등대와 같았다. 예컨대, 남녀와 반상(班常), 빈부와 신분의 차별이 심하던 우리 민족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참으로 해방의 힘을 발휘하였다. 초대 가톨릭교회의 순교자들 가운데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한 백성들도 더러 끼어 있었다고 한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그들이 기독교를 위해 아까운 목숨까지 기꺼이 희생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반에게 멸시받던 그들이 교회 안에서는 다 같이 평등한 형제와 자매로 존경을 받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천지가 진동할 만한 기쁜 소식이 아니었겠으며, 그래서 목숨을 내어놓아도 좋을 만큼 복된 소식이 아니었겠는가! 그 밖에도 한국교회가 세상을 위해 빛과 소금이 역할을 한 사례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의 원인을 성령의 활동에게 돌리지만, 성령이 어디 ‘마른하늘의 벼락’처럼 갑자기 떨어진다던가! 실로 한국의 초대교회는 복음의 감화를 받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고 목숨까지 내어놓을 정도로 치열하게 몸부림을 쳤다. 그런데 지금의 사정은 어떠한가? 양적, 수적으로 초대교회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놀랍게 성장한 지금의 한국교회는 과거의 초라했던 시절의 교회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실천하고 있는가? 세상의 높은 존경을 받던 교회가 지금은 도리어 세상의 조롱을 받는 처지에 떨어지지 않았는가! 물론 참 교회의 척도는 세상의 존경 여부와 그 정도에 달려 있지 않다. 참 교회는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박해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멸시와 박해를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복음 때문이 아닌가! 만약 교회가 참으로 오직 복음 때문에 멸시와 박해를 받는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조롱과 멸시는 대개 복음 때문이라기보다는 복음으로부터의 이탈 혹은 복음의 변질 때문이다.

그래도 실로 한국교회는 다른 종교에 비해, 그리고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에 비해 세상을 위해 훨씬 더 많이 섬기고 있다. 그리고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 때문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한국교회의 망신도 대개는 일부 대형교회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스스로 자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대형 교회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로 여겨지기 때문에 대형교회가 잘못하면 한국교회 전체가 도매금으로 욕을 먹기 쉽다. 실로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대형교회는 시골 교회와 주위의 작은 교회의 희생 위에, 혹은 그런 희생을 강요한 결과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교회의 잘못 때문에 큰 잘못이 없는 중소형 교회마저 덩달아 욕을 먹고 있고, 그래서 선교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를 크게 일으키지 못한 작은 교회는 한국교회를 크게 망하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국교회를 크게 일으킨 일등 공신(功臣)이라고 자부하는 대형교회가 이제는 서서히 한국교회를 크게 망치는 일등 역적(逆賊)이 되고 있다.

그러면 어찌 할 것인가? 세상의 조롱과 멸시로부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아니 복음으로부터의 이탈과 복음의 변질로부터 복음의 회복과 실천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복음은 교회가 무엇 때문에 존재한다고,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성경은 교회가 교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아니면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불이 보듯이 훤하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하셨다면, 빛과 소금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빛은 세상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고, 소금은 음식에 맛을 내기 위해 존재한다. 이처럼 교회도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양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내듯이, 소금이 자신을 녹여 맛을 내듯이, 교회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녹여서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 

본회퍼(D. Bonhoeffer)는 말했다. “교회는 남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남들을 위해 존재할 바로 그 때에만 교회다.” 바르트(K. Barth)도 말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가 세상에 있다’는 말은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있다’는 말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그 자신의 목적 때문이 아니다. 교회는 바깥을 위해, 바깥을 향해 존재한다. 교회는 설립과 더불어 하나님에 의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음으로써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의 임무를 실행하도록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왜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1) 교회가 세상에 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과도 화해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과 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3)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를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분명히 보여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마 6:33). 교회가 먼저 구할 것은 성장, 안정, 땅과 건물, 인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그러므로 교회 성장의 척도도 신자의 숫자, 재정의 크기, 사회적 영향력 등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야 한다. 교회가 아무리 크게 성장해도, 하나님의 나라는 초라하게 성장할 수도 있다. 그와 달리 작은 교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놀랍게 성장할 수 있다.

 만약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천하고 있다면, 이로써 교회는 저절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비추게 된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억지로, 일부로 세상의 빛이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태양을 바라보는 거울이 저절로 빛을 반사하여 저절로 주위를 밝히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교회도 저절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비추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등지는 교회는 곧 세상을 등지는 교회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가 어찌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반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반사하지 않는 교회가 세상에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소금이 억지로 소금 맛을 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빵 속에 들어간 소금을 저절로 짠 맛을 내기 마련이다. 오직 짠맛(본질)을 잃은 소금만이, 그리고 빵(세상) 속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소금만이 아무 소용이 없을 따름이다. 이처럼 자신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는 저절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하시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라고 말하셨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먼저 교회는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말 많은 교회가 아니라 삶 많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말만이 아니라 말-삶(말과 삶)으로, 마음만이 아니라 몸-맘(몸과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위한 교회가 세상을 위해 증언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회 안에 임하고 - 나라가 임하옵소서! - 어떻게 세상 속으로 누룩처럼 번져갈 수 있는가? 필자의 스승인 몰트만(J. Moltmann)의 분류에 따라 다섯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설명하겠다.

