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2004년 6월 30일, 현풍제일교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사람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사람이 흙으로 지음을 받고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물이다. 사람의 몸의 70퍼센트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 밥은 40일 동안 안 먹어도 살 수 있지만, 물은 일주일 동안 안 마시면 죽기 시작한다. 사람이 아무리 잘난 척 해도 근본적으로는 물이다. 하지만 사람은 물질 이상이다. 그렇다면 정신적으로 사람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사람이 주로 무엇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든, 생각의 대부분은 염려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온갖 염려에 사로잡힌다. 솔로몬의 말대로 사람의 일평생은 근심과 수고와 슬픔뿐이고, 그 마음이 밤에도 걱정 때문에 편히 쉬지 못한다(전 2:23). 사람은 자나깨나 걱정하고, 언제 죽을지 몰라 걱정하며,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지 걱정한다. 그러므로 걱정과 근심은 사람다운 짓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한다.

사람으로서 이렇게 당연하고 필수적인 짓을 예수는 "도무지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예수의 비범함, 예수를 따르는 자의 비범함은 바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는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일에서도 드러난다. 복음의 혁명적인 특징은 바로 여기서도 드러난다. 복음은 사람의 관행과 관습, 아니 사람의 본능을 완전히 뒤엎는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생활 필수품을 위해 도무지 염려하지 말라니, 예수는 밥을 먹지 않고 사는 천사(天使)와 신선(神仙)인가? 혹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몰라도, 땅에 빌붙어 살아가는 피조물에게 이런 소리를 하다니, 예수는 미치광이가 아닌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않는가?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Spurgeon)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는 것을 '세상 염려의 삼위일체'라고 불렀다. 하지만 "어디에서 잘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왜 빠져 있을까? 아무리 잘 먹고 마시고 입어도, 쉬고 자고 비바람과 위험을 피할 집이 없다면, 마음에 평안이 있을까? 예수는 집이 없는 자의 고통을 모른다 말인가? 아마도 예수 당시에 주거지의 문제는 생존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옛날 근동 사람들은 아무 데서 자는 데 익숙했던 것 같다. 비록 불편해도, 그들은 들판과 바위틈에서 혹은 동굴이나 빈 마구간에서 잠을 청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아무리 가난해도 최소한 천막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것이었으리라. 오늘날 주택은 분명히 중요한 염려거리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집이 없는 사람의 고통을 우리는 헤아려야 하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가 오늘 우리에게 나타난다면, "어디에서 잘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도 보태었을 것이다. 좌우간 세상 사람이 모두 하는, 아니 반드시 해야 만 살아갈 수 있는 필수적인 '염려'를 예수는 왜 "도무지 하지 말라"고 하는가?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1) 첫째로, 염려는 어리석기 때문이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 말은 무슨 말인가? 목숨과 음식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목숨이 중하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는가? 몸과 옷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게 아닌가? 몸을 보호하려고 옷을 입지 않는가? 그런데 왜 예수는 몸과 음식, 몸과 옷을 떼어놓고 보는가? "음식과 옷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약 더 큰 것이 있다면, 당연히 작은 것도 따라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더 중한 목숨을 창조하셨다면, 덜 중한 음식도 당연히 마련하셨을 것이라는 말이다. 만약 하나님이 더 중한 몸을 창조하셨다면, 덜 중한 의복도 당연히 마련하셨을 것이라는 말이다. "소중한 목숨과 몸을 창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소중한 음식과 옷조차 마련하시지 못하시겠는가?"말이다. 아니 "실제로 하나님은 소중한 목숨과 몸을 위해 음식과 옷을 장만하시지 않았는가?"말이다. 그런데 "왜 염려하는가?"말이다. 하나님이 다 준비하신 일을 염려하는 일은 어리석다는 말이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사람을 어찌 하찮은 새와 비교하는가? 새가 어찌 사람이 하는 일, 즉 심고 거두고 창고에 모아들이는 일을 할 수 있는가? 새는 당연히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모으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심고 거두고 모아야만 살아갈 수 있지 않는가? 만약 사람이 심고 거두고 모으지 않는다면, 가뭄과 흉년을 어떻게 버티라는 말인가?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만약 하나님이 하찮은 새도 먹이신다면, 당연히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먹이시지 않겠는가? 분명히 새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날아야 한다. 새와 달리 다람쥐와 같은 동물은 겨울을 위해 먹이를 모아야 한다. 하지만 동물은 자신이 뿌린 씨앗에서 먹이를 거두지 않는다. 새는 날고, 둥지를 짓고, 새끼를 낳는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함으로써, 새가 먹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땅에 풀이 나게 하고 새가 먹고 살게 하는 자는 하나님이다. 새가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풍부한 축복 때문이다. 하나님이 놓아두시지 않으면, 새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고, 아무리 찾아도 새는 굶어 죽을 것이다(루터). 이처럼 연약한 피조물을 위해서도 하나님이 먹을 것을 배려하셨다면, 그보다 더 중요한, 아니 천하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음식을 준비하시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먹고 마실 것을 염려하는 사람은 새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는 말의 뜻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어찌 하찮은 들꽃과 비교하는가? 백합이 어찌 사람이 하는 일, 즉 길쌈을 할 수 있는가? 백합은 당연히 길쌈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길쌈을 해야만 옷을 걸칠 수 있지 않는가? 만약 사람이 옷을 만들어 입지 않는다면, 추운 밤과 겨울을 어떻게 견디라는 말인가? 하나님이 들의 백합화를 돌보신다면,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돌보시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옷을 위해 염려하는 사람은 백합보다 어리석은 사람이다. 백합도 옷을 위해 염려하지 않거늘, 어찌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염려하겠는가?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신 사랑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염려는 어리석은 짓이다. 염려하지 말라.   

