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하나님?!


 

이신건

 



이 제목은 필자가 붙인 제목이 아니라 편집부장이 붙여준 제목이다. 아무런 제목도 정하지 않는 채 막연하게 글을 써야 하는 일은 한 마디로 고역이다. 주제파악도 되지 않은 채 헛발질을 하기 때문이고, 결과적으로 나를 비판하려고 웅크린 수많은 독자들의 화살을 알몸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제목을 받아들고 보니, 느닷없이 거부감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필자가 바르트와 몰트만의 사상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탓일 수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는 내가 믿고 살아가는 예수가 공개적으로 선포한 첫 마디가  세상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회개하라!”는 말도 바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가능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의 분명한 의도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으니, 세상 사람들은 회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예수는 세상으로부터 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살았다. 그래서 예수는 세상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을 하고, 그런 행동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수쟁이로 자처하는 나는 세상으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글과 말과 행동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비록 나도 엄연히 세상에 속해 있지만, 그런 나에게 ‘세상의 하나님’이 적이 미심쩍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세상의 고통과 부조리에 있다. 세상이, 그리고 세상에 속한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라는 말과 함께 대개 우리는 즉각 모든 진선미와 행복과 구원의 총체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온갖 고통과 불의와 어둠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단숨에 입에 올릴 수 있겠으며, 고난과 부조리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수많은 인간들이 어찌 그렇게 쉽게, 그렇게 간단히 하나님을 믿고 부를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교회, 아니 목회자의 부패상만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케 하는 것이 아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세상과 인간은 결코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지 않았다. 그 모든 원인을 인간(조상 아담)에게 다 뒤집어씌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괜한 속죄양을 잡는다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감당할 만큼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지 않았으며, 더욱이 하나님은 ‘세상의 하나님’이 될 만큼 자명하지 않다.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도 과연 하나님이랄 수가 있겠는가? 아니 이런 고통스러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애당초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도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세상의 고통과 부조리에 쉽게 눈감는 어설픈 유신론자보다는 이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진지한 무신론자를 더 존경한다. 루터(M. Luther)도 언젠가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의 할렐루야 외침보다 무신론자들의 저주를 더 기쁘게 들으실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경건한 자의 외침은 악마가 인간의 의지를 꺾고 억지로 내뱉게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부정직한 유신론자보다 정직한 무신론자를 더 기뻐하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하나님’이 적이 미심쩍을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세상이, 그리고 세상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바로 세상이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있다. 바르트(K. Barth)의 말대로 세상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다. 진정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아니 진정한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하는 세상은 대체 하나님, 사이비 하나님, 곧 우상을 만들기 마련이다. 불가사의하고 불가해한 하나님을 싫어하는 세상은 곧장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든다. 세상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으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우상으로 치장한다. 세상이 만든 우상은 대개 세상의 탐욕을 통해 표현된다. 여기서 하나님은 강탈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소유욕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세상은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경배하며, 하나님에게 바쳐야 할 것을 자신에게 바친다.

종교 혹은 종교화된 기독교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만들어지는 숱한 우상들을 보라!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으며, 자신들이 만든 우상들에게 어리석은 경배를 올리고 있는가? 이런 우상들은 대개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하늘로 투사한 우상들이다. 그러므로 우상파괴, 아니 하나님의 심판은 마땅히 가장 거룩한 마당, 곧 교회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청소 작업은 가장 깨끗하다고 자랑하는 곳, 곧 교회와 종교로부터 먼저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을 쉽사리 담을 수 없는 까닭은 것은 단지 세상의 고통과 탐욕 때문만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고 소유될 수도 없거니와, 인간에 의해 설명될 수 없고, 제한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형상 금지를 엄히 명하며, 십자가는 우상 파괴를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신학생들에게 다음과 경고한다. 천국에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들보다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로 더 가득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대개 자신들이 만든 하나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열렬히 믿는 사람일수록 더 위험하다. 유신론자들은 무신론자들보다 더 위험하며,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유신론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대개 자신들이 만든 하나님이나 특정한 인물과 시대에 의해 만들어진 고착된 하나님 이미지를 완고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령 천국에서 참 하나님을 만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단호히 거부할 가능성이 매우 클 것이다.

그러나 정직한 무신론자들과 열린 자유주의자들은 언제든지 정직하게, 열린 마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거둬들이고, 참 하나님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늘 열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흔히 특정한 교리와 편협한 자기 확신에 갇혀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쉽게 제한하며, 자유주의자들은 흔히 이성과 과학을 맹신하는 나머지 하나님의 능력을 쉽게 제한한다. 이래저래 ‘세상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다.

‘세상의 하나님’이 미심쩍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다만 세상의 고통과 부조리, 세상의 우상 제작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일 수 없는 까닭은 다만 세상의 유한성 때문만도 아니다. ‘세상의 하나님’을 내가 완강하게 거부하는 까닭은 바로 성서가 말하는 거룩하신 하나님 때문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세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하나님’은 존재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세상’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먼저 말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먼저 말해야 한다. 하나님을 말함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을 말한 다음에 비로소 우리는 세상도 말해야 한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을 무한히 초월하시는 분이다. 도기장이와 도기 사이에는 어떠한 연속성도 없다. 도기장이는 사람이고, 도기는 흙이다. 성서는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지만, 살아 있는 인간과 흙 사이에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얼마나 큰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는가? 유인원과 인간의 유사성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창조론자들도 이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놀라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비록 도기장이가 흙 속에 자신의 혼을 모두 불어넣었더라도, 둘 사이에는 어떠한 유사성도 없다. 도기장이는 도기를 마음대로 만들고 부술 수 있지만, 도기는 도기장이를 마음대로 부릴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전적으로 자유하시고,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하시는 거룩한 존재다.

