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의 사유화와 공공성 심포지엄

 

 

주최 : 한국기독교학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선교훈련원, 한국 크리스챤 기자협회
일시 : 2012년 7월 6일 (금) 13:00~15:00
장소 :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2층강당)

 

한국기독교의 사유화와 공공성

 이 철(숭실대 기독교학과 종교사회학)

서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신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곧 경제가 가장 중요하며, 경제에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둘 간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전자는 물질의 사유화를 후자는 공유화를 주창한다. 그러나 이 차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경제와 물질이 갖는 힘과 마력에 대한 양자 간의 공통된 이해이다. 사유화는 물질의 이러한 마력에 매몰된 결과이다. 신자유주의는 이 힘에 매료되어 이 힘을 더 향유하고자 사유화를 고집하고, 마르크스주의는 이 사유화의 파괴적 결과를 알기에 공유화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이미 역사적으로 증언되듯이 신자유주의가 마르크스주의를 눌렀다. 이 신자유주의는 세계화 기류에 편승하여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중요하게는 우리 내면의 의식 안에서도 동일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사유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최근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세습 관련 문제들 그리고 은퇴 후에도 교회 치리권을 놓지 않으려는 사태들은 원초적으로 사유화된 한국교회의 외상적 증상이다. 그 증상의 근저에는 물질에 대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욕망 뒤에는 자신의 뜻대로 물질을 소유하고 통제하고 싶어 하는 나르시스적인 자아가 숨어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사유화 현상은 자본주의의 사유재산과마르크스의 물신주의와 이어져있으며 더 나아가 프로이트의 자기애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물질과 사유화의 욕망 앞에서 교역자나 교우들과의 인간적 관계, 심지어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 욕망의 실현을 위해서 다른 모든 대상들은 단지 욕망 성취를 위한 수단이 된다. 신앙과 목회의 목표인 하나님도 이 수단의 종목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세습과정이 별 문제없이 잘 이루어지게 해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한다. 목적-수단 전치현상의 실현이다.

이 욕망에 의미가 있는가? 때로 욕망에는 의미가 있다. 어떤 이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물질 획득을 통해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감을 확인하고 인정받기 위해 물질을 욕망한다. 또는 가족과 자녀를 위해 욕망한다. 이런 욕망에는 자기 제어 장치가 있다. 예를 들어, 가족과 자녀를 위해 경제적 부를 추구하던 이가 사고나 가정불화로 가족을 잃었을 때 이전 같은 경제적 활동을 지속하지 않는다. 경제 활동의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자본주의도 마르크스도 프로이트도 그 접촉점을 잃는다. 이것이 신자유주의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막스 베버의 반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의미를 더욱 중요시 여겼다.

그러나 세습과 같은 교회 사유화 현상은 베버의 관점에서 볼 때 부합점이 없다. 목회하는 동안 인정받고 누렸던 능력이나 성취감을 일순간에 허물어 버릴 뿐만 아니라 가족과 자녀까지도 황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남는 것은 의미조차 갖지 못하는 자기 자신, 곧 파괴된 자기뿐이다. 그에게 의미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뿐이다.

한국교회 사유화는 물질의 사유화에서 기인된다. 이것을 잘 증명하는 것은 작은 교회 목회자와 그 자녀들이 좀처럼 교회를 세습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게 되면 그들은 사유화를 생각하며 세습을 생각한다. 세습을 막기 위해서는 사유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한 방법 중 하나가 교회의 공공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서 그러하듯이 이것은 두 차원에서 시도되어야 한다. 의식 차원과 제도 차원이다. 먼저, 교회 소유에 대한 의식의 급진적 재구성 혹은 재사유(rethink)가 필요하다. 교회는 사적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처럼 공유의 대상으로 생각해서도 안된다. 역사가 증언하듯이 공유화는 결국 힘 있는 일부 계층에게 권력이 넘어가기 십상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유화의 대상도 공유화의 대상도 아닌, 곧 누구의 소유 대상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인식의 재구성이 일어나야 한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오래된 주장을 다시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주장은 교회의 사유화를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빈번히 사용되어 왔기에 호응이나 실효성이 미비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 보다는 교회를 소유의 개념에서 분리시키는 시도가 보다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 ‘교회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교회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가르침과 인식이 한국 교회와 교인들에게 시행되고 퍼져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적인 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제도적, 법적 장치가 함께 준비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와 교단이 대형 교회의 사유화, 세습 등을 법적, 제도적으로 금지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세워야 한다. 적어도 오늘날의 한국 교회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사태들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공론화 작업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규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를 지속적으로 설득하면서 제도적 혁신 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 물론 이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현 상황을 그대로 놔둘 시 더 어려운 상황 혹은 돌이키기에 너무 늦은 시기가 도래할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뜻과 마음을 모아 문제에 대처하여야 한다.

