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학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신건 박사(튀빙엔 대학, 조직신학)

 

 

1. 나의 신학을 형성한 주요 요인들

 나의 신앙은 흔히 말하는 "모태 신앙"(1952년 부산 출생)이다. 즉 나는 불신앙으로부터 돌아서서 신앙하기로 결단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가정 안으로 태어났다. 나의 부모님은 각자의 모친(조모, 외조모)으로부터 독실한 신앙을 물려받으셨고, 나는 부모님(이용상 집사, 김갑득 집사)의 신앙을 이어받았다. 이처럼 선친으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나는 심각한 죄의식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렇게 때문에 순간적인 회심의 체험이나 감격도 없으며, 회심과 중생을 강조하는 신학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적어도 나 자신의 실존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격한 회심을 통해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부산의 산동네에서 태어나서 자란 나는
늘 바다를 바라보며 살았다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재산보다 더 귀한 신앙을 물려주셨다

어린 시절에 교회의 설교나 교육도 회심을 그리 강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성결교회(수정제일 교회→수정동 교회 )와 나사렛 교회(수정동 교회)에서는 전래의 개인적이고 영혼구원적인 선포가 주종을 이루었다. 내가 물려받은 신앙은 한편으로는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전래된 복음주의적(실제로는 많은 면에서 근본주의적)인 신앙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무속적 신앙 형태와 적절히 조화된 신앙이었다고 여겨진다.

초등학교 3학년(?) 소풍가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다소 습관적이던 나의 신앙 생활에 첫 위기가 온 것은 대학 입학을 위해 일년 간 재수(再修)하던 기간이었다. 교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또래 여학생의 돌연한 죽음은 나의 존재 의식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던 사건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그녀의 주검을 묻고난 후, 나는 언제라도 돌연히 죽을 수 있는 나의 가능성에 전율하였다. 내게도 언젠가는 반드시 닥쳐올 돌연사(突然死)에 대한 냉철한 의식은 화려한 대학 입학도, 그후의 어떤 출세도 완전히 무색하게 만들었다. 무의 위협, 죽음으로 내던져진 존재, 삶의 종점으로서의 죽음, 이 주제는 나를 무서운 불안과 공포로 몰아갔고, 하루하루의 삶이 마치 기적과 같이 여겨졌다. 나는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이런 고민 때문에 나는 학원이나 공부방보다는 어언 덧 부흥회를 즐겨 찾았다. 그러던 중, 어느 새벽 부흥 집회에 참석한 나는 주기철 목사의 초인적인 순교(殉敎)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쏟아 내던 부흥 강사(신현균 목사)의 설교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아니 죽음을 죽음으로 이겨낸 한 거인의 삶이 나의 죽음 의식을 압도하였던 것이다. 그가 순교하기까지 붙들었던, 아니 그를 붙들었던 기독교 신앙 안에 죽음을 이기는 희망이 숨어 있음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 날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결심한 날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1972년에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3가에 자리잡고 있던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서울신학대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온갖 신앙 형태와 다양한 출신 배경의 급우들 틈에서 낯선 신학을 배우며 예배에도 열심히 참여하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강의와 예배는 나를 크게 변화시켜 주지 못하였다. 강의는 지나칠 정도로 주입식이었고, 신학의 새로운 지평에 눈을 돌리게 하거나 눈뜨게 하기에는 미진하였다. 예배는 뜨겁고 열기에 가득 찼으나, 메시지는 언제나 개인의 회심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내가 새삼 회심하려고 신학대학에 왔나? 왜 내게 원대한 꿈과 사명을 주지 못하고, 늘 나를 초보 그리스도인으로 취급하는가?" 이런 회의감 때문에 나는 신학대학의 분위기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 강조되기 시작하던 '아시아 선교'라는 구호도 현실성이 결여된, 너무나 먼 꿈으로 여겨졌다.

