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마 5:7  

2003년 8월 20일, 현풍제일교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긍휼히 여긴다"는 옛말을 요즘 말로 옮기면 "불쌍히 여긴다", "자비를 베푼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한자말로는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는 뜻이 될 것이다. 누구를 불쌍히 여기는 말인가? 당연히 곤경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이다. "무릇 모든 존재가 불쌍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아무런 부족도 고통도 없이, 아니 행복해서 미칠 정도로 잘 살아가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도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으며, 모든 면에서 아무런 부족과 고통도 없이 살아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현대 그룹의 황태자로 불리던 정몽헌 씨가 갑자기 투신 자살한 사건을 접하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재벌 회장도 자살한다면, 이 세상에 자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릴 때부터 너무 호강하고 자란 탓에 그 사람이 물러도 너무 물러 빠졌구만" 하고 혀를 차며, 비난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벌 회장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으면 자살까지 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아마 그를 동정한 사람의 숫자가 더 많았을 것이다. 아마도 죽은 사람을 박정하게 평가하지 못하는 마음씨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재벌 회장에게도 자살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무거운 고뇌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면, 누구에게나 동정심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행복한 체 늘 웃고 다니는 사람들도 속사정을 깊이 들어다보면, 실제로 불쌍히 여길 만한 부분이 분명히 많을 것이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를 불쌍히 여길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말로만으로 누군들 사랑하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감정적인 동정만으로 어떻게 고난에 처한 사람을 실제적으로 도울 수 있겠는가? 불쌍히 여기는 행위는 곧장 그를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사랑의 행위로 발전해야만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불쌍히 여기는 것"을 곧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이 본문에서 바울의 '사랑의 찬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물론 돈이나 환경에서 나오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 그런데 사람이라 무엇인가? 우리말로 '사람'이라는 단어는 '삶'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하고, '삶'이라는 단어도 사랑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곧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 사람이 사랑인가? 바로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는가? 오직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이 하나님다운 것도 사랑에 있듯이, 사람이 사람다운 것도 사랑에 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신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크다"라는 표현이 무수히 나온다(신 30:3, 삼하 24:14 등). 그 만큼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말이 된다. 특히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비롯한 불쌍한 사람들과 뉘우치는 사람들,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다. 구약시대에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인애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호 6:6)고 말한다. 예수 시대에도 여전히 제사는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종교적인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도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대담하게 말한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사랑과 자비, 긍휼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사랑과 자비, 긍휼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자비는 예수의 선포와 활동의 중심이었다. 자비는 율법을 성취한다(마 5:17-20). 그리고 마지막 심판의 비유(마 25:31-46)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자비를 오직 베푼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설명한다. 세계의 심판자는 자비를 베푼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며,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에게는 엄한 벌을 내린다. 그래서 야고보도 이 정신을 이어받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마태복음 18장 23절-34절의 '악한 종의 비유'를 보면, 큰 빚을 면제받은 종이 다른 종의 아주 작은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에게 면제받은 빚을 도로 내어놓아야 하는 사건이 나온다. 만 달란트를 면제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의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다. 요즘의 계산으로 하면, 일백만 원의 빚을 면제받은 자가 단 일원의 빚도 면제해 주지 않았다. 이런 깍쟁이를 어느 누가 불쌍히 여기겠는가? 그래서 스코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기꺼이 용서하는 것보다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입증하는 것은 없다. 용서하는 것이 용서받는 것이며, 긍휼을 베푸는 것이 긍휼을 얻는 것이다."

불쌍한 사람을 도운 결과로 이익이 생긴다면, 더 이상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을 도우려면, 종종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이 생긴다. 그래서 라가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자비한 사람은 독선적이다. 그는 자기의 정당함을 완강하게 주장하고, 늘 자신의 권리에 집착한다. 그러나 자신의 정당성을 포기하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며, 큰 보상을 받는다.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자는 타인들의 권리, 인간의 권리, 형제의 권리를 위해 그 자신의 권리를 거부한다. 그는 자비로워진다."

더욱이 남을 돕다 보면, 자신의 위신과 명예를 버려야 할 때도 많다. 손과 옷에 흙이 묻는 것을 싫어한다면, 흙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구하겠는가? 그래서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신도 포기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긍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고난과 결핍된 생활로 만족치 못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고난과 다른 사람의 비천과 다른 사람의 죄책에 기꺼이 참여한다. 그들은 꺾일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미천한 자 한, 병든 자, 가련한 자, 천함과 욕을 당한 자, 불의의 고난을 당한 자, 배척을 받은 자, 고통과 근심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죄와 허물에 빠진 자들을 찾는다. 긍휼이 이르지 못할 만큼 깊은 고난도, 그 만큼 무시무시한 죄도 있을 수 없다. 긍휼한 자는 자신의 영광을 부끄러움 속에 헤매는 자들에게 선사하고, 그들의 부끄러움을 대신한다. 세리와 죄인들을 두루 찾으며,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대신 지고 간다. 인간의 최고 선인 자신의 위엄과 영예를 내버리고 긍휼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