 

한국기독교의 사유화와 공공성 -신학적 대안

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목회사회학연구소)

 

한국교회는 개교회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럽의 국가교회내지는 국민교회의 형태보다는 교단형태의 교회모습이 미국을 통해서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트뢸치가 이야기하고 있는 교회형태(Church Type)와 종파형태(Sect Type)에서 종파형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발전하여 미국교회에서는 종단형(Denomination Type)을 이야기한다. 교회형까지는 아니어도 종파형보다는 좀 더 공적인 형태를 가진 교회이다. 한국교회는 종단형의 교회가 들어왔다. 그러나 교회성장 시대를 겪으면서 개교회주의로 급격하게 변했다.

성장이 중요한 가치가 되면서 그것을 가로 막는 모든 것이 다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된 것이다. 여기서 교단이나 공적인 기관들은 다 부수적인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 것들이 성장에 도움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극한 집단이기주의 가운데 교인수 늘리고, 건물 올리는 것이 가장 선한 것으로 치부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를 성장시켜주겠다는 프로그램이나 세미나에 사람들이 모인다. 교인들은 어떤 교단에 자신들의 교회에 속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 교회에서 행해지는 프로그램에만 관심이 있다. 이것은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교단에 대한 정체성보다도 프로그램으로 특징 지어지는 세미나에서 더 큰 정체성을 찾기도 한다. 오히려 이것이 자신들의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공공성이라는 것이 인정을 받지 못한다. ‘우리 교회’외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거기다 한국사회 특유의 특성도 한 몫을 했다. 그것은 가족주의와 분파주의다. 가족이라고 하는 것은 유교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며 동시에 가치이다. 가족을 위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가족만을 위한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것은 보편성을 잃게 되고 내 가족의 이익만을 챙겨 갖는 이기주의가 될 수 있다. 이것의 발전이 분파주의다. 우리 고향, 학교, 집안 등을 따지며 결속하지만, 동시에 이 카르텔에 끼지 못한 사람을 소외시키는 집단이기주의다. 이러한 것의 대표적인 예가 재벌이다. 이것은 한국 특유의 경제집단으로 이해된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예가 없기 때문에 외국의 학계에서도 ‘Jae-Bul’이라고 하여 고유명사로 사용한다. 이것은 가족중심으로, 소유가 승계되고, 중앙의 한 사람에 의해, 그리고 그에 의한 특수집단에 의해 전체가 조정되는 기관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이러한 재벌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세계로 뻗어 가는 기업일지라도 결국 알고 보면 한 집안에 의해서 지배되고 통제되고 있다. 이러한 비 합리적인 경영방식이 가능한 것은 결국 우리 나라 특유의 유교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과거 ‘가문’으로 이해되던 것들이 오늘날에도 비슷한 영향력을 갖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초기 이러한 유교적 가치관을 깨뜨리며 새로운 가치체계를 가져왔다. 물론 그 배후에는 서구에서 온 선교사들이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보편성과 합리성, 그리고 공익성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체계의 조직인 교회를 이 땅에 선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이 땅에 기독교기관이나 기독교학교에서 그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에서는 누구의 교회라든지, 또는 어느 집안의 학교나 기관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설립하고, 기관과 학교를 설립하면서 개인의 소유로 보지 않았고, 그것을 한국교회의 자산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철수한 후에도 그것은 한국교회의 큰 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 역사 130여년에 한국교회 기관들이 문제가 생긴다. 기독교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한국사회 특유의 특성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의 유산으로 유지되고 남았던 기관들이 특정한 집단, 또는 특정한 인물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고 사유화돼 가는 것이다. 기독교정신으로 인해서 새로워진 것들이 다시 한국적 가치관에 의해서, 그리고 그 세력에 의해서 지배받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해 본다.