  

1972년 봄부터 1974년 여름까지 다녔던 서울신대의 옛 캠퍼스(아현동 소재)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독서에 몰두하였다. 철학과 역사, 심리학과 문학에 관한 폭넓은 독서를 통해 갈급한 지식욕을 채웠고, 웟치만 니(Watchman Lee) 등의 신앙 서적들을 통해 영적인 욕구를 채웠다. 개인적으로는 틸리히(P. Tillich)의 철학적인 글들이 회의에 흔들리던 나의 사고를 안정시켜 주었고, 틈틈이 영어와 독일어 공부에도 매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종남 교수(당시 학장)님의 강의를 통해 소개받은 웨슬리의 신학은 지금까지 나의 사고에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다. 즉 온전한 구원을 향한 열망, 창조적 종합(Creative Synthesis)의 정신, 성서와 전통과 경험과 이성을 잘 조화시키려는 방법론(사변형의 신학)은 지금까지 내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온화하신 인격을 지니시면서 중후한 조직신학 강의를 해주셨던 정진경 교수(신촌교회 원로 목사)님은 내가 추구하는 훌륭한 신학자의 한 모델로 지금까지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상훈 교수(전 서울신대 학장)님의 진지한 학구열과 유창한 어휘와 영어 구사력도 나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하지만 서울신학대학의 강의와 예배의 내용은 대체로 종래의 지식과 신앙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개인적 회심과 직접 선교에 대한 일방적 강조, 사회와 역사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 교회 중심적인 생활과 문화, 이런 것들은 지금까지 나를 형성한 신앙의 패러다임으로서 내가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기심이 왕성하고 학문적 도전에 민감하였던 나에게 이런 협소한 틀은 만족을 주지 못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사고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도전은 다시금 바깥에서부터 왔다. 70년대는 철권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연장의 야욕이 한껏 부풀려 나오면서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민들과 큰 충돌을 빚던 시기였다. 긴급조치(緊扱措置), 위수령(衛戍令), 계엄령(戒嚴令)이 연이어 공포되었고, 유신헌법(維新憲法)의 발효에 맞선 명동 구국민주선언(救國民主宣言), 노동 운동, 민주화 운동이 여기저기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런 와중에서 인혁당(人革黨)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급속한 처형과 민청련(民靑聯)에 가담한 학생 주동자들에 대한 사형 구형이 있었다.

5.16 혁명 직후의 박정희

이런 사건들이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에게 결코 남의 일일 수가 없었다. 서울신대의 옛 캠퍼스가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민청련의 주도적인 인물 중에 하나였다가 사형 언도를 받은 세 사람 중에서 김병곤(金炳坤) 씨는 고등학교의 동기생인데다가, 사형을 언도를 받자 말자 "영광입니다"라는 말을 내뱉은 자로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는 나중에 사형은 면하였지만, 결국에는 고난의 상처가 암으로 발전하여 아깝게도 젊은 나이에 유명(幽明)을 달리하였다. 그 당시에 나는 그를 비롯하여 나머지 주동자들이 곧바로 처형될 줄로 확신했다. 그만큼 시국은 급박했고, 독재자는 조급했던 것이다. 세상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젊은이를 잡아다가 죽이려 하다니! 같은 젊은이로서 분노와 애통이 극에 달했고, 고민도 절실해졌다. 이제는 나의 죽음이 아니라 남의 죽음, 특히 의로운 자의 죽음의 문제가 나의 의식 속에 투명하게 들어왔다. 이리하여 나에게 다른 차원의 신학적 고민이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역사의 변화는 어떻게 오는 것이며, 역사의 희망은 기독교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불의에 저항하고 희망을 앞당기려다가 고난당하고 죽는 자들의 희생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리스도는 개인의 영혼만을 위해서 돌아가셨는가? 오늘 우리의 구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와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런 고민들이 나를 급습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의 교회와 대학은 여전히 잠잠하였다. 아니 그럴수록 우리의 시선을 더욱 더 내면으로만 몰아가는 것 같았다. 그 누구를 원망도 할 수 없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나의 고민에 대한 시원한 해답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역사와 관련된 서적들을 골라 읽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그리스도와 시간"(Christ and Time), 역사 안의 구원"(Salvation in History)과 함석헌(咸錫憲)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도 그 중에 하나였다. 그 밖에도 나는 여러 역사철학서들을 탐독하였다. 그러나 이 시절에 답답한 나의 생각의 지평을 크게 확장시켜 주고 절실했던 신학적 고민들을 풀어 준 것은 몰트만(J. Moltmann)의 "희망의 신학"이었다. 그의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도 고난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유익이 되었다. 이 때에 나는 비로소 "역사"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눈을 떴다.

