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화평케 자는 복이 있다

 마 5:9

2003년 9월 10일, 현풍제일교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인류가 이 땅에 출현한 이래로, 아니 동물의 세계를 보더라도, 도대체 전쟁이 없는 세상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된다.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다. 아주 사소한 것 문제들 때문에 사람과 나라, 종족과 계급, 남자와 여자, 심지어는 종교와 교인도 무모한 분쟁을 일으킨다. 일상적인 일처럼 다반사로 일어나는 온갖 분쟁을 보면서, 우리는 분쟁이 자연의 법칙 혹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로서 자연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기 쉽다. 정말로 전쟁은 필연적인 것이고, 평화는 허망한 꿈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평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기보다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효과적인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실로 지나친 과외 공부도 어쩌면 형태만을 달리한 하나의 전쟁이 아닌가? 과연 우리는 전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영역에까지 전쟁이라는 말을 갖다 부치기를 좋아한다. 범죄와의 전쟁, 부패와의 전쟁은 그래도 전쟁이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출근도 전쟁이요, 입시도 전쟁이라니, 우리는 온통 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니 누가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는가?

 하지만 성경은 전쟁이 결코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질서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동물들의 싸움은 창조질서의 한 부분이지만, 사람들의 싸움은 결코 창조질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평화에 있으며, 평화를 깨뜨리고 전쟁을 가져오는 자는 바로 타락한 인류이다. 에덴 동산에는 애초부터 전쟁이 없었다. 하지만 타락과 동시에 부부 갈등이 일어났고, 형제 살인과 민족 사이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오늘날도 과거에 비해 결코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다. 지구 곳곳에서 아직도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으며,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 사건 이후부터 테러와 전쟁은 지구 전체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한국도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형제를 향해 아직도 총을 겨누고 있으며, 안으로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의 모든 면에서 수시로 갈등이 터져 나온다. 교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참으로 평화는 멀고, 전쟁은 가깝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예로부터 참된 평화를 갈구해 왔고, 평화 실현을 위해 몸을 바쳐왔다. 구약성서에서 구원을 나타내는 가장 포괄적인 용어는 샬롬, 즉 평화이다. 하나님은 평화를 창조하시는 분이고(시 86), 하나님과의 계약은 평화의 계약이며(사 54:10), 장차 올 메시아는 평화의 왕이라고 불리었다(사 9:5, 미 5:4). 평화의 왕으로 탄생한(눅 2:14) 예수는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고, 제자들에게 항상 평화가 있기를 기원하였다(요 20:1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이 성취하신 복음은 다름이 아니라 평화였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더욱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도 평화를 창조한 사건이었다. 평화(화평)는 성령의 은사에 속하며,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우리 가운데 평화를 창조한다.

그러면 평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 우리는 먼저 평화가 아닌 것, 즉 잘못된 평화를 배격해야 한다. 평화는 현 상태 그대로 둥글둥글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고려 왕조를 전복한 이방원이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정몽주를 회유하면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우리도 만수산 드렁칡처럼 서로 얽혀서 살아가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평화는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좋은 게 좋으니 서로 사이좋게 살아가자는 그런 뜻이 아니다  진리와 정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안정과 평화는 결국 악한 권력자의 편을 들어주는 행위가 된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와 질서가 가득 찰 때, 만물이 질서가 잡힐 때, 참된 평화는 실현된다. 그래서 예수도 거짓 평화주의자를 향하여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 10:34)고 하였다. 예수는 참으로 평화주의자였지만, 로마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거짓된 평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과감하게 거부하였다.  

그리고 평화는 힘의 균형 때문에 유지되는 평화의 상태가 아니다. 비록 힘의 균형 때문에 당장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힘의 균형이 깨어지면 언제라도 전쟁은 일어날 수 있다. 적을 제압하기 위해 강력한 무기를 만들고, 적도 우리를 제압하기 위해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들고 하면서, 계속 무기를 증강하는 것은 진정한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다. 총과 칼로 평화를 이룩한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오직 이사야가 예언한 상태, 즉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사 2:4)고 하는 그런 상태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참된 평화는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아들,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롬 12:18).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인간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인간과 제도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탐욕과 지배욕을 뿌리뽑을 때,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 평화를 이룩하는 자는 전쟁의 영웅보다 더 위대하다. 유대교의 랍비는 평화를 만드는 자들을 냄비에 비유했다. 냄비의 얇은 바닥은 불과 물이라는 서로 대적하는 두 요소를 갈라놓고 서로 화합시키지는 않지만, 불과 물이 평화롭고 건설적으로 함께 일하도록 중재한다. 이사야도 하나님을 나라 사이의 분규의 조정자라고 불렀다(사 2:4). 하나님은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게 하신다. 하나님이 가시는 발자취마다 평화가 뒤따른다(시 86:10-13).

평화의 왕으로 온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해서, 입으로는 "평화, 평화, 사랑, 사랑, 화해, 화해"하면서, 뒤로는 증오의 칼을 갈고 복수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마귀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원수도 사랑한다. 원수사랑, 평화, 온유는 참으로 힘들지만, 아니 때로는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적들에 둘러싸이고, 박해와 죽임을 당해도 담담히 살고, 담담히 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화가 마지막까지 승리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전쟁이 사라지고 영원한 평화만이 영원히 이어질 것을 굳건히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실현하기 위해 먼저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평화의 길을 걷도록 늘 기도하고, 늘 노력해야 한다. 성도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평화가 늘 함께 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