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개와 돼지에 관한 교훈

마 7:6

2004년 7월 28일, 현풍제일교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1) 지난 번에 우리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배웠다. 노자(老子)도 이와 비슷한 교훈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자신은 잘 용서하면서도, 남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하지만 우리는 남을 대하는 그 엄격함으로 자신을 엄격히 대해야 하고, 자신을 용서하는 그 너그러움으로 남을 용서해야 한다." "남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야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한다"는 뜻을 지닌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도 같은 뜻을 전한다.

그런데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던 예수가 갑자기 개와 돼지에 관한 말을 하는 것은 좀 놀랍고도, 의아스럽고, 민망하다. 분명히 그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빗대어 '개'와 '돼지'라고 말한 것 같은데, 아무리 비유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남을 비판할 때에는 매우 신중할 것을 요구한 예수가 이처럼 과감한 말을 쓰다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는 고통을 당하는 세상의 약자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온유하였지만, 폭력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에게까지 물러빠진 약골처럼 한없이 부드럽지는 않았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는 솔직하고 용감하게, 아니 도발적으로 말하곤 하였다. 예수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헤롯(안티파스)을 '여우'라고 불렀으며(눅 13:32),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회칠한 무덤'과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험한 욕설(!)까지 사용했다(마 23:27,33). 그리스도인은 항상 온유해야 하지만, 악한 자들을 방관하고 그들과 타협할 정도로 비겁하거나 유약해서는 안 된다.   

2) 그렇다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을 지니는가? 앞의 문맥에 따라 이해한다면, 남에 대한 적절한 충고와 정당한 비판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먼저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어낸 후에 밝히 보게 된다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지적할 수 있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적을 받은 형제는 자신의 잘못을 밝혀준 우리를 당연히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눈 속의 티를 빼낼 수 있도록 도와 준 형제가 당연히 고맙지 않겠는가! 티를 빼냄으로써 눈을 더 밝게 하고 눈병을 예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보답을 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달갑게 여기지는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자존심이 상하여 오히려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 니가 더 잘났어!" "니가 잘 나면 얼마나 잘 났다고, 남의 흉을 보느냐?" 이런 식으로 대들고 욕을 하기 쉽다. 그러므로 잠언도 이렇게 교훈한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   

문맥의 전후를 보면, 분명히 이런 해석이 옳다. 하지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와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초대 교회의 교훈을 묶은 책 디다케(Didache)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 외에는 성찬을 먹고 마시지 못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하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미헬)은 '거룩한 것'을 성만찬으로 이해하였다. 어떤 사람(톨룩)은 "거룩한 물건이 부정한 사람에게 접촉되지 않도록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또 어떤 사람(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의 예배에 이방인을 초청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태복음 13장 45절에서 우리는 예수가 진주를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과 나란히 우리는 '거룩한 것'을 하나님의 진리 혹은 복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3) 그렇다면 '개'와 '돼지'는 누구를 말하는가? 신약성서에서 '개'는 이방인(마 145:26) 혹은 영적인 이방인(빌 3:2, 벧후 2:22)을 지칭한다. 그리고 구약성서에서 '돼지'는 되새김을 하지 않고 굽이 갈라져 있기 때문에 부정한 동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했으며, 죽은 돼지는 만지지도 말아야 했다(레 11:7-8). 그래서 엄격하게 율법적으로 사는 유대인 혈통의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는 말을 이방인 선교를 배격하는 말로 이해하였다. "거룩한 것, 즉 하나님에게 드린 재물을 개에게 던지지 말라"고 랍비들은 말했다. 먹을 수 없는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면, 돼지는 먹이를 주는 자에게 대든다. 이처럼 이방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자를 거부하고 율법을 공격하며, 식사규정과 정결 규정을 내던지고 결국 이스라엘을 찢어 상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는 말은 제자들의 선교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지만, 복음을 선포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선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복음은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복음이 조롱을 당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떤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치료될 수 없는 불경건한 사람'(크리소스톰)이고, '완전히 사악한 행실에 빠진 사람'(예레미아스)이다. 만약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경멸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해치기까지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강요하다가는 큰 화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복음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거나 배격하는 사람들에게 무분별하게 전도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4). 사도 바울도 유대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시기하여 바울을 비방하고 핍박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고 담대히 말한 후,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다른 곳(이고니온)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행 13:44-51).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하지만, 이처럼 예외적인 상황이 있음을 경고하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전도자가 될 것을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