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마 5:5

2003년 7월 30일, 현풍제일교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는 복을 누린다"는 말씀은 시편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11). "온유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람들의 견해가 조금씩 달라서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웨슬리는 '온유'가 극단을 피하는 마음, 인간 정서의 균형을 잃지 않는 상태라고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는 태도이고, 나와의 관계에서 온유는 인내하거나 자족하는 마음이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유는 선만이 아니라 악에 대해서도 부드러운 태도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슈바이쳐(E.Schweizer)는 '온유'가 분노와 잔인성 혹은 적대감을 갖지 않는, 친절하고 자비한 행동을 뜻한다고 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권리까지도 모두 포기한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책망을 받아도 침묵한다. 누가 폭행을 가해도, 참는다. 누가 내쫓아도, 가만히 쫓겨간다. 자신의 권익을 위해 재판을 걸 줄도 모른다. 그는 본래 자신의 권익을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권익은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가츠는 온유함이 여성적인 부드러움처럼 오해되는 것을 경계한다. 온유는 단순한 굴복, 침묵과 감수, 인내, 권리를 위한 투쟁의 결여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식으로 부드럽지 않았다. 그는 한 남성이요, 투사요, 영웅이었다. 그는 투쟁하고 반대하고 분노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도 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 10:34). 그러므로 라가츠는 예수의 정신을 고려해서 다르게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온유한 사람은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 사람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견해들이 모두 일리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헬라어 원어'프라우스'라는 단어를 통해 뜻을 헤아려 보려고 한다. '온유하다'는 것은 신축성이 있고, 침착하고, 성내지 않고, 관용성이 있고, 부드럽고, 인내력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온유와 반대되는 상태는 사납고, 난폭하고, 격정적이고, 조급하고, 경솔함이다. 마태복음에서 온유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려고 하지 않고 항상 섬길 자세를 갖춘 사람, 모든 희망을 하나님에게 두는 힘없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는 바로 온유한 사람의 모범으로 나타난다. 마태복음 21장 5절은 스가랴 9장 9절을 인용하여 예수의 온유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시온의 딸들에게 알려라. 네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그는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타시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세례 요한도 예수를 온유한 어린양으로 선언하였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온유는 단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예수의 모습만이 아니다. 예수도 스스로 온유하다고 말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그런데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로 들린다. 실제로 땅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포악한 사람들이다. 대개 권력자들, 부자들은 거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는 반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땅 한 평조차 소유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한다. 흔한 말로 가난한 사람은 송곳 하나도 박을 땅이 없다. 그렇다면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거짓말인가? 예수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말한 땅은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약속의 땅, 즉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한다. 즉 예수가 약속한 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는, 볼 수 없고 처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땅은 이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실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어린이와 같이 온유한 자만이 소유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수가 약속하는 땅은 힘있는 사람들이 쟁취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처럼 이 땅에서 힘이 없어서 억눌리고 침묵하며 살아야 하는, 그래서 하나님만을 전적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하지만 예수는 온유한 사람에게 단지 피안이나 미래의 세계만을 약속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왔고, 그래서 우리 가운데 이미 왔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힘있게 활동하고 있고, 우리 가운데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이 나라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세계도 확실히 포악한 존재보다는 연약하고 온유한 존재들이 훨씬 더 차지하고 있다. 이 땅에는 거대한 나무보다는 작은 풀이, 거구의 생물보다는 작은 생물이 훨씬 더 많이, 훨씬 더 넓게 분포되어 있다. 사자보다 양이 더 넓게, 더 많이 살고 있다. 거대한 몸집의 포악한 공룡은 모두 멸종했지만, 작은 생명체들은 이 세상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 십자가는 칼보다 강하고, 무력한 것은 강력한 것보다 강하다.    

하지만 예수의 약속은 옛 창조보다는 새 창조에 더 해당하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본회퍼의 말은 매우 적절하다. 폭력과 불의로 얻은 소유를 버리고 단념함으로써 온유하게 십자가에까지 도달하는 예수의 제자는 새 땅을 지배한다. 하나님은 땅을 버리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땅을 지으신 분이요, 땅 위에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분이다. 교회를 땅 위에 세우신 분도 그분이다. 그분은 이렇게 이 땅 위에 새 땅의 주춧돌 이미 세우셨다. 교회는 이 사실의 한 표시라고 할 것이다. 무력한 자들에게 한 토막의 땅이 이렇게 주어진 것이다. 골고다도 한 토막의 땅임은 틀림이 없다. 온유한 자들이 죽은 골고다에서 땅은 새 것이 되기를 시작했다.

이런 의미에서 온유는 예수를 뒤따르는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자세가 된다. 예수의 제자는 온유한 삶을 추구한다. 예수의 제자는 평화를 위해 스스로 고난을 받음으로써 폭력의 뿌리를 잘라버린다. 사랑으로 원수를 이길 뿐만 아니라, 원수를 친구로 만든다. 예수의 제자는 사랑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지배할 것임을 믿는다. 비록 그리스도인은 아무 것도 없는 자라고 할지라도,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다(고후 6:10).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만물이 다 우리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물도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다"(고전 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