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나눔의 미학 - 먹는 것


이신건

 



먹어야 하는 인간

 

오늘도 나는 예전처럼 일어나서 어김없이 아침을 먹었다. 어떤 이는 아침을 안 먹거나 못 먹는다고 말하지만,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특별한 사정으로 여러 끼를 굶었다고 말하곤 한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특히 목회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처럼 40일을 굶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굶는 것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이유로 괴롭게(?!) 감수하는 잠시 동안의 일이지, 마냥 즐거워서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느 정도의 금식은 유익과 기쁨도 줄 것이다. 하지만 죽기로 작정한 경우가 아니라면, 평생 안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 인간은 먹어야만 할까? 너무나 자명한 일을 놓고 질문을 던지는 내가 조금 머쓱하기도 하다. 먹는 행위는 일차적으로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위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인간에게, 특히 오랫동안 굶주림과 싸워온 불쌍한 인류에게 (잘!) 먹는 것은 절대적인 과제였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의 일상적인 어법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오래 굶주려왔고, 그래서 먹고살기 위해 얼마나 투쟁해 왔는지를 눈물겹게 실감하게 된다.

어릴 적에 우리의 놀이는 대개 따먹기 놀이였다. 구슬 따먹기, 딱지 따먹기, 동전 따먹기, 땅 따먹기, 과일 따먹기 등 이루 열거하기 어렵다. 이런 행위가 나중에는 챔피언 따먹기, 메달 따먹기, 우승 컵 따먹기, 상장과 상금 따먹기 등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런 따먹기는 나름의 규칙이 있고, 때로는 짜릿한 재미도 있다. 그러나 규칙도 없고 체면도 없는 무자비한 따먹기도 얼마나 성행하는가?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의 재산, 남의 자원과 영토를 따먹으려고 혈안이 되고, 심지어 무고한 피까지 흘리는가? 눈에 보이는 전쟁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간의 모든 행위도 결국 남의 것을 따먹고 뺏어먹으려는 의도와 직접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늙어가는 것도 “나이를 먹는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만큼 식당이 즐비한 나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먹고살 마땅한 다른 재주와 수단이 없어서도 그렇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먹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수많은 식당이 문을 닿아도, 여전히 그 옆에 또 다른 식당이 계속 생겨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모든 것을 온통 입에 넣어야 만족하는 동물이란 말인가? 

자연과 생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나는 일평생 먹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듯이 온 종일 먹는 일에 열중하는 동물을 연민과 비하의 눈초리로 대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도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인간을 상징적, 정신적, 종교적 동물이라고 한껏 부추겨 보아도, 고상해 보이는 일조차 먹고사는 일과 전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인간은 먹는 행위를 고상한 의례와 분위기로 장식하고, 때로는 먹는 행위에 여러 가지 상징적,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따름이다.  

인간의 모임에서 맛있는 음식이 없다면, 분위기가 얼마나 어색하고 밋밋하겠는가! 이런 만남은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대화와 협상도 음식을 먹어야 매끄럽게 진행된다. 심지어 사회 곳곳에 아직도 뇌물 문화가 성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비록 부정하고 야비한 일이지만, 뇌물을 먹어야 특혜를 주는 관행이 아직도 근절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으며, 그래서 사회의 지도자들조차 - 선물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 지금도 뇌물을 열심히 주고받지 않겠는가! 가장 깨끗해야 할 교육계와 심지어 거룩하다고 자랑하는 종교계에서도 뇌물을 돌리는 일이 다반사이라고 하니, 불법이니 타락이니 하는 말을 아무리 크게 외쳐도, 그리고 결국 척결되어야 할 부패일지라도, 인간은 먹고 먹이는 먹이사슬을 좀처럼, 아니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이 보인다.