1. 기독정신의 회복이 필요하다. 보편적 가치와 합리성, 그리고 공익성이다. 이것은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적인 합리성에 기반한 판단이 가능해야한다. 이러한 가치관과 태도에 기초하여서 토론의 문화가 이루어져야한다. 공적기관이라면 공적인 자리에서 토론하고 이해를 나누어야 한다. 그 자리에 필요한 것은 기독정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공교회의 기능을 공고히 해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에 공교회로 불릴 수 있는 기관이 없다. 한국기독교교회협희회(NCCK)도 한계를 가지고 있고, 한기총이나 한교협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없다. 또한 교단들 역시 공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수없이 터져 나오는 문제들이 있는데 이런 것에 대해서 치리가 없고, 권고하거나 지도할 수 있는 권위가 없다. 문제가 있으면 고칠 수 있어야 하는데 공교회가 무너지고 나니 한국교회를 대표할 곳도 없고, 동시에 한국교회를 단도리할 곳도 없다.

3. 공적 기관의 자리를 정치의 노획물이 되지 않게 보호해야한다. 한국교회에 존중과 존경이 사라졌다. 인정받고 존경을 표할 수 있는 어른이 없다. 이러한 어른이 없으니 기준이 없고, 가치가 없다. 결국 모든 의사결정은 힘으로 이루어지고, 그 힘을 조정하는 정치가 기준이다. 교계에 할당된 이사나 임원자리에 파송되는 이들이 정치에 능한 자들이 가게 되면 결국 그 자리가 정치적 포상이 되고, 그것이 다시 힘이 되고, 정치가 된다. 그러한 자리들이 희생의 자리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4. 기독교에 공익재단이 필요하다. 사적 기반에서가 아니라 공동의 재산으로 남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관리하고 인정할 수 있는 재단의 필요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다만 그 것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준비한다면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것이 있어야 현재의 대형교회 위주의 한국교회 형태, 그리고 정치적 역할에 능한 이들에 의해 움직이는 한국교회의 형태가 고쳐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사사성과 공공성

전철 (한신대학교, 조직신학)

 

1. ‘하나님의 통치의 빛’과 세계 : 교회는 세계 안에 있지만, 세계에 귀속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거룩한 교회의 삶을 통하여 세상의 ‘갱신’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세계를 넘어 존재하지만, 세계로부터의 도피를 꿈꾸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갱신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의 질서를 상대화 하며, 동시에 세상 안에서 세상의 상태를 변화시킨다(status mundi enovabitur). 교회라는 몸의 정당성은,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증빙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회라는 몸의 정당성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갱신과 변화를 통해 세상 안에서 증빙할 필요가 있다. 만약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는 공공적 책임성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전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교회는 세계로부터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2. 왜 한국교회의 공공성인가 : 교회는 공공적 합리성(public rationality)을 기초해야 하지만, 공공적 합리성으로만 환원되지 않고, 그를 넘어서는 수행적 종교성(performative religiosity)을 근간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문제는 상식적인 지성과 공공적 합리성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타락한 한국교회가 도마와 비판의 대상이다. 한국교회의 공공성 화두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어떻게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가”라는 교회내적 과제에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사성과 사유화의 강화”에 대한 사회적 우려와 경고와 비판에서 등장한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3. 교회의 책임적 삶 : 밝은 빛은 대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의 존재감을 더욱 드러낸다. 교회가 선포하는 새로운 질서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사실상 이질적이며 불편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시선은 세상의 미래를 진단하는 암시적 방향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질서에는 세상의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명시적 증빙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 질서의 파괴를 암시적으로 요구한다. 적어도 세계를 향한 교회의 책임적 삶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교회가 타자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존재가 된다면, 세상의 부조리한 질서를 변화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한 질서에 더 편승한다면 교회의 미래는 없다. 교회의 존립은 새로운 세상의 꿈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구현에 근거한다. 21세기 시민사회와 세상의 질서를 새롭게 갱신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진보에 반하는 교회가 된다면 그곳은 단지 교회의 무덤일 뿐이다.

4. 21세기 한국교회의 모습 : 교회의 궁극적 관심은 세상을 향한 구원과, 세상을 향한 섬김이다. 교회와 사회와의 소통은 교회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이 최소한의 조건의 실현도 위태로워지는 듯하다. 세계의 미래를 위한 교회의 진단과 헌신이 필요하다. 한국 교회, 한국 기독교가 사사성과 사유화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공공성을 확보하여 세계에 대한 책임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을 진단해야 할 한국 기독교가, 오히려 사회로부터 사망선고를 진단받지 않도록 (나와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반성과 노력이 매우 필요하다.

