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치유의 신학적 이해
 

이신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11:36).


요즈음 들어서 전인치유(全人治癒)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듯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눈부신 과학의 발달에 대한 인간의 신뢰와 함께 그에 대한 불신도 더욱 커지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무지도 점점 더 늘어간다. 우주를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와 함께 인간의 한계성도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주의 질서가 증가할수록 그와 비례하여 무질서도 증대한다"는 엔트로피(열역학 제2의 법칙)의 법칙처럼 인간에 대한 정보가 커질수록 신비도 더욱 커지는 것 같다.

더욱이 오늘날의 학문의 지나친 세분화는 인간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더욱이 학문은 가치판단과 이해관계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즉 점점 더 막강해지는 자본의 위세 앞에서 학문도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실용가치, 경제가치에 더 깊이 예속되어가고 있다. 첨단과학은 인간을 살리고 이롭게 하기보다는 인간을 파괴하는 데 더 유용하다는 사실이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도 한번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특히 무기산업과 연결된 과학은 인간성을 보호하기보다는 미국의 경제 이익을 위해 더 많이 봉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은 과학의 힘을 점점 더 빌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의 힘에만 무조건 의존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있다. 특히 의술에서 현대인은 점점 더 대체의학에 의존하려는 경향성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이와 더불어 인간에 대한 통합적 이해도 증가하고 있다. 대체의학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신뢰가 더욱 커져가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과학과 신학은 더욱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증대하는 생명파괴 현상과 대처하기 어려운 새로운 질병의 확산 앞에서 양자는 서로를 계속 불신하고 배제하기보다는 자신의 한계성과 상대방의 장점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서로 손을 맞잡고 인류를 위한 공동선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학도 하나의 학문이다. 단지 신학은 과학과는 다른 방법을 따르면서 하나의 진리를 추구할 뿐이다. 그리고 신학도 인간과 무관한 학문일 수 없다. "인간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말할 수 없다"는 실존주의적 신학이 상당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명제는 오히려 점점 더 큰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나님을 말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말하지 않는 신학은 현실적 적합성을 잃을 뿐만 아니라 그 타당성조차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을 위해 하나님을 왜곡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을 위한 신학의 기능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없는 하나님은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이 바라보는 하나님은 항상 인간을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한편으로는 인간을 점점 더 잘 살게 해 준다는 약속 아래 인간을 오히려 더 병들게 하는 죽임의 문화에 맞서 싸워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더 상처를 받고 신음하는 인간과 생명을 치유하는 일에도 앞장서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인치유를 위한 교회와 신학의 관심과 공헌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필자는 전인치유를 위한 신학적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전인치유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신학적 근거를 세 가지 명제를 통해 간단히 제시하고 싶다.

 

1.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다.

기독교인들은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사오니..."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근본을 이룬다. 태초에 하나님은 만물, 즉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 1:1). 이 말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도 창조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하셨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모든 창조는 선하고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 따른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미치지 않는 영역은 없다. 이러한 신앙은 창조자와 구원자를 서로 다른 존재로 믿는 영지주의(靈智主義)의 세계상과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은 세계에 비해 열등하거나 악한 것이라는 헬레니즘의 이원론적 세계상을 거부한다.

초대 교회의 존립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한 여러 이단들 중에서 가장 큰 이단은 영지주의였다. 영지주의는 근본적으로 이원론적이었다. 이 세계는 저급한 신(데미우르고스)의 작품으로서 악한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저급한 데미우르고스, 악한 세계의 창조자로 여겼으며, 예수를 영혼의 구원자로 여겼다. 영혼은 물질적인 세계 안으로 떨어졌고, 영혼을 구원하려고 구원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에서 구원은 본질적으로 물질로부터의 해방으로 이해된다. 심지어 구원자 예수도 진정한 육체를 지니고 내려온 것이 아니라 다만 가상적인 육체를 뒤집어썼을 따름이다. 이를 우리는 가현론(假現論)이라고 부른다.

