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왜 죽어야 했나?

이신건(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예수는 왜 이 땅에 왔는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되, 더 풍성히 주기 위해서다.(요 10:10) 그래서 예수는 죽어가는 수많은 병자들을 살렸고, 죽은 나사로도 살렸다. 생명(生命)은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이다. 그래서 “나는 살려는 생명에게 둘려 싸여 있는, 또 하나의 살려는 생명이다.”라고 말한 슈바이처는 생명 경외를 몸으로 실천했다. 이처럼 생명은 존귀하고, 거룩하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는 느닷없이 죽기를 자청하고, 자신을 죽일 자의 소굴로 당당히 들어갔다. 생명을 주려고 온 예수가 스스로 죽음을 자청하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모순과 역설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이 귀한 선물을 빼앗거나 독점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더욱이 생명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생명은 그 자체로서 곧 죽음이다. 생명은 오직 자유 속에서만 활짝 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예수 당시에 인간은 수많은 억압 속에서 비참하게 병들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모든 인간들, 그 가운데서 특히 사회적 약자들은 근근이 생명을 이어갔으며, 그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생명으로 온 예수는 생명을 죽이는 세력들을 용감히 폭로하고, 분명히 비판하여야 했다.

만약 예수가 도(道, 진리)를 닦기 위해 조용한 사막이나 한적한 숲속으로 들어갔더라면, 그리고 제자들을 거기로 불러 모아 함께 조용히 살았더라면, 예수는 그렇게 빨리,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매우 배부르게, 매우 행복하게 오래 살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는 다른 성인들과 위인들과는 다른 삶, 곧 인류를 대리한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았다. 진리의 빛으로 온 예수는 거짓의 어둠을 몰아내야 했고, 생명의 떡으로 온 예수는 죽음의 독소를 청소해야 했다.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 예수는 인간의 몸으로 왔고,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 예수는 죽음의 세력 속으로 자신의 몸을 단호히 던져야 했다.

그렇다면 예나 지금이나 어떤 세력이 어둠을 확산하고 죽음을 퍼뜨리고 있는가? 성서를 진솔하게 읽다 보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 가운데서 가장 강력하고 노골적인 것을 들라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참칭하며 인간을 압살하는 정치적 세력이요, 하나님을 압도할 만큼 마력을 지닌 맘몬의 세력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공로로 뒤바꾸게 만든 율법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세력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자칭하는 우상적 세력들이다.

예수는 이런 세력들을 뒤에서 은근히 조장하고 앞에서 노골적으로 조종하는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 17:24) 그러나 사탄의 졸개들은 여전히 이 땅에 활개를 치고 있음을 예수는 보았다. 예수는 이런 세력들과 최후의 소탕전(掃蕩戰), 일종의 백병전(白兵戰)을 벌려야 했다. 그것은 오직 그의 몸을 죽음의 세력들 속으로 던져 넣음으로써만 가능했다. 죽음의 세력들은 자신의 소굴로 뛰어든 예수를 죽임으로써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렇지만 예수는 죽음 속에서 죽음의 세력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이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세력은 예수의 자발적인 희생을 통해 자신의 힘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죽음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여지없이 폭로되었고,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은 바로  예수가 잡히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베푼 유월절 만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바로의 억압으로부터 풀려날 때, 어린 양들이 자유의 제물로 희생되었다.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주었고, 입으로 먹은 양의 살은 이스라엘 백성이 험하고 먼 길을 가도록 힘을 보태주었다.

이처럼 예수가 죽기 전날 밤에 친히 제공한 자신의 피와 살도 인류의 해방을 위한 거룩한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예수의 살과 피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힌 인간을 살리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요 6:55)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는 자마다 영원히 죽지 않으며, 비록 죽을지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이것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사실로 입증되었다.

예수의 죽음은 해방과 생명을 위한 은혜의 선물이지만, 이 해방을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는 우리도 예수처럼 살고 예수처럼 죽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막 8:34)고 명했고,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생명에 동참하기 위해 “날마다 죽는”(고전 15:31) 삶을 살아야 했다. 예수가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었듯이(요 12:24), 우리도 그렇게 죽어야 한다는 명령과 함께 이를 통해 우리도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성결신문 기고 2014.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