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원수를 사랑하라

마 5:43-48

2004년 1월 14일, 현풍제일교회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리스도인은 별종의 인간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천사가 아니며, 더욱이 하나님도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분명히 달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이다. 비록 그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비상한 사람이다. 20세기에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독일 신학자 '본회퍼'만큼 그리스도인의 비범한 삶을 강조하고  실천한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 비범한 일, 비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비범함은 어디서 드러나는가? 본회퍼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원수사랑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는 말로 시작하여, 적극적인 원수 사랑을 명한다. 실로 구약성서도 원수 사랑을 가르친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 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출 23:4-5).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잠 25:21). 그래서 유대인이었던 바울도 잠언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 12:20)고 권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가? 스코트는 유대인들이 고의로 사랑의 대상을 좁혔다고 말한다. 즉 유대인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서 원수를 제외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다는 말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뻔뻔하게 곡해하였다는 것이다. 실로 구약성서에서 "원수를 미워하라"고 분명히 말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하지만 이방인들과 전쟁할 때, 유대인은 분명히 그들을 증오하고 그들의 멸망을 기원하였다. 그리고 시편에서도 종종 볼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서, 특히 억울하게 손해를 입을 경우에 하나님의 보응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한다. 이러한 예수의 요구는 누구보다 더 철저히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회개와 순종을 요구했다. 예수는 이웃사랑을 제한하는 모든 한계선을 철폐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에 그치지 않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했다. 그 이유로 예수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내세운다.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해와 비는 농사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창조의 은총이다. 자연 만물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지 않는 무차별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적 편애와 달리 창조적인 사랑이다. 인간의 사랑은 대상에 매여서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만을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사랑의 대상을 창조한다(루터).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행동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그리함으로써만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의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비범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리스도인의 의는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이방인의 사랑을 능가해야 한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온전할 수 있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도덕적 완전함이나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율법적 완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의 질적인 신분을 말한다(귈리히). 그리고 '온전함'이란 '전체적인 것', '나누어지지 않은 것'을 뜻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나누어지지 않은 온전한 사랑을 요구한다(슈바이처). 누가복음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고 말한다. '온전함'이란 모든 것을 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삶을 말한다.

원수사랑은 실천하기 너무 어려운 비현실적인 이상과 허무맹랑한 환상이 아닌가? 우리가 도달하기 너무 높은 봉우리가 아닌가? 예수는 결코 우리가 실현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예수는 말로만 가르치지 않고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용서를 빌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눅 23:24). 스데반도 자기를 돌로 쳐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행 7:60).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처럼 살고 죽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본회퍼의 말대로 나의 원수보다 사랑을 더 귀하게 생각할 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만일 증오로 가득 차서 질식한 지경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우리의 원수보다 더 심각한 괴로움과 더 중한 상처와 아픔을 가진 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는가? 원수가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가 대신하자! 이로 인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비방은 하나님과 원수에 대한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해 줄 것이다. 온갖 박해도 원수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할 것이다. 사랑은 적이 없다. 플러머(Plumm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이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이다." 원수보복은 세상 사람들의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들과 달라야 한다. 아니 그들보다 질적으로 뛰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