이런 이원론적인 체계는 오랫동안 기독교인의 이원론적 심성을 지배해 왔다. 특히 헬레니즘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실로 기독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예수 이전의 진실한 기독교인으로 인정되었던 플라톤(Platon)은 기독교 신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여러 형태로 잔존하고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의 일상적 존재는 한낱 감옥과 같은 것이다. 감각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실로 환영(幻影)과 같은 것이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영혼은 이데아(Idea)의 세계로 비약해야 한다. 오직 이데아만이 완벽하고 유일한 실재성을 지니며, 소멸하는 세계와 달리 끊임없이 존재하는 불멸의 실재이다. 이 세계는 이데아의 모상(模像) 혹은 그 현상일 뿐이다.

이와 같은 헬라적 이원론은 고대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떨쳤으며, 유감스럽게도 종교개혁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완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이런 현상은 무속신앙 등을 통해 한층 더 강화되어 온 것 같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라면, 세속적 진보와 육체적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어 온 성경 구절들 중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라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잘못 번역된 성서 구절과 잘못된 하나님 나라 이해는 기독교인의 이원론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를 상당히 부추겼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앞의 구절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혹은 저기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눅 17:21). 그렇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사소한 오해는 종종 큰 착각을 낳는다. 그 가장 분명한 실례는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 생각일 것이다.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자라고 고백하는 신앙은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을 통해 이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신앙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원래 하나님의 나라는 현세적이고 현실적인 개념이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이 세계가 악한 신의 창조물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그래서 이 세계와 그에 속한 것들, 특히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이것들도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작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선물을 감사히 받고, 잘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인은 이 세계가 언젠가 완전히 망하거나 사라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에 대해 신실하시며, 이를 끝까지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이 세계가 파괴되고 혼돈에 처하는 일은 있을지라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계를 끝없이 통치하시고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이 세계가 암울한 악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미래의 완전한 구원을 열망한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가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계를 떠난 구원이나 이 세계가 아닌 다른 곳의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전인구원 혹은 전인치유의 중요한 신학적 출발점이 놓여 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병들게 되면, 탄식 속에서 내세만을 열망하거나 영혼만의 안식을 구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전적인 치유를 갈망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선한 통치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이 세계의 지혜도 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협동을 배제하지 않고, 이를 포함하고 격려하기 때문이다.

 

2. 인간은 전인(全人)이다.

전인치유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근거는 신학적 인간이해일 것이다. 왜 단순히 인간을 말하지 아니고 구태여 전인을 말하는가?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파편화되었고, 그래서 심하게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치유의 문제는 진정한 인간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또한 인간을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인간을 다른 사물이나 동물과 같이 보느냐, 혹은 개인의 측면에서 보느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과 관련된 존재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인간은 다르게 이해되어 왔다. 그래서 인간은 때로는 물질로, 때로는 영혼 혹은 정신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리고 물질, 영혼과 정신의 기능과 그 상호관계도 다양하게 설명되어 왔다. 인간 존재의 신비를 풀려는 인간의 철학적 노력은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다양한 답변을 내어놓았다.

아마도 가장 오래되고 널리 퍼진 견해를 들라면, 영혼의 불멸성과 우월성에 입각한 이원론적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다시피, 플라톤은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보다 우월하다고 본 전형적인 철학자였다. 더욱이 그는 영혼을 몸과 반대되는 그 어떤 독특한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몸이 영혼을 방해하고 오염하기까지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몸으로부터 분리되어야 깨끗해진다. 감각적 지각은 영혼을 제한하며 영혼이 진리와 접촉하는 것을 막는다.