이 모든 일은 오로지 인간이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생래적 운명, 아니 하나님의 창조질서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먹지 않고 어찌 인간이 이 땅에 번성할 수 있겠으며, 먹은 힘을 내지 않고 어찌 이 땅을 정복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먹는 것은 생존의 행위임과 동시에 살육의 행위다. 먹기 때문에 즐겁지만, 먹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다. 너무 많이 먹어도 탈이지만, 너무 적게 먹어도 탈이다. 잘 먹는 것은 행복이지만, 잘못 먹는 것은 불행이다. 이처럼 먹는 행위는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인간이 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죄악을 덜 수 있을까? 아니 인간이 좀 더 적게 먹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전쟁과 환경파괴를 막을 수 있을까? 왜 인간은 게걸스럽게 먹어야만 하도록 창조되었을까? 아니 왜 인간은 이렇게 진화해 왔을까? 잘 먹는 기쁨보다 못 먹는 고통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필자는 때로는 바위가 부러운 적이 있었고, 때로는 적게 먹어도 잘 살아가는 동물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참으로 부질없는 망상이다. 창조와 진화의 원리를 되돌릴 수 없거니와, 우리의 습관을 한꺼번에 바꿀 수도 없다. 물론 이제 우리는 무심코 반복해 온 우리의 식습관을 곰곰이 되씹어 보아야 한다. 육식의 폐해를 깊이 성찰함으로써 가급적 육식을 줄이려고 애써야 한다. 가급적 적게 먹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다른 생명을 가급적 덜 희생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다른 생명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해야 하며, 그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어차피 인간이 먹어야 생존하고 번성할 수 있다면, 잘 먹기 위해서만 노력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먹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우리의 번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찬찬히 곱씹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먹이활동을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먹고살기를 원하실까?


먹는 것은 소통이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소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통하지 않는 사랑을 어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짝사랑도 소통을 전제하고, 소통을 목적으로 삼는다. 미움은 소통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미움도 소통의 또 다른 방식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사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을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몰트만은 삼위일체를 ‘사회적 삼위일체’라고 정의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소통하고, 서로 교환하고, 서로 내주(內住)하고, 서로 연합한다. 삼위 하나님은 신비한 일체다. 

물론 하나님이 먹고 마신다는 구절은 성서에 없다. 로마와 그리스의 여러 신들은 잘 먹고, 실컷 마신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로마와 그리스의 신들보다 훨씬 삭막하고 가련한 존재란 말인가? 먹고 마시지 않은 하나님이 어찌 먹고 마시는 인간의 창조자일 수 있겠으며, 인간이 그런 ‘하나님의 형상’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식은 무엇일까? 우리가 알 도리는 없다. 그것을 ‘영의 양식’ 혹은 ‘신령한 음식’이라고 말해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먹고 마신다고 고백할 수는 있다.

앞에서 사랑은 소통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사랑보다 영양이 더 풍부한 음식은 없다. 사랑이 없는 음식은 단순한 먹이다. 사랑이 없는 식사는 전투다. 때로는 사랑이 없는 밥보다 밥이 없는 사랑이 낫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은 소통의 천국이다. 어떤 사람이 꿈에서 천국과 지옥을 갔다 왔다고 한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단 하나다. 곧 소통이다. 천국과 지옥에도 먹을 것이 다 같이 넘치지만, 한 가지 조건은 긴 숟가락으로 식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은 긴 숟가락으로 남에게 떠먹이기 때문에 배부름과 기쁨이 넘치지만, 지옥은 긴 숟가락으로 제 입에만 넣으려고 하기 때문에 굶주림과 슬픔이 넘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단 하나다. 사랑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의 넘침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런 세상을, 더욱이 죄가 넘치는 이 세상도 하나님은 매우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갖 소통의 수단을 마련해 주셨고, 드디어는 스스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소통의 수단인 말씀이 친히 소통하기 위해 육화한 것이다. 예수는 소통의 달인이다. 예수의 화두와 행동을 보라. 그에게 막힘이란 전혀 없었다. 죄인, 창녀, 여인, 어린이, 이방인이라는 낙인도 소통의 장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과 먹고 마시기를 즐겼다.

