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 6:9

2004년 2월 4일, 현풍제일교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앞에서 예수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여기서 먼저 예수는 잘못된 기도의 방식을 나무랐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가식적으로 기도해서는 안 되며, 이방인처럼 많은 말로 중언부언하며 기도해서도 안 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예수는 참된 기도의 방식을 가르쳤다. 우리는 은밀하게,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가운데서 기도해야 한다. 예수는 이제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주기도문은 예수가 직접 가르친 기도이므로 가장 높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좋은 기도문이다. 물론 다른 기도문들은 모두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주기도문의 내용을 갖거나 이를 포함하지 않는 다른 기도문들은 좋은 기도라고 볼 수 없다(루터). 주기도문은 모든 기도문의 모범이요, 모든 기도문의 원형이다. 주기도문은 단지 기도의 시범만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가 가르친 것과 같이 기도해야 한다(본회퍼).

 (1)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하늘이란 무엇인가? 성서에서 하늘은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로 하늘은 새가 날아다니고 별들이 존재하는 창조된 실제 공간을 의미한다. 둘째로 하늘은 창조된 공간이지만 사람으로서는 볼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공간을 의미한다. 셋째로 하늘은 천사들과 하나님이 거하시는 초월적인 영역을 의미한다(몰트만). 하나님은 바로 이 셋째 영역에 계신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에게는 한계선이 없다. 하나님은 파악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시고, 영원하시며,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능가하신다. 하나님은 매일 아침마다 언제나 새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은 하늘의 보좌에 계신다(바르트).

하지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여, 우리가 굳이 하늘을 쳐다볼 필요는 없다. 물론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을 바라보고, 두 손을 높이 쳐들고 기도하는 것도 좋은 자세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늘 저 높은 곳에 계신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세계관에 익숙한 사람들의 생각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저 푸른 창공, 까마득히 높은 우주의 그 어떤 장소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초월하시므로, 우주의 특정한 공간을 하나님의 영역으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로서 이 세계를 무한히 초월해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계를 완성하시기 위해 이 세계 안으로 들어오시고, 이 세계 안에 거하신다(몰트만). 하나님은 매 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2)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신다. 고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신을 아버지로 생각하였다. 그리스 사람은 제우스를 아버지라고 불렀고, 근동 사람들도 하나님을 왕과 아버지라고 불렀다. 유대인들도 드물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사 63:16, 64:7, 렘 31:20). 랍비들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다(18번 기도). 그러나 예수는 아람어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이 말은 어린이가 부모에게 쓰는 말로서 친밀한 신뢰의 관계를 나타낸다. 예수 이전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이렇게 친숙한 말로 부르진 않았다. 예수는 기도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종교의 전통보다 더 깊은 의미를 드러낸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창조하시고 돌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 안에서 또한 우리의 아버지도 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다(롬 8:15, 갈 4:6).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히 초월하시는 하나님이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 아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너무에게 가까우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아빠'는 우리를 초월해 계시면서도 우리에게 친근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멀리,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이 땅에도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처럼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이 계시고, 우리를 항상 돌보신다. 그러므로 아버지 혹은 아빠라는 말은 매우 친숙하고 달콤하고 깊고 진심이 어린 말이다(루터). 이 말은 아버지 하나님 대한 자녀의 절대적인 신뢰를 드러낸다.

오늘날 어떤 이들, 예를 들면, 여성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행을 가부장 시대의 찌꺼기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가급적 아버지라는 말을 버리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이라고 부르거나, 중성적인 용어인 인도자, 구원자, 친구 등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한다. 혹은 어떤 이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부르기를 주장한다. 물론 구약성서의 하나님 아버지는 분명히 가부장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하지만 예수의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가부장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예수의 하나님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이 자비로우신 분이다. 이로써 예수는 가부장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를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몰트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별과 인종 등 모든 차이와 차별을 넘어서는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다.    

(3)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 이것은 주기도문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드리는 기도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나 개인의 아버지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와 자매가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며, 서로 서로 묶여 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계속 '우리'의 입장에서 기도한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우리가 용서하게 하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4) 우리는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그 어떤 막연한 운명이나 팔자를 믿고, 그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바위나 나무의 신통력을 믿고, 그것들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와 동일한 피조물인 사람들의 권세를 믿고, 그들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한다. 기도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누구를 믿으며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며, 그 이름을 분명히 불러야 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믿고, 그분에게 기도한다. 그분은 우리와 동떨어진 곳에 계시지만 또한 우리 가까이 계신다. 아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외하면서, 그리고 낮은 곳에 오신 그분의 사랑하심을 신뢰하면서,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를 안고 그분에게 나아간다. 우리의 사정을 미리 아시는 그분에게, 우리를 돌보시는 그분에게 우리의 사정을 고한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가 가르친 참된 기도의 참된 시작이다. 출발이 중요하다. 출발이 잘못되면, 끝도 잘못된다. 참되고 바르게 기도하자! 하나님을 바르게 부르고, 참되게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