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죄를 사하여 주소서

마 6:12

2004년 3월 17일, 현풍제일교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 오늘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청원' 중에서 두 번째 청원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청원을 헬라어로 옮기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옵소서"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람에게 빚진 것처럼 하나님에게도 빚졌다는 말인가?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 돈이나 물질을 거래한 적이 없다. "우리가 빚을 졌다"는 말은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죄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빚'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웃에게 진 빚은 당연히 되돌려 주어야 하듯이, 우리가 이웃에게 범한 죄도 당연히 용서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죄는 단지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이웃에게 죄를 범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웃에게 행한 범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행위가 되기 때문이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웃의 용서가 필요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을 여러 가지로 둘러 표현한다. 하나님은 병을 고쳐 주신다(시 103:3). 하나님은 죄를 멀리 옮기신다(시 103:12).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등에 지신다(사 38:17). 하나님은 죄를 씻으신다(사 43:25).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다. 예수도 사죄의 권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막 2:1) 실로 많은 죄인들을 용서하였으며(막 2:5, 눅 7:48), 제자들도 서로 용서하기를 원하였다(마 6:12).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할 허물이 많은 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의 용서를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이웃도 용서해야 한다.  

(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은 마치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전제 조건인 것처럼 들린다. 바로 그 아래의 구절도 그렇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4-15). 구약의 외경(시락서 28:2)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라. 그러면 네가 용서를 구할 때에 네 죄를 용서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용서를 조건으로 삼아서 용서하신다는 말인가? 바로 앞 구절(5:43-48)은 인간이 하나님을 본받을 것을 가르치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을 두루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이웃과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여기서는 순서가 거꾸로 되어,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본받는 것처럼 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하기 위한 전제 조건을 달았는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우리가 용서받을 권리를 받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용서를 이미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은 자는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서, 그 반사 작용으로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밖에 없고, 또 실제로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는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놈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않겠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웃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선행적이고 무조건적이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이웃에게는 작은 은혜조차 베풀기를 거부한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이와 같은 엄중한 교훈을 우리는 예수가 가르친 한 비유에서 다시금 들을 수 있다. 마태복음 18장 21-35절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잘못을 용서받아 놓고도 이웃의 작은 잘못조차 용서하지 못한 한 종의 옹졸함을 폭로한다.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하지 않았다. 50만원의 빚을 탕감받는 자가 남의 빚은 단 l원도 탕감해 주지 않았다는 셈이다. 이를 본 주인은 매정한 종을 엄중히 책망하고, 빚탕감을 취소하고 말았다. 이처럼 이웃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는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사람으로 등장할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마 5:7)는 말을 뒤집으면,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이다"는 말이 된다.

(3) 심판의 날에 예수는 "우리가 얼마나 죄를 범했는가?"하고 묻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답게 살았는가?"를 묻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지은 죄가 아무리 크다고 생각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지은 잘못에 비하면, 무한히 가볍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매우 큰 죄를 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공로도 아니고, 도덕적인 노력이나 일종의 미덕도 아니다. 인간의 용서는 아름다운 일이요, 자연스럽기까지 한 일이다. 우리에게 죄를 지은 가엾은 피조물을 하나님의 용서의 빛 안에서 보기로 하자. 우리가 받은 모욕 안에 푹 박혀 지내지 말자(칼 바르트).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자. 그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도 기꺼이 용서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