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마 6:19-24

2004년 5월 26일, 현풍제일교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는 우리에게 물질에 관한 올바른 기도를 가르쳤다. 여기서 예수는 일평생 쓰고도 남을 풍부한 물질을 구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매일의 생활에 필요한 물질, 즉 일용할 양식을 구할 것을 가르쳤다. '일용할 양식'에 관한 교훈은 분명히 광야에서 매일 거둔 '만나'를 상기시키는 교훈이다. 만나는 오직 매일 먹을 분량만큼 거두어야 했고, 안식일을 제외한 다른 날을 위해 더 많이 거둔 만나는 모두 썩어 버렸다. 이처럼 예수는 물질이 매일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우리의 생명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를 막연한 내일을 위해 축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쳤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매일의 물질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소박한 삶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예수는 다시금 물질에 대한 올바른 자세와 가치관을 가르친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여기서 예수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둘 것을 가르친다. 그렇다면 두 가지 교훈은 서로 모순되는가? 예수는 과연 재물을 축적할 것을 가르치는가?

하지만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가 물질 축적을 적극적으로 권장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도 예수는 분명히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어떤 사람(스토트)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뜻이라고 이해한다. 물론 이런 이해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2장 13-21절에서 예수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의 어리석음을 경고한 후에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은 자선 행위, 즉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를 뜻한다. 왜 우리는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써야 하는가? 오늘의 본문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1) 첫째로 땅에 쌓은 물질은 덧없기 때문이다. 땅에 쌓은 물질은 금방 망가지고, 쉬이 잃어버린다. 곤충이 먹고, 녹이 쓸며, 도난을 당한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질병과 전쟁도 재물을 빼앗아간다. 오늘날에는 경제 불황과 파산, 인플레이션(평가절하) 등으로 재물이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변한다. 그리고 죽음은 모든 재물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만다. 욥의 말대로 "인간은 모태에서 벌거숭이로 태어났으니 또한 벌거숭이로 돌아가야 한다"(욥 1:21). 이처럼 땅의 물질은 참으로 허무하다. 그와 달리 하늘에 쌓은 보물은 아무도 해치거나 훔쳐가지 못한다. 그것은 영원한 축복을 되돌아온다. 마태복음 25장의 '마지막 심판'의 비유를 보면, 마지막 심판자로 오는 왕이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분별한다. 이 때에 왕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사람들을 돌아본 양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복을 내리지만, 이들을 돌보지 않은 염소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을 내린다. 이 비유를 통해서도 예수는 이 땅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베푼 선행이 결국 하늘의 큰 복(보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유대교로 개종한 어떤 왕(모노바즈)이 흉년에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더니. 그 형제들이 "조상들이 모으고 불린 재산을 다 흩어버렸다"고 불평하였다. 이에 왕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 조상은 땅을 위하여 재산을 모았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보화를 모았다. 우리 조상은 사람의 손에 닿을 수 있는 곳에 재산을 쌓았고, 나는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재산을 쌓았다. 우리 조상은 이윤이 없는 보화를 모았고, 나는 이윤이 있는 보화를 모았다. 우리 조상은 이 세상의 보화를 모았고, 나는 장차 올 세계를 위해 보화를 모았다."

 (2)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써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선행은 사람의 인격을 환하게 비추기 때문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인간의 인격은 눈빛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만약 눈이 어두우면, 사람은 온통 어두움 속에서 헤매게 된다. 이처럼 이기적인 욕심과 인색한 물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삶의 방향 감각과 목적을 잃고 허우적거리며 산다. 땅의 재물을 탐욕스럽게 모으는 자의 영혼은 온통 부패하게 된다. 유대교에서 영혼은 빛으로 비유된다. 만약 인간의 영혼이 땅의 재물에 예속되면, 그에게는 온통 어둠이 지배한다. 하지만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히 나누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다. 그의 인격은 밝은 빛을 비추며, 아름다운 향기를 발한다. 그래서 유대인 속담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한 사람은 어두운 눈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Ben 4:2).   

 (3)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써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사람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듯이,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람은 두 고용주를 위해 일할 수는 있다. 하지만 노예는 두 주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설령 두 주인을 섬기는 노예가 있다고 하더라고, 절대적인 섬김은 오직 한 주인에게만 향할 수 있다. 물질이 사람을 섬길지언정 사람이 물질을 섬겨서는 안 된다. 물질을 섬기는 행위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물질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행위, 즉 우상 숭배가 된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은 부의 법칙에 굴종하는 삶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는 물질 소유, 물질 축적 혹은 물질 증식을 무조건 죄악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는 가난 그 자체를 이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예수가 배격한 것은 이기적인 물질 축적 혹은 물질에 지배당하는 삶, 물질을 섬기는 삶이다. 예수는 이런 삶이 제자의 삶과 일치될 수 없음을 가르쳤다. 예수는 땅의 재물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는 가운데서 가난한 이웃에게 물질을 나누는 사랑의 삶을 요구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삶을 이 땅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이상으로 생각한다. 이런 이상을 실현하려던 공산주의가 실패했으니,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인간이 만든 체제는 모두 물질 위에 세워진 체제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물질 사랑 위에 세워진 체제는 결코 온전할 수도 없고, 그래서 성공할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만 이런 이상은 실현될 수 있다. 예수가 약속한 성령이 임하였을 때,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물질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을 훌훌 벗어버리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물질을 나누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맡겨진 덧없는 보물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영원하고 풍성한 하늘의 보물을 물려받는 슬기로운 청지기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