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은밀하게 구제하라

 마 6:1-4

  2004년 1월 21일, 현풍제일교회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지금까지 우리는 분노와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사랑에 관한 예수의 교훈을 배웠다. 화내지 않고, 음욕을 품지 않고, 맹세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비범한 삶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바리새인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도 보여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의 빛이 되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와 같은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마 5:16). 그리스도인의 삶은 빛처럼 세상에 뚜렷하게 보여야 한다.      

그런데 이제 예수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행하지 말라. 은밀하게 구제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경우에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고 말하다가, 다른 경우에는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헛갈리지 않는가?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 않는가? 명백한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 보여야 하고 어떤 경우에 보이지 말아야 하는가? 브루스(Bruce)는 "우리가 감추고 싶을 때에는 나타내야 하며, 나타내고 싶을 때에는 감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예수는 우리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경고했다는 것이다. 본회퍼(Bonhoeffer)도 여기서 아무런 반성도 없이 우리의 의지와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경고한다. 하지만 스코트(Scott)는 드러나야 할 도덕적 의와 드러나지 않아야 할 신앙적 의를 구분한다. 우리의 도덕적인 선행은 드러나야 하지만, 우리의 신앙적 헌신은 감추어져야 한다. 하지만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기도와 금식과 함께 구제는 유대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권장되고 칭찬을 받는 행위였다. 어떤 랍비(Elasa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온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려는 자와 같다. 왜냐하면 자선과 정의를 행하는 자는 지구를 야훼의 사랑으로 채우기 때문이다.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확실히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에 속한다. 인간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는 확실히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에 속하지 않는다. 구제는 그 안에 있는 사랑의 척도에 따라 보답을 받는다." 유대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공동체 전체가 일정한 액수를 부담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공동적인 방식이 있는가 하면, 개인이 자원해서 기부하는 자발적 방식도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구제할 때도, 유대인은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려고 했다. 유대인은 대중 앞에서 가난한 사람을 모독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 때에도 가급적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믿었다. 유대인도 받는 자가 누구로부터 받는지 모르고 주는 자도 누구에게 주는지 모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믿었다.

 예수도 구제 자체를 금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런 행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엄격하게 경고하였을 따름이다. 이 말은 개인의 자발적인 구제에 관한 것이다.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여기서 '외식하는 자'란 배우처럼 연기하는 자, 속마음과 달리 겉으로 연극하는 자를 말한다. 여기서 외식하는 자는 가난한 자를 위해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제하는 듯이 크게 떠벌리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즉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 구제한다. 굉장히 많은 돈을 기부할 경우에는 이를 알리기 위해 사람들이 나팔을 불었다고도 한다. 혹은 구제하는 사람이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 행위를 알리려고 직접 크게 나팔을 불렀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이 말을 사실대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의 풍자라고 본다. 즉 나팔을 부는 행위는 구제 행위가 남에 보이도록 크게 떠벌리는 행동을 뜻한다고 본다. 여하튼 예수는 구제를 통해 칭찬과 갈채를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유치한 욕망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예수는 "외식적으로 구제하는 자는 이미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무슨 보상을 받았는가? 그는 다른 사람들의 공개적인 칭찬을 받거나 자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축함으로써, 이미 보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하나님에게 받을 상이 없다. 여기서 예수는 공개적인 구제 행위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계획적이고 계산적인 구제 행위도 비판한다. 남의 칭찬을 받으려고 하거나 심리적인 위안을 얻으려고 구제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든 자신이든, 사람을 의식하면서 구제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구제를 하는 것만이 참다운 선행이다. 그래서 예수는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구제하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신을 잊을 정도로, 자신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게 구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구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 어떤 상급도 기대하지 말고, 오직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구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구제에는 아무런 보상이 따라오지 않는가? 우리가 보상을 바라고 구제해서는 안 되지만, 구제에는 분명히 보상이 따른다. 예수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말한다. 시편은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시 112:9),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 37:25-26)",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시 41:1-2)고 말한다. 잠언은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4-25)고 말하며,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잠 28:27)고 말한다. 구약성서는 주로 이 땅에서 받을 보상을 말하고, 신약성서는 주로 내세에 받을 보상을 말한다. 하지만 신약성서도 이 땅의 보상을 부인하지 않는다. 신약성서는 이 세상의 보상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 나라의 보상도 약속한다. 그러므로 은밀하게 구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