이리하여 "실존"과 더불어 "역사"가 나의 사고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라는 제목을 붙여 저술한 세 종류의 나의 책들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관심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만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하여 시작되고 완성된다. 이리하여 나는 사회참여도 별로 해보지 못한 부끄러운 몸으로서 사회변혁과 역사참여의 전도사가 된 것이다. 이런 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역사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자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서도 제외될 것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역사와 사회에 대한 무관심은 정신적 비성숙과 심리적 자폐의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개인의 실존을 희생한 역사적 실존은 없다. 그렇지만 역사적 실존이 없는 개인의 실존은 없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하지만 현대 이후의 패러다임인 "자연"(自然)과 "환경"(環境) 혹은 "생태학"(生態學)은 나에게도 서서히 다가왔다. 독일 유학(1983년 11월 - 1987년 12월) 중에 일어난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폭발에 따른 엄청난 재앙, 귀국 후에 터진 낙동강의 페놀 유출사건을 비롯한 환경 파괴사건, 지금도 점점 더 심각해지는 지구의 온난화 현상과 엘니뇨 현상, 날로 커지는 오존 구멍과 녹아 내리는 빙하 등이 그 분명한 실례이다.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은 바로 이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었다. 이제 나의 사고를 뒤흔들기 시작한 것은 나 개인의 죽음이나 역사 속의 의로운 자들의 죽음이 아니라 지구 생명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위기였다. 지구에 아직 희망이 있을까? 너무 늦지는 않을까? 신학과 교회는 여전히 내세나 세계의 묵시적 재앙만을 선포해야 할까? 이 지구 공동체의 구원은 어디서 올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지구의 생명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오늘의 구원은 무엇일까? 이런 고민들은 지금 나를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다.

이런 고민들을 해결하려고 "과정신학"(Process Theology)과 "진화론적 신학"(Teilharde de Chardin), 몰트만의 "생태학적 창조론" 등을 읽게 된 후로 나의 신학 지평은 점점 더 자연으로 확장되고 있다. 환경에 대한 나의 관심은 나의 저서 "어린이 신학"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앞으로 나는 개인적 실존과 역사적 실존, 자연적 실존을 두루 아우르는 통전적인 신학과 생활을 하고 싶다. 이것은 실로 웨슬리가 추구했던 "온전한 구원에 대한 열망"의 진정한 계승이요, 그의 "창조적 종합정신"의 창조적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나는 여전히 웨슬리의 제자임을 분명히 고백한다.


2. 나의 신학의 주요 특징 

앞에서 말한 대로, 나는 영국의 웨슬리 신학전통으로부터 발원하여 미국의 복음주의 전통을 거쳐 한국의 성결교회로 흘러온 전통 안으로 태어났고, 이 안에서 자랐으며, 이로부터 교육받았다. 이것은 내가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나의 신학적 유산이다. 이것은 나의 신학의 전제요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신학 안으로 수렴되고 통합될지언정, 결코 버리거나 묵살해서는 안 될 소중한 전통이다. 그 이후로 내가 무엇을 더 배웠던지 간에, 또 내가 앞으로 무엇을 추구하든지 간에,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나는 나의 유년기적 신앙을 통합할 수는 있어도 폐기할 수는 없다. 이것은 도덕적 의무이기 이전에 나의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는 신앙적 침전물이다.

   

 

영국의 웨슬리 신학과 미국의 근대 복음주의는 나의 신학적 고향과 전통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 입학한 후(1977년)로 실로 나는 웨슬리안적 전통과 거의 단절된 채 개혁주의(장로교)적 전통을 흡수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박봉랑 교수님과 김균진 교수님을 통해 소개받은 바르트(K. Barth)와 몰트만(J. Moltmann)의 충격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 지 난감하였다. 그들의 신학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막중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현대의 신학 거장들을 단숨에 거부하고 과거의 안락한 전통에 칩거하는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바르트를 모르고서 현대신학을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오늘을 살면서 몰트만 신학의 충격을 전혀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바르트를 열심히 읽었으며, 그의 이론을 중심으로 석사 논문을 썼다(신학에 나타난 아날로기아<Analogia: 유비>에 대한 소고. 아퀴나스, 틸리히, 바르트를 중심으로). 그리고 대학원 재학 시절(1977-1979년)과 군복무 기간(1979-1981년, 영천 제3사관학교 행정병) 동안 나는 틈틈이 몰트만을 독일어로 읽었다.

