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수난의 과정(3)

 

눅 23:18-25

2005년 10월 1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도  계속 예수님이 왜 고난을 당하셨는지에 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두 가지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에 의해 십자가 형벌에 처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로마 제국의 갈등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유대교의 종교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 은혜와 율법의 갈등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시게 된 또 다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민중에 의해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민중의 갈등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수난을 받는 과정에서 민중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자, 무리가 일제히 "예수님을 죽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을 놓아주겠다고 말하니, 무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더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다시 빌라도가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를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으니, 때린 후에 풀어 주겠다."고 말하니, 군중이 계속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재촉합니다. 빌라도가 세 번이나 군중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군중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성난 군중의 재촉에 밀려서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처형하였습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끝까지 살려 보려고 애쓰는, 상당히 부드러운 인물처럼 나타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매우 포악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자기에게 돌아올 정치적 부담을 다른 민중에게 떠넘기려고, 교활하게 일종의 쇼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는 자기 손에 피를 전혀 묻히지 않고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빌라도의 책임이 없어질까요? 아닙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명백한 사실을 기억합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빌라도처럼 매 주일마다 불명예스럽게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수난에 깊이 개입하였고,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확인합니다.

지도자들은 언제나 군중을 위해 일한다고 떠벌립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말을 들먹이면서, 백성을 위해 일한다고 선전합니다. 하지만 이 말이 얼마나 공허하고 악랄한 거짓말인지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아왔습니까! 자기 이익대로 백성을 선동하고 속이고 악용하는 지도자들을 우리는 얼마나 신물나게 보아왔습니까! 백성을 들먹이면서 "표를 달라"고 굽실거리는 정치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민심도 언제나 천심은 아닙니다. 민중도 때로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없습니다. "군중심리"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개인을 놓고 볼 때에는 매우 착하고 지혜로운 사람인데,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습니까! 매우 냉철하고 똑똑한 독일 백성이 히틀러의 선동에 미쳐서 얼마나 잔인한 집단 범죄를 자행했습니까! 개인적으로는 매우 싹싹하고 부드러운 일본 사람이 집단적으로는 얼마나 극악무도한 범죄를 자행했습니까? 역사에서 이런 예들은 수없이 널려 있어서, 이루 열거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군중을 보십시오! 민중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원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민중은 교활한 빌라도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마 27:20)을 보면, 민중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이용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중은 거짓 선동에 매우 약합니다.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어리석은 민중을 이용하여 권세와 탐욕을 누렸습니까! 민중은 군중심리에 부화뇌동하여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열렬히 앞장섰습니다. 백성을 거짓으로 선동하고 악용하는 지도자도 나쁘지만, 거짓 선동에 놀아나는 백성은 참으로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군중을 선동하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군중을 가르치셨고, 군중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아니 악평하자면, 예수님도 군중을 선동하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도자들은 말로는 군중을 위한다고 떠벌리지만, 결국은 자신의 잇속과 뱃속을 채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직 불쌍한 군중을 위해 죽기까지 봉사하시고 헌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군중, 민중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민중의 편에 계셨습니다.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의 화살을 던지셨던 예수님도 민중은 언제나 따뜻하게 감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없는 양처럼 고생하고 방황하는 민중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굶주린 민중을 먹이셨고, 병든 민중을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민중의 육적인 고통을 덜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욕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셨습니다. 불쌍하고 가난한 민중을 위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축복하셨고, 그들에게 가장 먼저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군중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에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였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성전 파괴 발언을 하시고 성전을 청결케 하신 후부터 군중심리는 갑자기 돌아서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발언과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예수님의 행동은 여러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빌라도는 정치적인 반란의 혐의를 품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보았습니다. 민중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옛날이나 오늘에나 민중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는 곳은 바로 경제입니다. 백성들은 일단 배만 부르면 큰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잘 돌아가면, 백성들은 웬만한 고통은 잘 참습니다. 그래서 경제 성장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독재를 행했습니까? 소수의 사람들을 빼놓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등 따시고 배부르면 독재자도 좋다고 환영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권과 민주, 생명을 상당히 박탈한 박정희 대통령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매우 서민적이고 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는 훌륭한 일을 많이 했는데도, 말을 가볍게 하고 경제를 잘 꾸리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 경제난의 많은 책임이 노무현 대통령에게만 있는 것도 아닌데도 - 수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험한 욕을 해댑니다.

민중은 지혜로운 듯 하지만, 때로는 상당히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악한 지도자의 거짓 선동에 - 요즘은 언론 재벌의 거짓 선전에 - 잘 넘어가지만, 경제에 대해서만은 매우 실리적으로,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예수님이 민중에게 빵을 주시고 민중의 병을 고쳐 주셨을 때는 민중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민중의 이익에 손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자, 곧바로 성난 사자처럼 돌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던 바로 그 손이 며칠도 안 되어 예수님을 죽이라는 주먹으로 변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바로 그들의 경제적인 이익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성전 때문에 먹고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성경에는 제물을 팔고 돈을 바꾸며 장사하는 사람들만 나오지만, 성전과 관련된 일이 이 밖에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돈벌이가 되는 가장 큰 사업은 오랫동안 확장되던 성전 건축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건축에는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많은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성전을 둘러싸고 수많은 민중들이 밥을 벌어먹고 사는데, 예수님의 성전 파괴 발언과 성전 정화는 그들의 생존권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목소리로 "예수를 죽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인간들이 함께 모여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제도가 가장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대중이 한 사람보다 더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지도자가 없는 우매한 군중은 목자가 없는 양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군중에겐 늘 올바른 지도자, 지혜로운 인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 당시 지도자들은 눈먼 민중을 구덩이로 인도하는 눈먼 장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크게 진노하셨고, 어리석고 불쌍한 군중을 올바로 인도하려고 애쓰셨습니다. 하지만 군중은 눈앞의 이익이 있을 때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들의 이익을 해친다고 생각했을 때는 금방 예수님을 배반하고 저주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슨 갈등을 볼 수 있습니까? 사람과 하나님의 갈등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물질(중심)주의와 하나님(중심)주의의 갈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셨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식을 위해 기도만 하신 게 아니라, 실제로 굶주린 민중을 먹이셨습니다. 민중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민중의 뜻에 질질 끌려가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종종 민중으로부터 떠나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는 조용한 곳을 찾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민중을 누구보다 가장 사랑하셨지만, 민중의 뜻대로 살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받들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민중에게 너희는 먼저 "빵과 집과 옷을 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그리한다면 하나님이 일용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사람이기 때문에 이 땅의 법도 준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인간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충돌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어떤 손해와 고난이 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먼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과 충돌하는 인간의 법에 대해서는 불순종하고, 비폭력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중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항상 먼저 따라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다가 물질을 좇아 살려는 민중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민중의 손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누구의 편에 서시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어리석은 민중의 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까지 감수하신 예수님의 편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