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진실하게 기도하라

마 6:5-8

 2004년 1월 21일, 현풍제일교회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 아시느니라.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크게 떠벌리며 구제하지 말라"고 명한 예수는 이어서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고 명한다. 구제와 마찬가지로 기도도 유대교에서 중요한 경건 행위였다. 유대인들은 매일 세 번, 아침 9시(제3시), 12시(제6시), 오후 3시(제9시)에 의무적으로 기도하였으며, 기도할 때에 성전의 지성소를 바라보고 기도하였다. 본문이 '너희'라는 2인칭 복수를 쓰는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공동으로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왜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였는가?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려면, 어쩔 수 없이 바깥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긴다. 그러므로 밖에서 선 채로 기도 드리는 것은 그 당시 널리 퍼진 관습이었다.

예수는 거리에서 기도하는 행위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수가 비판하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즉 사람의 칭찬을 들으려고 기도하는 행위다. 집안에서,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할 수 있는데도, 굳이 바깥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욱이 큰 거리 어귀에서 남보란 듯이, 회당이나 거리에서 손을 높이 쳐들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기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공개적으로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이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고 공개적으로, 과시적으로 기도하였으므로, 이미 그들이 원하는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응답과 상급을 받을 것이 더 이상 없다. 이처럼 그들의 경건 행위에는 교만이 숨어 있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예수는 대중에게서 물러나서 조용히 기도할 것을 명했다. 예수도 홀로 산에서 기도한 적이 많았다(마 14:23). 물론 예수가 공동 기도를 금하지 않고 오히려 권장하였다. 예수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마 18: 19)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예수는 꼭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기를 명한 것은 아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인간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에게만 전심으로 기도하라는 말이다. 공동 기도나 대표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기도나 대중이 듣기를 좋아하는 기도를 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대중 기도는 위선적인 기도가 되기 쉽다. 하지만 조용한 장소에서 홀로, 자유롭게 기도할 때, 우리는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며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은 은밀한 기도를 듣고 계시며, 기도에 응답하신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과 그 열매를 심판하실 때, 우리의 기도의 행위에 대해서도 마땅한 상급을 주신다. 올바른 기도는 종말론적인 성취의 약속을 받는다(슈트렉커). 하지만 하나님이 이 땅에서 갚아주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골방은 대개 보물을 보관하는 저장소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이미 보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타스커). 기도의 상급은 너무나 많아서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하나님이 기도하는 자를 위로하실 뿐 아니라 기도하는 자의 마음 안으로 친히 들어와 거하신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실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것, 즉 성령도 주신다. 성령과 함께 따라오는 은혜는 매우 풍성하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기도할 때에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기도하는 것이 바리새인의 외식이라면,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는 것은 이방인의 어리석음이다. 외식이 기도의 목적을 왜곡한다면,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기도의 본질을 왜곡한다(스코트). 여기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기도 내용을 반복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예수도 반복해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던가(눅 22:44)!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은 "이방인처럼 수다스럽게 공허한 말로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방인들은 많은 신들의 이름을 들먹이거나 마술적인 주문을 많이 외어야 신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자 세네카도 "많은 말로 기도하는 것은 신들을 지치게 한다"고 비판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과 멀면서도 입술로만 많은 기도를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기도는 아무런 응답도 받을 수 없다. 실제로 믿음이 없거나 약한 사람들은 대개 중언부언하거나 공연히 소리치거나 길게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도와 이성을 뛰어 넘어서 자녀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는 구하기 전에 이미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진실하게 기도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기도의 양이 아니라 기도의 질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외형적의 말의 성찬(미사여구)이 아니라 가난하고 진실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 아시느니라." 자녀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미리 다 아시는데, 굳이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는가?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알려줄 때까지 우리의 사정을 전혀 모르시는 무지한 분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로 아뢸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사정을 돌아보시는 무심한 분도 아니다. 그리고 칼빈의 말대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강권하는 목적을 갖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을 일깨우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을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에게 맡기게 한다. 루터의 말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알리는 것보다 우리 자신에게 알리는 것이 더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와 사귐을 나누기를 원하시면,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기를 원하시며,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더 풍성한 은혜를 주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살전 5:7). 키에르케고르는 "나는 죽지 않으려고 숨을 쉰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고 말했다. 영적으로 죽지 않으려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