 

"칼 바르트의 교회론"은 튀빙엔 대학에 제출한 본인의 박사학위 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두 신학 거장은 실로 개혁교회가 낳은 현대의 세계적인 신학자이다. 웨슬리안 신학전통 안에서 허약하게 자랄 수 밖에 없었던 나는 이로써 개혁교회 전통을 보약으로 달여 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영양보충 이상이었다. 이것은 체질개선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개인의 관심사가 제 아무리 절대적이라고 하더라도, 늘 개인의 관심사로부터 출발하여 개인의 관심사로 끝나는 신학, 아니 개인이 아니라 교회(교회확장)로 끝나는 신학도 나로서는 미흡하기는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실현하시려고 했던, 그리고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주권)는 개인과 교회도 당연히 포함하지만, 실상은 이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아닌가? 그것은 역사와 우주의 완성이기도 하지 않은가?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의 일차적 관심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주권)에 있었지, 결코 협소하고 이기적인 개인구원에만 있지 않다는 확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주권 신앙은 개인의 결단과 구원을 단호히 요구하지만,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신앙은 때때로 하나님의 나라에 눈이 멀게 하고 종종 그것과 충돌하기까지 한다. 이런 면에서 어디까지나 나는 개혁 신학자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임을 고백한다.

            넥카 강변의 대학도시 튀빙엔

2000년 서울신대 방문기념

 내가 독일 유학을 마친 후 한국에서 신학자로 활동하면서 모든 사물과 사상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려고 노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박사학위 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한 "칼 바르트의 교회론"(1989년) 이후의 책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이데올로기"(1990년)와 "하나님 나라의 윤리"(1991년)는 바로 이런 관심사의 구체적이고도 시대적인 표현이었으며, 신학생을 위해 교재로 쓴 "조직신학입문"(1992년)과 평신도에게 교리를 쉽게 풀어쓴 "평신도 눈높이 신학"(1997년), 여러 논문들을 엮은 "하나님 나라의 지평 위에 있는 신학과 교회"(1998년)도 이런 관심을 분명히 폭넓게 반영한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면, 우연하게도 10여년이라는 세월이 나의 신학적 실존을 결정한다. 즉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포함하는 10여년이 선배들의 신학전통을 수동적으로 습득하던 "수용적 학습" 기간이었다고 한다면, 그 이후의 10여년은 "하나님의 나라"의 실로써 모든 신학을 능동적으로 꿰매던 "종합적 수용"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나의 신학적 실존은 어떻게 결정될 것인가?

 

3. 앞으로의 나의 신학 과제 

앞으로 내가 고민하고 기여하고 싶은 분야는 다음과 같다.

1. 여러모로 부족한 내가 1995년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설립한 성결신학연구소는 우리 교단의 신학적 정체과 보편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나는 처음부터 우리 교단의 신학이 "과거에 이랬다"거나 "앞으로 이래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성결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누군가 이 문제를 정리해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멍청해질 수 밖에 없다.

문제의 핵심은 단지 시간의 간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현실 간의 엄연한 괴리에 있다. 즉 헌법이 표방하듯이, 웨슬리가 진정 교단신학의 출발점인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의 신학정신을 오늘에 온전히 되살리려고 몸부림치지 않는가? 그럴 때라도 웨슬리 신학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의 신학정신을 재현하는 것이 옳은가? 즉 그의 시대적 환경과 관심사가 지금과 판이하고, 또 그의 신학이 빈약하거나 부적합하다고 할 때, 그것으로써 어떻게 오늘 우리의 고민을 풀 수 있겠는가?

