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수난의 과정(2)

 

마 26:57-68

  2005년 9월 25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사도신경의 뜻을 배우고 있습니다만, 지난 주일은 추석이었기 때문에 "너희도 열매를 맺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다시 사도신경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어찌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게 되었는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대로 예수님이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다시금 분명히 확인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오직 하늘만을 다스리시고 로마는 오직 이 땅만을 다스린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로마 제국은 서로 충돌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함께 평화로이 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들어가거나 까마득히 먼 장래에 들어갈 수 있는 영혼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가까이 다가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서 실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자연히 이 땅을 지배하려던 로마 제국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음과 같은 선택 앞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따를 것이냐, 아니면 로마 황제를 따를 것이냐? 하나님이냐, 시저냐? 사랑이냐, 폭력이냐? 이런 당돌한 요구 때문에 예수님은 결국 로마 황제의 하수인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의 총독의 손에 정치적인 죽음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한한 사랑을 설교하신 예수님이 총칼로 다스리는 로마에게 패배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실로 불을 보듯이 빤한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책임은 전적으로 로마 총독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로마 총독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기 전부터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유대교 지도자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자처하던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들은 결국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가롯 유다를 돈으로 매수하여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 앞으로 끌고 가서 심문한 후에 빌라도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은 군중심리로 빌라도 총독을 압박하면서 예수님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습니다.

이방인도 아닌 같은 동족이, 더욱이 무신론자들이 아닌 경건한 종교인들이 왜 한사코 예수님을 죽이려고 발버둥을 쳤을까요? 오늘의 본문에 기록된 대로, 그들이 가장 화가 났던 이유는 바로 성전에 관한 예수님의 발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몰아내신 후에 성전 파괴를 예언하셨습니다.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마 24:2).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요 2:19). 그들이 화가 났던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의 도발적인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가 되시고 장차 심판자로 오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의 분노는 하늘 끝까지 닿았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제사장은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자기 옷을 찢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제사장은 예수님을 죽여야 하겠다고 결심하고서는,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제사장은 예수님의 말씀을 "참람하다"고 하였습니다. "참람하다"는 말은 요즘 거의 쓰이지 않는 옛 말인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말입니다. 그가 보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 심판할 인자'로 자칭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고 유대교를 위태롭게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유대교를 떠받치고 있던 기둥은 성전이었고, 성전을 떠받치고 있던 기둥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함으로써 성전 체제를 무너뜨리는 위험 인물이었습니다. 심지어 모세보다 더 높은 권위를 지닌 자로 말하고 행동하는 예수님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신분과 율법을 위태롭게 하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 매우 충실한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 당시 율법을 가장 충실하게 지킨다고 자처하고 자랑하던 바리새인들보다 더 철저하게 예수님은 율법의 기본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오,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떤 율법은 더 가볍게 만들었고, 어떤 율법은 더 엄중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그런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약속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은 종종 율법을 공격하셨을 뿐만 아니라 공공연히 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을 어기셨습니다. 안식일에 배고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허용하셨으며,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율법을 어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이중적인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떤 율법은 지켜야 하고, 어떤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은 무엇이고, 지키지 않아도 좋을 율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고 오셨습니까, 아니면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셨습니까? 사람은 율법으로 구원을 얻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까? 우리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도 이런 갈등이 일어났을 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갈등에 더 부채질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율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해 갈등과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율법을 충실히 지키려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 모독자'로 낙인찍음으로써 율법의 저주를 받게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유대인과 예수님의 갈등은 율법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때문에 빚어진 갈등만은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유대인과 예수님의 갈등은 율법과 은혜의 갈등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자를 의로운 자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이 율법을 모르는 자, 율법을 어기는 자를 심판하시고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의로운 자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이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으시고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율법의 하나님, 율법의 기준에 따라 냉혹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전파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전파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은 전통적인 유대인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아무 조건도 없이 죄인을 찾으시고 용서하시는 은혜의 하나님,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 당시 유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고, 빌라도 총독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처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 때문에 돌아가신 셈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써 예수님의 입장이 옳았음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율법의 끝, 율법의 마지막(롬 10:4)이 되셨습니다. 예수님 이후로 모든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 자신의 업적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말대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때, 마치 회개와 믿음이 구원을 받는 조건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회개와 믿음은 다만 구원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될 따름이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회개와 믿음은 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가 행해야 할 업적과 공적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거저, 아무 조건 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회개와 믿음은 무슨 일을 합니까? 회개와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용납될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용납되었다는 사실을 용납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와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다만 은혜를 수용하는 그릇일 뿐입니다.

예컨대 배고파 죽어 가는 어느 거지가 깡통에 따뜻한 밥을 얻어먹는 은혜를 입었다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거지가 밥을 얻어먹게 된 것은 거지가 구걸을 잘 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쁜 깡통을 내밀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거지의 얼굴이 유달리 잘 났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거지의 출신이 남달리 뛰어났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날따라 거지가 깨끗한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까?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다만 거지가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거지가 불쌍히 여김을 받고,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 죄인을 부르시고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율법을 지키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고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은 이런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이런 하나님은 그들에게 완전히 생소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을 가르치는 예수님을 그들은 "참람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예수님에게 율법에 따라 저주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잘못 알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무시무시한 심판자로만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전혀 다르게 보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말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자랑합니다. 무력하게, 비참하게, 실패하신 자처럼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바로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율법이 없는 자, 율법을 어기는 자처럼 율법의 저주 아래서 죄인처럼 돌아가셨던 예수님은 바로 그래서 오늘도 율법이 없는 자, 율법을 어기는 자, 즉 죄인들을 부르시고,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미움과 저주와 죽음의 표지였던 십자가는 사랑과 은혜와 구원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육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말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를 자랑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잘 나서, 우리의 행위로 특별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바리새인처럼 '자칭 의인'이 되지 말고, 언제나 애통하고 겸손한 죄인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갑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 하나님을 몰라서 아직도 죄 중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깁시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심지어 원수에게도 복음을 전합시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예수님이 죽기까지, 아니 예수님이 몸으로 몸소 실천하신 일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딛 2:11)을 세상 끝 날까지, 그리고 땅 끝까지 전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