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보복하지 말라

마 5:38-42

       2004년 1월 7일, 현풍제일교회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인류가 발견한 가장 오래된 법전인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93년-1750년)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명하였으며, 그리스와 로마법도 그렇다. 이런 관례는 비단 이방인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성서도 가해자에게 피해와 동일한 형벌을 명하고 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4-25).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레 24:20).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신 19:21). 정확하고 동일한 보복을 명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의를 행하는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구체적으로 말함으로써 정의를 세우기 위함이며, 그와 동시에 가해자에게 정확한 복수를 요구함으로써 지나친 복수를 금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조항은 항상 문자 그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맞아서 눈이 상했다고 하자. 그럴 때에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똑같은 상처를 입힌다면, 물론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겠지만, 신체적인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이럴 때에는 피해자가 차라리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서도 신체적인 보복 대신에 노예를 줄 것을 명하고 있다.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을 것이며, 그 남종의 한 이나 여종의 한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 대신에 그를 놓을지니라"(출 21:26-27) 예수 시대에도 손해와 동일한 형벌은 손해 배상금으로 대치되었다. 예수 시대에도 분명히 이런 관행이 널리 펴졌던 것 같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명령은 원래 사적인 보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보복, 즉 공적인 재판을 위한 것이었다. 율법은 개인적인 복수를 금하였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하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정확한 형벌의 범위를 사적인 관계로 넓혔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법은 원래 개인적인 복수를 금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지만, 결국 개인적인 복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예수는 복수 포기를 요구했다. "정의로운 복수와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다. 인간은 오직 사랑에 근거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예수의 가르침이었다. 예수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상대방의 폭력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물론 예수가 악을 관용하고 묵인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예수가 죄와 사탄과 타협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예수는 분명히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했다. 예수는 "좋은 게 좋다"고 말함으로써 옳고 그름의 모든 잣대를 없애 버리지 않았으며, "힘없는 사람이 더 큰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참는 게 현명하다."고 말함으로써 세속적인 처세술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예수의 제자가 걸어 갈 길은 세상 사람과는 분명히 다른 것임을 예수는 가르쳤다. 그 길은 어떤 길인가? 그것은 곧 사랑의 길이다. 예수의 제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지 않으며, 악한 이웃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자신의 이익보다 남의 이익을 더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기준은 정의를 위한 정의가 아니라 회복된 인간 관계이어야 한다(귈리히). 예수의 제자는 자신의 권리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본회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이 말은 분쟁 중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폭력과 관련된 말이다.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라." 이 말은 소송과 관련된 말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속옷과 겉옷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도 주라." 이 말은 강도 행위와 관련된 말이다.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이 말은 외교관이나 로마 군인의 요구와 관련되어 있는 말이다.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는 말은 구걸하는 자와 관련되어 있는 말이고,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라"는 말은 강도의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말이다. 이런 요구들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는가? 아니 우리는 이런 요구들을 과연 실천할 수 있는가?

물론 이런 요구들을 문자대로 이해하고, 기계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 만약 한 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뺨까지 갖다 댄다면, 가해자의 더 큰 폭력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보복 포기를 통해 더 큰 대응 폭력, 즉 폭력의 악순환을 제거하려는 예수의 의도가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는 장치로 변질될 수 있다. 빌라도 앞에 선 예수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예수가 말하였다고 해서, 만약 누가 먼저 왼편 뺨을 때린다면, 오른편 뺨을 돌려 댈 필요도 없이 그를 세게 때려도 좋다"라거나, "만약 누가 배를 걷어차면, 그 때에는 가만 두지 않겠다."고 오해해서도 안 된다. 누가 대낮에 모든 옷을 다 던져주고 벌거벗고 다닐 수 있겠는가? 누가 남의 요구와 강요를 한없이 들어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악에 굴복하는 일, 아니 악에 길들여지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까? 이런 요구들은 노예처럼 굽실거리는 유약한 삶(니체)을 조장하지 않을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요구들이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이라고 비판하고, 배척하였다. 하지만 예수의 진실한 제자들, 예컨대 성 프랜시스와 톨스토이와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만델라와 같은 사람들은 이 길을 갔고, 결과적으로 승리했다. 그들은 비폭력적인 저항을 통해 폭력을 이겼고, 사랑의 힘으로 악을 이겼다. 참된 보복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데 있다.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을 중지할 때, 비로소 악은 자취를 감춘다. 고난도 피하지 않고 당할 때, 생기를 잃는다. 자발적인 수난은 악보다 강하기 때문에 곧 악인의 죽음을 뜻한다. 예수의 자발적인 수난은 곧 이를 보여준다. 예수의 수난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악을 이긴 사건이다. 십자가에서 악은 보복되고, 패배를 당했다(본회퍼). 그러므로 보복하지 말라. 보복은 오직 하나님의 일이다. 보복은 악을 끊지도 못하고, 악을 이기지도 못한다. 만약 보복하려거든, 오직 사랑으로 보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