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마 5:4 

2003년 7월 23일, 현풍제일교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이 말하는 '애통'은 슬픔 중에서도 가장 슬픈 상태를 나타낸다. 여기서 애통은 단지 정신적인 애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윤리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온갖 괴로운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언제 통곡하는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할 때에, 특히 사랑하는 가족이 죽을 때에 창자를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일어난다. 억울하게 박해를 당할 때에 우리는 가슴을 치고 통곡한다. 더욱이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에 의해 모독과 조롱을 당하는 일로 매우 괴로워한다. 정든 고향 땅이나 하나님을 예배하던 거룩한 땅에서 쫓겨나는 일도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하나님과 이웃에게 범한 죄와 그 결과도 우리를 애통케 한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찾아오는 온갖 환난들은 우리를 얼마나 애통케 하는가!

하지만 애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애통은 극복되어야 하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고난 중에서도 소망 안에서 즐거워한다. 누가 애통을 즐기겠는가? 누가 애통하는 자를 보고 감히 행복하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고통을 찬양하거나 고통을 즐기려는 심리와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메시아 시대의 위로를 전달한다. 메시아가 오게 되면, 온갖 고통과 억압은 사라지고 고통 속에 있던 자들이 기쁨을 얻게 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므로 이제 애통하는 자는 그 나라에서 웃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고난 가운데 있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전달한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2).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으로 위로한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19-22).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과 함께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을 바라보면서, 박해를 받던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한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하지만 아직 우리는 첫 하늘과 옛 땅에 살고 있다. 처음 것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더라도, 비록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고 기뻐한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는 아직 다 오지 않았다. 죄악과 원수는 아직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다. 악의 세력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 중에서는 항상 기뻐하지만, 이 세상 중에서는 항상 애통해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스코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모두 기쁨과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항상 얼굴에 웃음을 띠고 늘 명랑하고 즐거워야 한다고 상상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얼마나 비성경적인가? 이것은 맞지 않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웃는 자들에게 화를 선언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들은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 세상의 악과 고난을 보며 슬퍼하며 울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많이 울어야 한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 때문에 "탄식하며 밤마다 눈물로 침상과 요를 적셨다(시 6:6). 예수는 곧 멸망할 조국을 바라보며 심히 울었다(눅 19:41-42). 세리는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하며 통곡하였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행 20:31). 인류의 죄와 불행 때문에 애통해하는 것,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 믿음이 연약하고 불성실한 신도들을 위해 애통하는 것을 웨슬리는 '복된 애통'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울면서 기도해야 하고, 울면서 씨를 뿌려야 한다. 해산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로가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고통을 느끼는 자만이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오직 고통을 겪는 자만이 기쁨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오직 십자가를 지고 죽는 자만이 기쁨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직은 웃지 말고 울자. 많이 울자. 그런 자가 복이 있다고 예수는 말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