영혼은 욕망으로 생긴 몸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죽음조차도 영혼이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행복한 탈출의 과정으로 보았다. 영혼은 몸과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다른 세계를 향해 항해해야 한다. 영혼은 이 지상의 현실보다 먼저 존재해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몰락과정에 편승되지 않는다. 몸은 사라질 수 있으나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 영혼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정신적인 세계, 신적인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에게서는 영혼의 윤회와 재탄생의 사상도 발견된다. 이러한 사상에 근거한 삶의 태도는 스토아(Stoa)의 삶의 철학 속에 나타난다. 행복과 고난,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감정과 의연한 태도, 영혼의 무감정 속에 흔들릴 수 없는 힘이 있다.

플라톤은 몸을 영혼과 무관한 껍질로 하락시킨다. 몸은 마치 땅의 찌꺼기와 같은 것으로 탈정신화되며, 인간은 이 찌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런 사상은 인간의 존재를 매우 좁게 한정시키며, 몸이나 이 세계를 죄악시하거나 경시하는 사고를 조장한다. 그리고 영혼이 몸 속으로 들어온 곳을 종종 타락의 결과로 보게 한다. 몸과 영혼의 이원론은 오랫동안 서구사상, 특히 기독교 교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혼불멸의 교리, 구원을 몸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거나 몸이나 이 세계와 무관한, 순전히 정신적이고도 내세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 몸이나 세상적인 것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금욕적 태도, 그리고 성(性)을 비하하고 억압하거나 죄악시한 것 등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플라톤 사상의 영향에서 유래한 것이다.

몸과 영혼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시절의 그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독립적인 실체로 보는 입장을 보였지만, 후기에는 영혼과 몸을 따로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도장과 도장에 새겨진 무늬가 하나이듯이, 몸과 영혼도 하나이다. 몸과 영혼의 관계는 질료와 형상의 관계이다. 질료는 일정한 형상이 없이 생각할 수 없고, 형상이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듯이 영혼과 몸도 하나로 밖에는 이해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생명의 가능성을 가진 자연적인 몸의 형상이나 몸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힘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들과 같은 평면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적인 혼, 동물적인 혼, 이성적인 인간의 혼을 구분했다. 이성적인 혼은 지상에서 가장 뛰어난 형태의 영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몸과 영혼은 상관관계 속에 존재하며, 그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 영혼은 몸이 없이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영혼은 몸의 실현이다. 영혼은 몸이 아니지만, 몸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다. 몸도 영혼을 통해서만 비로소 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체를 인과론적인 기계로 설명하는 입장에 반대되는 생기론(生氣論)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처럼 그는 확실히 인간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인 영혼과 정신을 구분하고, 정신을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관조능력으로 이해하였다. 정신은 영혼이 아니면서도 영혼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면서 활동한다. 정신의 활동은 영혼에 의해 이루어지는 내적인 생활의 일부이지만, 이 가운데서도 정신은 더 고귀하고 신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정신은 죽음에 종속되기도 하고, 영원히 존재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 볼 때 정신은 결국 죽는다. 그러나 개인의 생활을 영위하는 정신은 초개인적인 정신의 작용에 의해 비로소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인간 안에 침투하여 사유와 반성을 가능케 하는 정신(수용적인 정신)은 죽음과 함께 없어지지만, 원리적으로 초월해 있는 초개인적인 신적인 정신은 불멸한다. 그러나 이 초개인적인 신적인 정신이야말로 인간의 불멸성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인적 인간이해의 배후에는 새로운 이원론이 감추어져 있다. 이 이원론은 영혼과 몸의 반대편에 정신을 설정한다. 이것은 결국 플라톤의 인간이해의 영향이다. 정신에 대한 이론은 결국 그의 경험적인 관찰로부터 형성된 전인적 인간이해와 조화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영혼과 정신의 관계는 항상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 몸과 영혼의 분리를 주장한 철학자는 데카르트(Descartes)였다. 그는 영혼을 정신적인 것, 생각하는 본체로 보았고, 몸을 물질적인 것, 연장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정신은 분할될 수 없으나, 몸은 분할될 수 있다. 영혼이 없는 몸은 복잡하고 생동력이 있는 기계인 반면에 영혼은 의지와 오성, 의심과 상상력 등을 포함하는 사유작용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이해하는 인간은 마치 기계 속에 들어 있는 유령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플라톤과 달리 영혼과 몸의 결합도 강조하였다. 인간은 통일체이며, 영혼은 인간의 몸 속에 자리잡고 있다. 영혼과 몸의 결합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인간은 영혼과 몸의 통일체로서 자기 충족적인 전체, 하나의 본체를 형성한다. 그렇다고 영혼과 몸이 본체의 절반인 것은 아니다. 영혼과 몸은 각각 완전한 본체이지만, 인간의 전체성에서 볼 때는 불완전한 본체이다. 그렇다면 이 두 본체가 어떻게 결합되어 하나의 완전한 본체를 이루는가? 데카르트는 몸과 영혼이 송과선(松果腺)이라는 기관을 통하여 상호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견해는 철학자들의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비물질적인 영혼이 어떻게 몸에 작용할 수 있는가? 영혼이 위치한 자리를 지적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영혼은 비공간적이고 몸의 어느 곳에도 자리잡고 있지 않다고 말한 데카르트의 견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또 몸을 따로 떼어서 자동적인 기계로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은 구체적인 현실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하나의 견해일 수밖에 없다. 비록 그가 인간을 일체적으로 보려고 하는 강한 흔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체험하는 영혼과 몸의 일체성을 철학적으로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만약 사람의 주체성이 연장되지 않는 사유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사람의 몸은 자동기계로 전락한다. 구체적이고 사유하는 나와 몸의 결합은 완전히 우연한 것이며, 나에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더욱이 데카르트에게서 영혼과 몸의 관계는 일방적인 지배와 소유의 관계로 묘사된다. 나는 사유하는 주체이며, 나는 나의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 나는 명령하고 이용하는 입장에서 나의 소유물인 나의 육체와 대립해 있다.

