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2003년 7월 16일, 현풍제일교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는 반면,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어느 본문이 더 정확한 것인가? 두 본문은 서로 대립하는가, 아니면 조화될 수 있는가? 마태복음의 본문으로부터 산상설교를 이해하려고 할 때, 먼저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마태복음만을 근거로 삼아 "심령이 가난한 자"를 정신적, 영적으로 가난한 자, 즉 겸손한 자,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로 이해한다. 하지만 유대인은 몸과 마음을 구분할 줄은 알았지만 이 둘을 서로 분리하지는 않았다. 유대인은 몸은 부유하지만 마음은 가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실제로, 즉 물질적으로도 가난한 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을 누가복음과 함께 읽어야 한다. 실로 모든 학자들은 누가복음이 마태복음보다 먼저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태복음보다 누가복음을 먼저 읽어야 한다. 하지만 누가복음을 읽을 때에도 가난을 단지 물질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자이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요, 물질적인 가난은 심령의 가난을 낳기 때문이다. 물론 마태복음의 '심령의 가난'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교만과 대립되어 있는 것 같고, 누가복음의 '가난'은 교회 안의 부자와 대립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대립시켜서는 안 되며, 또한 심령의 가난과 물질적인 가난을 대립시켜서도 안 된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은 가난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는 말이 아니다. 더욱이 이 말은 피안의 위로를 약속하는 말도 아니다. 이 말은 구약성서의 약속을 환기시킨다. 하나님은 권력을 박탈당한 자, 과부, 고아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신다(신 24:l4, 19-22, 27:19, 레 25:35).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옹호하신다(시 9:l1, 14:6, 22:25, 34:3, 37:21). 하나님은 약한 자를 티끌에서 끌어올리시고, 가난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끌어내신다(시 11:7). 이와 같은 약속을 근거로 삼아 예수도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다. 구약성서의 예언은 예수를 통해 성취되기 시작하였다(눅 4:18).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면, 부자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부자는 하나님의 소유인 물질을 독점하면서 가난한 자의 것을 가로채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자는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아니 물질을 더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물질 속에 안전과 행복, 구원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니 물질이 우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자는 불화와 죄로 인도하기 쉽다. 그래서 잠언은 말한다. "재산을 쌓아 놓고 다투며 사는 것보다 가난해도 야훼를 경외하며 사는 것이 낫다. 서로 미워하며 살진 쇠고기를 먹는 것보다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는 것이 낫다"(잠 15:16-17). 부자가 하나님에서 멀듯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과 가깝다. 가난한 자는 그가 다른 어떤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심령으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라가츠는 말한다. "세상은 부를 바라고 또 부 때문에 불행해진다. 세상은 그것 때문에 몰락한다. 심령의 가난이란 굶주리고 목마는 자들의 태도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고 겸손한 사람의 태도이다. 이것은 소유와 크게 대립된다. 우리는 단지 가난한 사람일 때에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때 우리는 가난해진다. 이것은 진정한 부유함으로 가는 길이며 불행에서 축복으로 가는 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유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세상 때문에 살지 않고 하나님 때문에 사는 사람은 무한히 가난해지고, 무한히 부유해진다.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소유를 포기해야 한다. 소유는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하게 만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가난하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부유함, 하나님의 생명과 자유가 밖으로 넘쳐 나오고, 축복이 울려나온다. 우리는 스스로 가난해지지만, 가난에서 하나님에게로 이르게 될 것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부유해질 것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율법적인 요구가 아니라 기쁜 소식, 구원의 소식이다. 이것은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음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결과적으로 가난한 삶을 촉구한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는 처음부터 가난을 부를 포기했다. 아니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부의 포기를 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회퍼는 말한다. "제자들은 무엇이나 부족한 것뿐이다. 그들은 철두철미 가난하다. 자기의 것이라고 할 만한 아무런 안전성도, 소유도 없다. 자기의 고향이라고 할 만한 한 치의 땅도 없다. 그들이 같이 살 만한 세상의 친지도 없다. 그들이 근거로 삼고 스스로 안심할 수 있는 자신의 정신적 능력도, 경험도, 지식도 없다. 예수 때문에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잃었다. 그들이 따라나섰을 때, 그들이 아직 부하게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함께 자기 자신까지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지금 그들은 가난하다. 그러나 그들은 복이 있는 자들이다. 예수를 위하여 철두철미 결핍과 절제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하기 때문이다.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가 십자가의 철저한 가난 속에서 값없이 그들에게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