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내를 버리지 말라

마 5:31-32

2003년 12월 10일, 현풍제일교회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우리 나라의 이혼율이 유럽의 선진국들을 앞지를 만큼 급증하고 있다. 이혼하는 당사자들의 아픔도 물론 크겠지만, 자녀들과 가족들의 아픔은 얼마나 크겠는가? 예전에는 자녀 때문에 부모가 참고 살았는데, 요즘 세태로는 이혼하는 부모가 자녀를 서로 떠맡지 않으려고 싸우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혼은 이제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교회도 껄끄러운 문제라고 하여 이혼 문제 대해 계속 침묵하거나 수수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이혼은 세상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되고 있다. 교회는 아름답고 든든한 부부 관계의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할뿐만 아니라, 이혼의 위험을 미리 예방하고 이혼한 교인들의 아픔을 치료하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오늘은 이혼 문제에 대해 예수가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혼에 관한 예수의 입장은 오늘의 짧은 말씀보다는 마태복음 19장 3-9절의 말씀을 통해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나아와,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질문하자, 예수는 이에 대답하길,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말을 인용하여 반박하길,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고 하자,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답하였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라"는 말씀도 남자 입장에서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를 말하고 있듯이, 오늘의 본문도 실로 남자가 어떤 이유로 여자를 버릴 수 있는지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음행한 연고가 있다면, 여자를 버릴 수 있다"는 말은  신명기 24장 1-4절을 배경을 삼고 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오늘의 본문은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버림을 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간음으로 간주하여 금지하므로, 이혼을 당한 여자가 재혼할 수 있는 가능성도 차단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신명기는 이혼한 여자가 재혼할 권리까지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내가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남편과 재혼한 후에 다시 본 남편과 재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인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본문과 신명기는 다같이 여자를 버릴 수 있는 사유를 말한다. 오늘의 본문은 여자를 버릴 수 있는 이유를 '음행'이라고 분명히 말하지만, 신명기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다소 모호하게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 문장의 해석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랍비 삼마이(Shammai)는 이를 '명백하게 드러나는 결혼상의 수치'라고 엄격하게 이해했지만, 랍비 힐렐(Hillel)은 이를 '일반적으로 창피스러운 일'이라고 넓게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여자가 음식을 잘못하거나 음식을 태우거나 여자가 예쁘지 않은 것도 이혼의 사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참으로 옛날 우리 나라의 칠거지악(七去之惡)보다 더 여자에게 불리하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아내를 내어버릴 수 있는지를 질문하면서, 어떻게 하면 여자를 내버리고 다른 아내와 다시 결혼할 수 있는지, 그 묘안을 궁리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예수는 여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려고 한다. 본문에서 예수는 "음행한 연고가 없으면, 결코 여자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로써 예수는 결혼을 위태롭게 만드는 여자의 명백한 성적인 음행만이 이혼의 사유가 된다고 말함으로써, 어떻게 하면 여자의 약점을 잡아서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을지를 궁리하는 남자의 무절제한 탐욕에 제동을 건다,

그런데 예수는 여자의 음행에 한해서는 이혼을 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제한적으로 이혼을 허락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의 태도는 조금, 아니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서 예수는 결혼이 독점적이며 영속적인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밝힌다."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그런데도 모세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백성의 마음이 완악하였기 때문이며, 그래서 본래는 여자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 하니라."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신 것은 마지못한 양보일 뿐이라는 뜻이다. 비록 하나님이 음행을 이혼의 사유로 인정하셨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본래적인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므로, 명백한 간음에 한하여 하나님이 여자를 버릴 수 있도록 양보하셨다는 말이다. 실로 사람의 본능에서 볼 때, 간음하고 방탕한 여자와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어질거나 착한 성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지만 본래 하나님은 당신이 짝지어 주신 부부가 서로 나누어지지 않기를 바라셨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여러 차례 부정한 아내를 용납할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은 남편과의 정절을 수없이 배반한 부정한 아내를 용납하기를 원하시듯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을 무한히 용서하시기를 바라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부정한 아내도 버리지 말고 끝까지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하기를 원하신다. 비록 정당한 이혼의 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혼은 다만 비극적인 결과일 따름이다.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는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남자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하지만 "남자가 함부로 여자를 버리면, 결국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함으로써 여자를 간음하게 만든다"고 말함으로써, 여자에 대한 남자의 막중한 책임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본문은 "이혼을 당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남자가 이혼을 당한 여자와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전달하려고 하기보다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쉽게 재혼할 수 있으므로 여자를 버려도 부담이 되지 않는다 생각하면서, 이혼을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말씀은 여자의 입장을 최대한 보호하고 여성의 권리를 지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당시에 여자는 남자의 물건이나 소유물과 다름이 없었고,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쉽게 얻거나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본문이 여자를 보호하는 것보다는 남자의 권리를 확정하고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하더라도(슈트렉커), 남자의 권리를 확정하고 제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분명히 여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기여한다.

예수는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혼인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으며, 남자가 이혼을 요구할 수 없음을 가르쳤다. 결혼은 오직 일회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뜻이요, 명령이었다. 설령 인간이 부족하거나 상황의 악화로 이혼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이유로도 이혼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갈등과 분열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이다. 하나님의 은혜라면, 그 어떤 장벽도 결국 넘어설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죄악이라면, 아무리 좋은 것도 쉽게 망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가가 중요하다. 의지가 부족하고 상황이 나쁘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늘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결혼의 영속성과 가정의 신성함은 아무런 노력이 없이 그저 유지되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나이다. 당신의 무한하신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의 가정을 지켜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