포이어바하(Feuerbach)는 몸의 실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였다. 포이어바하는 다른 유물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몸의 배후에 신비로운 다른 존재(영혼)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신학은 곧 인간학이다. 왜냐하면 신의 이념은 인간성의 투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이나 정신의 존재를 부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틀림없는 유물론자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마치 기계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 쉬운 '유물론'이라는 말보다는 '유기론'이라는 말을 더 애호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을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오관(五官)과 연결될 수 있는 것만이 현실적이다. 몸과 영혼, 이 두 본체는 인간 오성이 고립시킨 추상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둘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느냐는 물음은 공허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상상 속에서 그려진 사물들 간에는 상호작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감각적인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포이어바하에 의하면 몸이 곧 영혼이다. 몸은 타인 앞에서, 타인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인간이다.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서 하나의 부대 현상이요, 자기 존재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생긴 주관적인 착각에 불과하다. 인간은 타인과의 상호관계 가운데서도 순전히 물질적인 존재요, 유기적인 존재이다. 주관성의 차원에서는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도 객관성의 차원에서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다. 이처럼 포이어바하는 영혼을 궁극적으로 육체적인 범주로 환원한다.

유물론적인 인간관은 인간을 한 특정한 관점에서 볼 때 가능하다. 인간을 대상으로 고정시켜 버릴 때, 개인의 산 경험의 세계를 무시해 버릴 때,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묵과해 버릴 때, 유물론적인 인간관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물론적 인간관은 인간을 연구하기 전에 미리 자리잡고 있던 전제에 사로잡혀서 선택한 결과이다. 여기서 채용한 방법은 물질적인 대상을 파악하기에 알맞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요소를 모두 부정하는 결과만을 낳는다. 주체적 상황을 무시해 버리면, 몸은 곧 물질적이고 유기적인 연구 대상으로 밖에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불가사의한 면은 유물론의 결론만으로는 답변될 수 없다.

