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수난의 과정(4)

 

마 27:45-46

2005년 10월 7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세 가지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로마 제국의 갈등 때문에 빌라도 총독에 의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은혜와 율법의 갈등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민중과의 경제적 갈등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이유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크게 보면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에 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뿐이라면, 예수님은 우리 주 그리스도가 되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에서 이렇게 고난을 당한 사람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것으로 말하자면, 예수님보다 더 억울하게 고난을 당한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것으로 말하자면, 예수님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은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장렬한 것으로 말해도, 예수님보다 더 장렬하게 죽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유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런 이유로만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다면, 예수님은 안중근처럼 위대한 의사(義士)로 추앙을 받거나, 로메로 주교처럼 위대한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거룩한 고난을 될 수 있을지언정,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손을 빌려, 아니 사람들의 악행을 통해 더 큰 일을 하시려는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니 영원 전부터 성자와 함께 계셨던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의 고난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아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외치시지 않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사람들이 나를 죽이도록 가만히 놔두시나이까?"라고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류의 역사에서 장렬하고 당당하게 죽은 영웅들과 의인들, 순교자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은 억울하고 애통한 죽음 앞에 삶을 구걸하거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도망갈 기회도 있었지만, 그들은 당당히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도 우러러볼 만했지만, 그들의 죽음은 더욱 우러러볼 만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원수들의 손에 의해서만 고난을 당하셨다면, 예수님도 장렬하고 당당하게 죽으셨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다만 비겁하고 나약한 제자들에게만 버림을 받으셨다면, 그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신뢰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억울하다. 우리가 그분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자"라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고난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롬 8:32) 여기서 "내어 주셨다"는 말은 "넘겨 준다, 판다. 희생시킨다. 죽인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무도한 자들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원수의 손에 팔아 넘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이셨습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종종 오해와 비난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그것도 단 하나 밖에 없는 독자를 그토록 처참하게 죽이시는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는 것은 극악무도한 폭력이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무거운 범죄가 아닙니까? 혹은 이런 일은 지독한 정신병자들만이 저지를 수 있는 불행한 사고가 아닙니까? 사람들도 이런 일을 하면 안 되거늘, 어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실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이러실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을 비난했습니다. 피를 보아야만 화가 풀리는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라 악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신 적은 없습니까?

하지만 어쩝니까?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입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는 말이 흘러나왔으니, 어찌 우리가 이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이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이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이런 끔직한 일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은 그럴 듯한 말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무나 괴로우시다 보니, 헛소리를 하셨을 것이다!" 하기야 사람이 괴로우면, 무슨 소리를 못합니까?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자신의 외침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상상으로 꾸며내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도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이렇게 인간적으로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제자들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동정하고 슬퍼만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억울함을 풀어드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고 구약성서의 여러 예언들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음은 충분히 예견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렇게 위험한 행동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예견하지 못하셨다면, 정말 바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시고, 억울하다는 말만 남기시고 돌아가셨을 리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입으로 "억울하다, 죽기 싫다"고 아우성을 치시다가 돌아가셨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정말로 하나님 아버지의 잔인한 폭행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비록 고통스러운 외침을 내뱉으시기는 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외침은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외치시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예수님이 당당하게 죽으시는 모습보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참으로 인간적으로 죽으시는 모습이 더 좋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억울한 개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위대한 구원 활동을 펴셨듯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위대한 구원 활동을 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망가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제자들에게 "죽으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자"고 하셨습니다. 죽으실 줄을 아시고, 친히 죽을 자리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영혼, 아니 자신의 전부를 아버지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예수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아니 죽음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3).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진실한 친구가 되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바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오늘의 말씀 중에 간간이 언급되었지만, 예수님의 고난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분신과 같은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의 말(요 3:16)대로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은 독생자를 고난과 죽음에 내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셨는지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음 안에도 계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 동안만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 죽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한 사랑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우리도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그렇게 되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다시금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