5. 한국교회의 공공성 과제 : 한국교회의 공공성을 위하여 우리가 중요하게 검토하고 정리하며 성찰해야 할 부분은 1) 교회와 국가, 교회와 정치권력, 교회법과 사회법 사이의 관계문제(ex. 정교분리, 기독교정당, 교회세금) 2) 한국교회의 종교/사회/문화적 배타성의 문제(ex. 교단분열, 종교근본주의) 3) 한국교회가 사회 안에서 지탄의 대상(ex. 교회세습, 교회재정 투명성, 교회의 세속주의)이 아닌, 세상의 희망과 섬김으로 변모할 수 있는 내적 각성과 현실적 연대(ex. 교회의 양극화 극복, 교회의 공공성 회복, 교회의 사회적 책임)와 프로그램 개발 등등이 더욱 다양하고 깊이 있게 연구되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6. 타자를 위한 교회 :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와의 소통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교회다움(타자를 위한 교회, 본회퍼)을 바탕으로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타자를 위한 세상의 희망으로서의 교회”의 과제를 21세기 한국교회는 교회적, 교단적, 에큐메니칼 교류와 신학적 협력과 운동 차원에서 더욱 체계적이며 적극적으로 연구, 논의, 심화시켜야 한다. 교회의 궁극적 관심은 세상을 향한 구원과, 세상을 향한 섬김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교회의 성숙한 태도이다. 21세기 한국교회가 ‘교회의 사회적 책임’, ‘거룩한 교회로의 거듭남’이라는 과제를 더욱 부여잡고 씨름하기를 소망한다. 주여,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소서.

 

“한국교회의 사사성과 공공성”에 대한 논찬

 

이신건(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날로 더욱 심해지는 한국교회의 사유화를 극복하고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진지한 논의에 부족한 사람이 논찬자로서 참여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교회의 공동성을 위한 조직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실제적인 과제까지 제시한 전철 박사의 신학적 통찰에 깊이 동감하며, 역시 그의 수고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의 빛 아래서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적절히 규정하며, 교회론적으로는 특히 ‘그리스도의 몸’을 중시한다. 그리고 그는 본회퍼의 유명한 명언 ‘타자를 위한 교회’를 근거로 삼아 세상에 대해 책임적인 교회, 곧 세상을 향한 구원과 세상을 향한 섬김을 강조한다.

분명히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섬기는 그의 몸의 지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사유화를 위한 신학적 근거를 그 어떤 교회론으로부터도 끌어올 수 없다. 한국교회가 점점 더 사유화되어가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타락한 본성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보다는 세상과 맘몬을 더 사랑하고 더 섬기는 현상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신학적으로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신앙고백을 치열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교회 현장에서 조직신학적 성찰만큼 무시되고 심지어 폄하까지 되는 분야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임무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반성과 고백을 전혀 하지 않으며, 오로지 무한성장을 위한 실제적 전략에만 몰두하고 있다. 특히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성장이라는 거룩한 욕망 아래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추구하며, 그것은 결국 재정 비리와 교회 세습, 교회 거래와 선거 부패 등으로 어김없이 나타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분명히 ‘성령의 활동’의 결과였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한곳에서 모여 기도하기에 힘쓰던 제자들은 주님의 약속대로 강림한 하나님의 영의 뜨거운 체험을 통해 이기심을 완전히 극복하고, 이른바 완전한 소통과 나눔의 사회적 공동체를 실현했다. 한국교회의 성장도 분명히 성령의 놀라운 활동과 떼어놓을 수 없다. 초기 한국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했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공동체적이고 형제애로 넘쳤다. 하지만 점점 더 부유해지고 교만해진 한국교회는 더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점점 더 돈과 세상의 힘을 의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한국사회의 심각한 양극화와 분열을 극복해야 할 한국교회는 도리어 자체적으로 더 심각한 양극화와 분열을 야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의 경고대로 한국교회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는”(갈 3:3) 어리석은 교회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다시금 진정한 성령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교회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소유하고 넘겨주고 거래하는 물질적 자본이 아니라, 성령이 만들고 성령이 갱신하고 확장하는 성령의 피조물 또는 성령의 전이다. 하지만 영이라고 모두 믿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를 뒤따르게 하지 않는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다. 진정한 영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이기적인 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비우고 나누게 하는 사랑의 영이다. 이러한 영에 대한 분명한 고백과 체험을 지속적으로 반복하지 않는 교회는 반드시 육체에 속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교회로 달려갈 것이다. 오직 성령에 속한 교회만이 육에 속한 옛 사람을 죽이고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는 성령의 위대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자 성령이여, 한국교회에 다시 한 번 더 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