포이어바하와는 정반대로 버클리(Berkley)는 정신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였다. 버클리의 사상은 현실 전체를 정신적인 측면에서 설명하려는 여러 입장들 중에서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물질의 존재를 부인하고 인간의 정신을 가시적인 세계의 중심으로 보기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버클리에 의하면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고, 정신(특히 하나님과 인간의 정신)만이 존재한다. 존재란 무엇이 인간에 의해 지각된다는 뜻이다. 버클리는 먼저 나의 밖에 존재한다고 하는 소위 '외재성'(外在性)의 관념이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외부 세계를 듣고 보는 행위를 촉감이나 촉감의 예측으로 환원해 버린다. 그에 의하면 처음 보기에는 인간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사물은 실제로 인간 자신의 경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몸의 현상은 곧 정신에 의존해 있다. 모든 감각적인 사물은 관념이다. 이 관념은 오직 정신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물의 존재는 자각되는 데 있다. 지각된 현상의 배후에 본체가 있을 수 없다.

물론 사물은 나 개인을 떠나 존재하지만, 그 때에도 궁극적으로는 다른 정신 (하나님의 정신) 안에서 존재한다. 존재는 다같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현존의 상징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것은 무엇이나 만물 안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자연은 보편적인 상징의 성격을 띤다. 이것을 버클리는 유물론과 무신론의 반증(反證)으로 보았다. 버클리는 몸의 존재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단지 그에게는 몸이 정신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버클리는 인간이 위치해 있는 세계는 결코 대상적으로 만들 수 없는 지평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물질적인 세계에 정신적인 성격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값진 결론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물질을 정신으로 환원할 수 있는가? 그는 몸을 너무나 정신적인 것의 측면으로 보게 되어, 이를 대상이나 본체로 생각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의 배후에는 사물과 사물의 관계가 임의적인 관계에 불과하다는 유명론(唯名論)이 깔려 있다. 인간의 존재가 눈앞에 있는 물질적인 대상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측면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사물도 완전히 정신(언어와 기호)으로만 환원할 수 없다. 언어와 기호는 우연적이거나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시하는 사물에 본질적으로 속해 있다. 그러므로 몸은 정신적인 영역 안에서 증발될 수 없다.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유심론도 먼저 이원성을 전제하고 그 후에 한 측면을 다른 측면으로 환원하려고 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서는 전반적으로 인간을 통일체, 즉 전인으로 이해한다. 구약성서에서 영혼을 일컫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원래 호흡과 관련된 말이다(창 2:7). 영혼은 생명력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영혼은 생명력에만 국한되지 않고, 감정과 정서의 소재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에서 영혼이 순전히 정신적으로만 이해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곧 영혼이다. 영혼은 전 인격을 뜻하기도 하고, 시체를 뜻하기도 한다. 인간은 영혼으로 인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영혼이고 동시에 몸(바사르)이다. 인간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합성물이 아니다. 몸은 하나님과 마주하는 인간의 존재, 인간과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의 일시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몸도 하나님을 갈망하는 의미에서 영혼이기도 하다(시 63:1, 84:3).

신약성서에서도 특히 바울이 몸(소마)을 말할 때마다, 그것은 전인을 뜻한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이 곧 몸이다. 육(사르크스)은 인간의 육체성에 매여 있는 죄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죄에서의 해방은 육에서의 해방을 뜻한다. 그러나 바울은 헬레니즘의 이원론보다는 구약성서의 노선에 더 가까이 서 있다. 육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비추어 본 인간의 허무성을 말한다. 육은 영혼이나 몸과 대칭되는 악한 죄성을 갖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본질을 표시할 때에 신약성서가 사용하는 단어는 프뉴마(영)인데, 이것은 인간 자신의 특징적인 면을 나타내기보다는 단순히 인간의 영 혹은 인간을 뜻한다. 영혼(푸시케)이라는 단어도 몸과 대립되는 의미를 갖지 않고, 히브리어의 네페쉬처럼 전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성서는 전반적으로 헬레니즘의 인간이해와는 달리 인간을 전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전인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전적으로 살고, 전적으로 죽으며, 전적으로 부활한다.