 (2) 둘째로, 염려는 부질없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염려함으로써 키를 한 자라도 늘릴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염려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한다. 염려함으로써 키를 5센티미터 늘릴 순 없다. 여기서 키는 생명을 뜻할 수도 있다. 염려함으로써 생명을 연장할 순 없다. 염려는 헛된 것일 뿐이다. 물론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오늘날에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키와 생명을 어느 정도 연장할 수 있다. 영양 상태와 치료 의학과 노동 조건이 좋아진 오늘날에 사람의 평균 수명은 옛날보다 훨씬 더 늘어났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유복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크게 자라고, 더 오래 산다. 하지만 옛날이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통용되는 진리는 염려로써 키와 수명을 조금도 늘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염려는 키와 생명을 단축시킨다. 현대인의 질병의 대부분은 부질없는 염려 때문에 발생한다.

만약 염려가 유익하다면, 예수는 우리에게 "염려하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염려하라"는 말은 없다. 다만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칠 뿐이다. 사람의 염려의 대부분은 내일에 관한 염려다. 오늘은 살아 있기 때문에 내일을 염려할 기력이 있는 것이다. 오늘은 살아 있기 때문에 내일 죽을까 염려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을 위한 염려는 무익하다. 랍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일의 염려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이 내일이면 사라질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일을 염려한 것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을 세상을 위해 염려한 셈이 된다." 내일 먹고 마실 것을 충분히 갖추기 위해 사람은 염려한다. 염려하지 않고 살려는 생각 때문에 사람은 재물을 열심히 벌고 모은다. 하지만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사람은 많은 염려를 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재물은 또 다시 염려의 씨앗이 된다. "재물을 어떻게 더 많이 불릴까, 재물을 어떻게 지킬까?" 끊임없이 염려하게 된다. 염려하지 않고 살려고 재물을 모았는데, 결국 그 재물이 더 큰 염려를 낳는다면, 도대체 재물을 통해 염려없이 살려는 노력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본회퍼의 말대로 염려를 통하여 염려 없이 살려고 하는 짓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독일 사람이 스페인 바닷가에 휴가를 보내러 갔다. 그는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허름한 차림의 한 어부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배 위에 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름다운 바닷가를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은 후에 그는 뱃사람에게 물었다. "고기는 많이 잡았소?" "대구 여섯 마리와 고등어 이십여 마리를 잡았소." "열 시도 안 되었는데 그렇게 많이 잡았소?" "그렇소" "아니, 그러면 가서 열심히 잡지 않고 왜 이렇게 쉬고 있소?" "더 많이 잡아서 뭐 하게요?" "오늘 하루 적어도 서너 배는 더 잡을 게 아니오? 그러면 당신은 훈제 공장을 차릴 수 있고, 회사도 차릴 수 있을 게 아니오?" "그렇게 해서 뭐 하게요?" "아, 그렇게 되면, 당신은 직원들에게 공장과 회사를 맡기고, 당신은 마음놓고 바닷가에서 즐길 수 있지 않소?" 그러니까 뱃사람이 뭐라고 말한 줄 아는가? "아, 여보시오. 내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소?" 이것은 무슨 뜻인가? 염려없이 살려고 많은 재물을 모으는 일보다는 작은 재물로 염려없이 사는 일이 더 현명하다는 뜻이다.  