물론 성서는 인간을 흙, 도기 이상으로 본다. 비록 흙으로부터 만들어졌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기도, 탄원 등을 통해, 심지어는 항의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 안으로 깊숙이 침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란 얼마나 초라하고 미미한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티끌과 재와 같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은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 앞에는 모든 열방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모든 열방을 마치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신다.(사 40:17)

그러므로 작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조금 마셨다고 망망한 대해를 모두 맛보았다는 듯이 허풍을 떨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망망한 대해에 오줌 몇 방울을 보탰다고 바다의 부피를 조금이라도 늘렸다는 듯이 자랑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초월의 공간 안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세상 안에, 내 안에, 내 생각과 능력 안에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함, 오묘함, 광대함, 위대함을 무엇으로도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의 위대함을 이루 표현할 수 없다는 말로도 하나님의 위대함을 이루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와 위대함 앞에서 침묵하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제멋대로 상상하고, 제멋대로 부르고, 더욱이 제멋대로 주물러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구약성서는 압도적으로 초월적이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말하지만, 신약성서는 압도적으로 친근하고 자비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말한다. 비록 하나님은 세상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자유는 기계적, 법적, 강제적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과 놀라운 특권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타자에게 완전히 종속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우시다. 하나님의 자유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폭력적인 자유가 아니라, 타자를 향해 자신을 열어주고 자신을 기꺼이 나눠주며 자신을 제한하고 그래서 자신을 변형할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하다. 성서는 이를 ‘사랑’ 혹은 ‘은혜’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한 부분이 되셨다. 하나님은 단지 하늘에서 아버지로서 세상을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아들로서 세상의 일부분이 되어 세상과 동행하시며, 더욱이 성령으로서 세상 안으로 친히 들어오신다. 그러므로 무한히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무한히 내재하시는 하나님으로도 경험되며, 하나님의 무한한 자유는 동시에 하나님의 무한한 결속으로도 나타난다.

다석(多石) 유영모가 일찍이 명명하였듯이, “없이 계신” 하나님, 곧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고 놀랍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나보나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더 가까이 내게 계시고, 나보다 더 지극히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마다 나는 종종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 어머니, 친구, 나의 기쁨, 나의 힘, 나의 희망, 나의 사랑 등 수많은 수식어를 갖다 붙이기를 즐겨한다. 너무나 멀리 계시면서도 너무나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하기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름지기 하늘에 계신 거룩한 아버지 하나님을 기도와 경배와 찬양을 통해 우러러 볼 뿐만 아니라, 이 땅에 내려오신 아들 예수를 친구로 삼아 함께 먹고 마시고 세상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온 맘과 온 몸으로 간절히 느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후의 세계나 하늘의 세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맛볼 먼 타향인 양, 오늘의 삶이 마치 귀천(歸天)의 날까지 가볍게 살아가는 나그네의 삶인 양 살아갈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맛보고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가급적 기쁘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아름다운 꽃의 향기를 맡을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의 짜릿한 맛과 향기를 맛본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에만 있지 않고 가까이 왔으며, 더욱이 우리 안에, 우리 사이에도 있기 때문이다.(눅 17:20)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기를 기뻐하신다.(눅 12:32)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매일의 음식은 하늘의 영원한 음식을 미리 지시하는 표지일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는 하늘의 위대한 음식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몰트만(J. Moltman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율동의 리듬, 눈빛, 포옹, 오색찬란한 창조 세계의 온갖 느낌, 향기, 소리를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나는 모든 것을 포옹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사랑스러운 창조 세계 안에서 내 모든 감각으로써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보좌, 곧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만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사도직(마 28:18)과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며 거행하는 성만찬(고전 11:23)과 하나님의 나라를 신앙하는 형제적인 사귐(마 18:20) 속에서도 현존하신다. 장차 도래할 세계의 심판자 인자(人子)는 세상 안에서 가장 작은 형제들, 곧 주린 자들, 목마른 자들, 나그네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옥에 갇힌 자들 사이에서 숨은 모습으로 현존하신다.(마 25: 31-26) 그러므로 비참한 자들은 단지 이웃사랑과 도덕의무의 대상들만이 아니라, 장차 도래할 인자가 은밀한 방식으로 실제로 현존하시는 방식이다. 더욱이 도마복음(77)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도 말한다.


나는 만물을 비추는 빛이다.

나는 만물이다. 만물은 나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만물은 내게로 되돌아온다.

나무 한 토막을 베어 보라. 내가 거기에 있다.

돌멩이 하나를 집어 보라. 그러면 나를 느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정신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 땅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환경과 생명을 파괴하는 굉음 속에서 연약한 피조물의 탄식 소리를 점점 더 분명하게 듣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이웃만이 아니라 땅과 생명도 거룩하게 여기고,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땅과 생명은 단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만이 아니며, 인간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욕망의 재료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증언하고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는 거룩한 성찬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함께 참여할 동료 피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 안에 실제로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기독교사상 2011년 3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