현대사상에서도 이원론의 모델(영혼과 몸, 정신과학과 자연과학, 주체성과 객관성)은 문제시되고 있다. 영혼과 몸은 모델로 인정되지만, 독립적인 실체로 간주되지 않는다. 두 측면은 어떤 객관화의 방법을 택하는가, 즉 안에서 밖으로 접근하는가, 아니면 안에서 밖으로 접근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두 측면은 서로 의존해 있다. 영혼과 몸은 인간 생명의 단일성의 구성적이고 서로 속한 측면들이지, 서로에게로 환원될 수 있는 측면들이 아니다. 영혼은 인간의 육체성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고, 그 반대로 인간의 몸도 죽은 육체가 아니라 그 모든 생활양상에서 영혼의 작용을 받고 있다. 정신은 곧 전형적인 인간의 행동의 장(場)이요, 항상 변하며 상징을 통하여 가능한 인간과 주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영혼은 몸에 매여 있고, 몸은 영혼에 매여 있다. 영혼과 몸은 서로 관통하고 침투하며 일체를 이룬다.


3. 구원은 총체적(總體的)이다.

성서에서 구원은 치유로도 이해된다. 구원은 치유와 같은 뜻을 지닌다. 왜냐하면 치유는 구원의 구체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개인적 질병만이 아니라 사회적 질병도 치유하였다. 예수는 치유 행위, 즉 혼돈과 분열과 휩싸인 삶을 다시 완전하게 만드는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베풀었다. 야웨의 종 예수는 귀신에 들린 자를 해방함으로써 치유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였다(사 53:5).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만이 병자들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병자들도 예수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사람들에 의해 밀려들어갔던 구석진 곳과 그늘진 곳으로부터 나와 예수에게 접근하였다.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예수께 데려 왔으며,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막 1:32 이하).

예수의 치유는 특별한 지평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속한다. 모든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기적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창조세계로 오면, 고통의 세력들은 물러가고 고통을 당하던 피조물들은 건강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의 세균을 몰아내며, 생명의 씨앗을 퍼뜨린다. 하나님의 나라는 종교적 구원만이 아니라 육체적 건강도 가져온다. 병자 치유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육체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육체의 치유 현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혼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로 위축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분명히 영혼불멸을 가르치는 헬레니즘의 이원론 때문이다. 하지만 영혼불멸 사상이 교회 안으로 광범위하게 파급되고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끝까지 몸의 부활 신앙을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의 부활 때문이었다. 사도신경은 몸의 부활을 고백함으로써 영혼불멸 사상을 분명하게 배격한다. 여기서 영생은 몸의 부활을 통해 보증되는 것이지, 결코 영혼 불멸을 통해 보증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몸을 벗어난 영혼의 구원을 바라지 않고 몸의 구원, 즉 몸의 부활을 희망한다.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마지막 목표는 신체성(신령한 몸)이다.

비록 장차 우리의 신체적 구성은 완전히 달라질지라도, 구원의 신체적 특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입을 새 몸은 분명히 지금의 몸과 다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몸의 멸절되지 않고 새 몸을 덧입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몸으로 행한 모든 것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몸 안으로 수용되고 변화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열등한 것으로 비하하거나 언젠가 완전히 벗어버릴 일시적인 껍데기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려고 애쓰며, 몸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애쓴다. 왜냐하면 몸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이다(고전 16:9).

만약 몸의 치유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전령(傳令)이기 때문이다. 치유를 통해 우리는 부활의 열매를 미리 맛본다. 치유를 통해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느끼며, 생명을 다시 선물로 받았음을 느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치유는 부분적이고 제한적이다. 우리가 미리 맛보는 부활의 생명은 마지막 날에 가서야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다치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