 (3) 셋째로, 염려는 불신앙이기 때문이다. 왜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염려가 근본적으로 불신앙이기 때문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본문은 염려하는 자를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염려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방인이나 하는 일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사람은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작은 새와 들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먹이시지 않겠는가? 하늘의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돌보아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다스리시므로 그분만이 세상을 위해 염려할 수 있다. 우리는 완전히 무력하므로 우리는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염려를 침범하는 일이 된다. 예수를 따르는 자는 누구인가?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자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자다. 이처럼 예수의 제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믿는 근심없는 단순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추구하게 되면, 모든 염려는 사라진다. 아니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해 일하는 자를 하나님은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무 일에도 도무지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 예수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마치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 것처럼 보인다. "내일 일은 내일 가서 염려하고, 오늘은 푹 쉬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내일은 금방 오늘이 된다. 그러면 다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말하면, 결국 일평생 염려할 것이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루가 지나면 내일이 오늘이 되니까, 내일을 무한히 연장되는 셈이다. 즉 염려할 내일은 사실상 사라지는 셈이다. 예수는 이처럼 염려를 내일로 미루다가 결국 염려할 것이 없는 지혜로운 삶을 권장하는가? 그래도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은 "도무지 염려하지 말라"는 말과 어긋나는 말이 아닌가?

본문의 정확한 번역은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도 이해하기 어렵다. 내일 일을 어찌 내일이 염려할 수 있는가? 이 말은 "마치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사하라"는 말처럼 매우 이상하게 들린다. 이 말은 결국 "염려는 말이 안 된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진정한 뜻은 다른 데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일용할 것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과 신실한 섭리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근심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염려하느냐, 염려하지 않느냐?"는 것은 불신앙과 신앙, 불신자와 신자를 구분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괴로움이 없는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할 고통이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을 믿고 염려하지 않는 삶은 계획과 노력도 없이 빈둥빈둥 살아가는 삶을 말하지 않는다. 하늘의 새와 들풀도 열심히 일한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보답하신다. 그리고 예수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고통에서 완전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주지 않는다. 열심히 살려면,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 더욱이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좁은 길과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도리를 다한 후에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盡人事待天命)는 말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해 최선을 다한 후에,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담담히 맡겨야 한다. 자신을 위해 염려할 시간에 하나님에게 기도하라. 미래의 일을 위해 염려할 시간에 더 열심히 노력하라. 진정 염려하려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해서만 염려하라. 이 염려는 거룩한 염려이기 때문에 조금도 어리석거나 무익하거나 해롭지 않다. 아니 이 염려는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에게 무한한 기쁨과 최후의 승리를 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