  

1) ‘하나님의 나라’란 일차적으로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란 곧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만이 만물을 다스리신다. 오직 야훼 하나님만이 만유의 주, 만왕의 왕이 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고 하나님의 우편에 들리심을 받은 다음부터는 바로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권능을 위임받은 만물의 왕, 모든 주들의 주님이 되셨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왕과 주, 그 어떤 통치자도 절대적이지 않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 외의 다른 통치자가 존재할 수 없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주의’와 유사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교회는 독재지배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주주의’(神主主義)다.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될 수 없다. 어리석은 대중의 지배보다는 현명한 지도자의 지배가 더 낫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결론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말씀과 성령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독점될 수 없다. 교회는 모두에게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형제애와 자매애가 넘치는 평등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안팎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정치 모델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2)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경제적인 의미도 갖는다. 만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은 다만 만물의 청지기와 관리자일 따름이다. 그리고 만물은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늘과 땅과 바다, 그리고 그 소산들을 독점해서는 안 되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만이 만물의 통치자가 되시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을 호령하고 지배해서는 안 되듯이, 물질도 인간을 호령하고 지배해서는 안 된다. 거꾸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 외의 다른 왕과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되듯이, 인간이 물질을 왕과 주인처럼 섬겨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려고 드는 자본(資本)은 ‘하나님의 나라’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전제주의와 황제숭배처럼 물질주의와 물질숭배(맘몬주의)는 하나님 나라를 거역하는 세력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이 주인이 되는 체제(자본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모든 피조물이 형제와 자매로서 물질을 서로 섬기고 나누는 체제(기독교 사회주의, 사랑의 공산주의)이다. 그러므로 자유의 이름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들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본주의를 확산하려고 드는 미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기독교의 정신 안에서 약자를 돌보는 복지사회를 실천하는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더 잘 어울릴 것이다.

돈은 악(惡)이 아니다. 하지만 돈을 하나님보다, 인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악이요, 수많은 악의 뿌리다. 그러므로 물질의 나라, 돈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증언하는 교회는 교회 안팎에서 물질과 돈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 저항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3)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사회적인 의미도 갖는다. 하나님 아래서 모든 피조물은 형제와 자매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그 어떤 특권과 명예도 거부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인종 차별과 계급 차별, 성별 차별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인간 차별과 인간 소외를 배격한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고루 해와 비를 내리신다. 하나님은 만인의 창조주이시고, 만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래서 모든 사람은 다 같은 형제와 자매다. 하나님은 자신과 원수가 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시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고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의 공동체가 된 교회는 교회 안팎에서 활개를 치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편견과 인간 차별, 인간 소외에 저항해야 하고, 모든 인간들이 서로 손잡고 노래하며 춤추는 하나님 나라의 축제를 실현하고 널리 전파해야 한다.


4)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비록 인간은 마지막 피조물로서 창조의 면류관, 최고의 피조물이긴 하지만, 창조의 목표는 인간이 아니라 안식일이다. 즉 창조의 목표는 하나님이 만물 안에서 만물이 되시는 사건, 하나님이 만물 안에서 안식하시고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교통하는 영광의 나라, 영광의 잔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인간의 권리만이 아니라 자연의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도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도록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환경일 뿐만 아니라, 인간도 자연의 환경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은 인간의 동료 피조물이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지만, 자연은 인간이 없이도 수십억 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 인간이 멸종되어도 오래 오래 존재할 것이다.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지구의 마지막 손님이다. 그런 인간이 자연을 단지 자원으로만 여기고 자연을 자기 마음대로 마구 남용하고 착취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자연을 관리하고 활용하고 보존할 수는 있을지언정, 인간의 목적을 위해 자연을 마구 파괴하고 생명을 멸종시켜서는 안 된다. 자연의 파괴와 생명의 멸종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청지기 인간의 월권과 반항이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범죄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범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이 서로 상처를 주지 않고 함께 뒹굴고 놀이하는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바라보는 교회는 지금까지 자연 파괴의 공범일 뿐만 아니라 주범이 되어 왔음을 진심으로 회개해야 하고,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자연 파괴에 저항해야 하며, 모든 피조물이 안식과 영광에 참여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세상에 널리 전파해야 한다.


5)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평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자연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인격적인 의미도 갖는다. 인간이 하나님보다는 인간과 물질과 특권과 쾌락을 더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아니 이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된 것은 이유가 무엇인가? 앞에서 거론한 인간의 네 가지 어리석은 죄악, 즉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독점과 사회적 차별과 자연의 파괴는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가? 인간의 불행과 비극의 가장 깊은 근원은 바로 인간의 타락에 있다. 무엇이 타락인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어리석음, 하나님이 없어도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는 착각,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불순종, 스스로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려는 교만이 인간의 타락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버렸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하나님과 자신과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세상이 주는 온갖 행복과 성공 속에서도 인간은 행복과 의미를 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근원과 깊이 분리되었고,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리와 소외 때문에 세상에는 온갖 범죄와 죄악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이를 극복하기를 원하시며, 실제로 극복하신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과 통로로 인간과 화해되기를 원하신다.

가장 결정적인 화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분리와 소외가 극복되었고, 죄책과 절망과 죽음이 극복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해된 교회는 세상을 향해 화해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불의한 세상과의 불화를 의미한다. 교회는 세상의 거짓 평화, 거짓 화해, 거짓 행복을 폭로하고, 진정하고 영원한 화해를 증언해야 한다. 아니 교회는 화해의 누룩, 화해의 능력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위한 교회의 진정한 봉사는 바로 이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봉사는 삶의 모든 영역, 즉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자연적 영역에서도 영향을 발휘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세상을 향해 말과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능력 있게 실현하고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기 되기 위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하고, 세상 앞에서, 세상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모형, 하나님 나라의 거울,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닐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세상이 교회에 끌려 다녀야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위한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고, 세상을 위한 교회의 최고의 봉사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한국교회가 심각하게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영광스러운 교회여, 다시금 일어나라! 다시금 만방에 빛을 발하라! 영광의 나라가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지 않은가! 마라나타, 주여, 오서 오시옵소서! 내가 속히 오리라! 그러므로 잠들지 말고, 깨어 기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