예수는 천국을 즐겨 잔치에 비유했다. 예수는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집에 가장 맛있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었다. 음식이 없는 잔치를 누가 상상하겠는가? 먹을 곳이 없는 곳을 누가 천국이라 하겠는가? 예수가 가장 격렬하게 비난한 바리새인들은 거룩하다고 자칭하고 죄인과 구분되었다고 자만하는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식사했다. 그들은 남을 배제했고, 자기 왕국을 세웠다. 그래서 예수는 거짓 천국을 허물었고, 진정한 천국을 세웠다. 예수는 죽기 전에도 음식으로 제자들과 소통했고, 더 맛있는 음식이 넘치는 미래의 천국을 약속했다.


먹는 것은 나눔이다.

 

먹는 것은 희생을 전제한다. 일단 음식 자체가 희생이다. 식사는 자기를 헌신하는 타인의 생명을 먹는 거룩한 의식이다. 음식을 장만하고 대접하는 행위도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탐욕이다. 희생이 없는 나눔은 자기자랑이고, 대가를 바라는 계산이며, 이미 대가를 받았다. 그것은 나눔을 가장한 수탈이다. 소통에는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열고 자기를 바치는 행위가 반드시 요구되듯이, 먹는 행위에도 나눔이 반드시 요구된다. 물론 어떤 이는 먹고, 어떤 이는 먹힐 것이다. 물론 어떤 이는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어떤 이는 공짜로 먹을 것이다. 그러나 일방통행이란 결코 없고, 영원한 공짜도 전혀 없다. 내가 상대방을 먹지만, 상대방도 나를 먹는다. 내가 음식을 지배하지만, 음식도 나를 지배한다.

하나님이 먹고 먹히는 세상을 만드신 것도 이처럼 나눔의 원리를 배우고 실천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사자에게 먹히는 사슴 새끼가 무척 불쌍하다. 하지만 먹지 못해 죽어가는 사자 새끼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결코 사슴만 먹히는 것이 아니다. 사자 새끼도 먹힌다. 그리고 죽은 사자의 몸도 연약한 동물의 먹이로 제공된다. 세상은 이처럼 거대한 먹이사슬이고, 우주는 거대한 나눔의 장터다. 그러므로 싫어도 좋아도 우리는 남을 위해 나의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래야 남도 나를 위해 내어놓을 것이다. 무조건 주는 것만이 선이 아니며, 무조건 받는 것만도 선이 아니다. 주고받는 세상, 나눔이 넘치는 세상의 가장 극명한 증거로서 하나님은 먹는 일을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먹는 것은 동물적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일이다. 먹는 행위는 나눔이 넘치는 천국을 모방하는 수단이고,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을 닮아가는 효과적인 방편이다. 

죽기 전의 예수는 파격적으로 자기 몸을 음식으로 내어놓는다. 지금까지 예수와 나눈 음식이 생존과 연명의 양식이었다면, 이제 예수가 제공하는 음식은 영생의 양식이다. 인간의 영원한 행복(구원)을 위해 예수는 높은 곳에서 비천한 곳으로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째로 희생의 음식으로 제공한다. 사랑의 마지막은 자기희생이 아닌가? 그래서 몰트만은 하나님을 사랑에 희생된 존재로 본다.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사랑은 희생이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의 이런 행위에서 사랑의 극치와 완성을 본다. 사랑만이 구원이고, 사랑만이 승리다.

예수는 자기를 줌으로써 무엇을 얻었을까? 예수는 받기를 원하지 않고, 한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모르게 이런 거룩한 희생을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야만 사랑은 완전하고, 희생은 거룩하다. 하지만 성서는 이런 예수를 하나님이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세상의 구주로 높이셨다고 한다. 예수를 일으킨 능력은 부활의 능력이고, 부활의 동기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받은 것은 과분한 보상이 아니라 더 풍성한 사랑이고, 그래서 오늘도 예수는 자기가 받은 사랑을 예전보다 더 풍성히 나눠준다. 말씀을 나눠먹고 성찬을 나눠먹는 성도들에게,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눠먹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자신을 한없이 나눠준다.

(기독교사상 2010년 7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