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황금률

 마 7:12

2004년 8월 18일, 현풍제일교회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 사람의 심리는 복잡하고, 인간의 행동은 다양하다. 이 작은 지구에 온갖 인종들이 서로 다른 언어와 풍습을 지니면서 살아간다. 때로는 서로 협력하면서, 때로는 서로 싸우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이 행동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행동 방식과 상관이 없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방식이다. 수동적인 행동 방식과 능동적인 행동 방식도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따른 수동적인 행동 방식은 상대방이 행동하는 대로 되돌려주는 방식이다. "남이 나를 잘 대접하면, 나도 그를 잘 대접한다. 하지만 남이 나를 푸대접하면, 나도 그를 푸대접한다." 이런 행동 방식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일 뿐만 아니라, 동물적인 본능에 속한다. 동물은 철저히 조건에 따라 반사적으로 행동한다. 개에게 먹이를 주고 쓰다듬어 주면 꼬리를 흔들고 재롱을 떤다. 하지만 개의 먹이를 뺏고 개를 때리면, 으르렁거리고 물어뜯는다. 이런 행동방식은 가장 널리 퍼진 방식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가장 자연스럽고 공평한 방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리와 법률, 거래와 외교는 대개 이런 원칙에서 이루어진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최소한 이러한 동일 원칙에 따라서만 행동한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어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거룩한 백성,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은 행동을 요구하였다. 더욱기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보다 더 의로운 행동을 명하였다. 예수는 "세상 사람들의 행동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아 행동하라"고 명하였다. "악인과 선인에게 두루 해를 비취게 하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비를 두루 내리시는 하나님처럼 모든 사람을 두루 사랑하라"고 하였다.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을 것이냐? 세리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그래서 예수는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하였다(마 5:43-48). 그리스도인은 그들과 달라야 한다는 말이다. 그들보다 질적으로 뛰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2) 하지만 인간은 항상 남의 행동에 맞장구를 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돌멩이를 맞으면 "딱"하고 소리를 내는 바위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기를 좋아하는 동물조차도 항상 남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지는 않는다. 동물도 때로는 매우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 아니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어찌 항상 수동적으로만 행동하겠는가? 매우 겁이 많거나 의기소침한 사람, 매우 아픈 사람들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들은 대개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세상에서 뭔가를 이룬 사람, 아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주도적인 사람, 창조적인 사람, 남을 이끌어주는 사람이다. 물론 때때로 우리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고, 훌륭한 사람의 행동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기다릴 줄 알고,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매사에 남에게 질질 끌려가는 삶을 누가 아름답다 하겠는가? 그러므로 남에 대해서도 우리는 수동적으로 반응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남이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좋은 일을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이방인이 랍비 샴마이에게 찾아가서 질문하였다고 한다. "내가 한쪽 다리로 서 있을 동안 율법을 한 마디로 요약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 랍비는 화가 나서 그를 쫓아버렸다고 한다. 조금 지난 후에 그 이방인은 다른 랍비 힐렐에게 찾아가서 똑같이 질문을 했다. 그 랍비는 샴마이와 달리 화를 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좋소 당신이 한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 이야기해 주겠소.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마시오. 이것이 율법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도 "남이 너를 괴롭혀 화가 나더라도, 그러한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했으며, 공자도 "남들이 행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남으로부터 푸대접을 받기 싫다면, 나도 남을 푸대접하지 말라"는 말이다. 여기서 나의 행동 기준은 남의 행동에 달려 있지 않다. 남이 바라지 않음직한 행동이 나의 바람직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남의 입장에 서서, 남을 배려하는 행동이 나에게도 유익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대개 남으로부터 나쁜 행동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에게도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사람들이 이런 기준에 따라서만 행동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약 그렇게 되면, 비난과 욕설과 폭력과 전쟁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행동 기준은 이와는 달랐다. 아니 이보다 더 높았다. 예수는 랍비 샴마이의 교훈을 뒤집었다. 샴마이가 "남에게 대접받기 싫은 행동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예수는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하였다. "무엇이든지 남이 나에게 행해주기를 원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그렇게 행하라"는 말이다. 예수는 수동적인 행동을 긍정적인 행동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소극적인 자세를 적극적인 자세로 바꾸었다. 남으로부터 기대하지 않는 언짢은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는 내가 남으로부터 기대하는 좋은 일을 내가 먼저 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남이 싫어하는 나쁜 일을 내가 하지 않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는 남이 좋아하는 일을 내가 먼저 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남에게 나쁜 일을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내가 남에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예수가 우리에게 명한 삶은 동물처럼, 세상 사람처럼 평범한 삶이 아니라 이처럼 높고 탁월하고 비상한 삶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황금률'이라고 부른다. 황금처럼 가장 고귀한 윤리의 지침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서의  요약이요, 예수가 가르친 윤리의 요약이다. 구체적으로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으로 요약된다. 우리 모두가 황금률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빛나고 고귀하고 영원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