더욱이 성결교단에 압도적인 영향을 준 것은 웨슬리의 신학이 아니라 - 우리의 선배들이 웨슬리 신학이라고 오해한 - 미국 성결운동가(웨슬리안)의 신학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신학은 웨슬리의 신학유산과 많은 면에서 차이가 나지 않는가? 이 긴장과 모순을 어떻게 풀 것인가? 더욱이 우리 교단에 이식된 신학은 종종 신앙 선배들의 정신(예를 들면 무교와 유교의 정신)과 지평융합을 이루었다. 물론 웨슬리 신학이 미국에서 확장되고 변화를 겪은 일에 비하면, 우리의 신앙선배들의 창조적 수용과 주체적 발전은 미미한 편이다.

과거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문명의 도래 앞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안일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구태의연한 신학내용과 표현방식으로 어떻게 문명 혁명의 파고를 슬기롭게 넘어갈 것인가? 어쩌면 우리의 신학적 정체성 확립보다 더 시급한 것은 그 보편성 확보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98 성결인대회"가 제창한 우리의 과제, 즉 국난 극복과 민족통일, 교회갱신과 회개운동, 도덕성 회복과 사회정화, 분쟁지양과 화해 일치,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랑과 봉사, 세계선교와 인류평화, 창조질서와 자연환경의 보전은 우리의 신학전통과 무슨 유기적 관계가 있는가? 이것은 시대적 구호일 뿐이고, 우리의 정신 세계는 여전히 빈곤하고 또 구태의연하지 않는가? 미래를 향한 우리의 신학적 결단과 발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과제로 고민하고 새로운 합의에 도달하려는 몸짓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 누가 이 어려운 짐을 지고 있으며, 또 져야 하겠는가? 성결신학연구소는 바로 이런 고민들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성결교회 신학의 역사와 특징"은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과 보편성을 규명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2, 나 개인적으로는 "어린이 신학"(1997년)의 출간을 분기점으로 삼아 이제는 "창조적 종합"의 기간에 들어서려고 애쓴다. 언제까지 남의 것을 베끼고 흉내만 낼 것인가? 웨슬리창조적으로 종합하지 않았는가? 왜 우리만은 늘 웨슬리나 다른 신학자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의 "어린이 신학"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신학과 이를 보완, 극복하려는 "여성 신학"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신학적 패러다임이고자 한다. 하나님을 "어린이"로 표상하는 신학은 기독교 전통에서 전무한 것인 만큼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신학은 "실존- 역사-자연"과 "남성-여성-어린이"를 아우르는 통전적 신학이며, 또 "성결교회의 신학"과 접목할 수 있는 여지도 매우 크다.

"어린이 신학: 하나님을 어린이로 생각하기"는 새로운 하나님 사고와 실천을 이끌어내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능력이 허락하는 한, 나는 앞으로(또 10여년 동안일까?) "어린이 신학"을 그 어떤 신학보다 독창적인 "한국인의 신학"("한국적 신학"은 아님)으로 발전시키고 싶다. 그러므로 독일 서적의 번역작업은 앞으로 10권 정도로 제한하고, "어린이 신학"의 심화와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싶다. 이리하여 나의 신학이 성결교회의 신학전통도 풍부하게 하고 또 이를 발전시키는 신학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 결과와 성공 여부는 나의 손(공로) 안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손(섭리) 안에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기에 나는 신학 연구 못지 않게 기도와 체험을 통해서도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길 원하며, 그럴수록 이웃과 자연에게도 더 가까이 다가가길 원한다. 이리하여 나의 신학이 종국에는 하나님과 온 피조물의 사귐과 화해를 추구하는 통전적 신학이기를 원하며, 이런 신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나의 몸으로 구현되는 신학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의 신학이 어떻게 형성되든,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라면 이 모든 것이 대관절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분 앞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고백할 수 있는 신학이 있다면, - 만약 이것도 신학이라고 한다면 - "주여, 불쌍한 이 죄인을 용납하소서!"라고 애원하는 "은총의 신학"이 있을 뿐이리라.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용납하신 후,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을 단 하나의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곧 "사랑의 신학"이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 이전부터 이미 나의 신학은 언제나 사랑(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의해 추동되고 견인되며 사랑으로 결실하는 신학이어야 하리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창고, 아니 지옥의 창고에 들어갈 "폐기물의 신학"이 되고 말리라. 왜냐하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할 것이지만, 오직 사랑만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3:8).

   

끝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