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왜 고난을 받으셨나?

 

사 53:5-6

2005년 11월 6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게 된 이유, 고난의 과정을 네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에 의해,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그리고 민중에 의해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다만 인간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도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버림을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이어서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으셨는지 알아볼까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 아버지는 유일하신 독생자 아들을 고난 속으로 던지셨습니까?

이 세상에 고난이 들어온 이유를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어 온 고난의 이유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 가장 먼저 회개가 선언되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지적하는 고난의 이유는 인간의 무지와 잘못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생겨난 자연적인 결과, 인간의 업보라는 말입니다. 이 밖에도 인간의 발전과 행복에는 반드시 희생과 고난이 따른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게 될 때마다 대개 이 세 가지 이유를 들곤 합니다만, 인간으로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고난들이 더 많습니다. 질병의 원인도 대부분은 밝혀지지 않듯이, 우리가 설명하기 어려운 고난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이유를 알아야 하겠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수긍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는 성급히 자신과 남을 탓하기 전에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시간에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왜 그토록 모진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도록 사주하고 선동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옛적부터 십자가에 달린 자는 바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을 만큼 무슨 악한 일을 범하셨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 모독자로 십자가에 매달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을 모독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받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위해 사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에게 무슨 사악한 죄가 있었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처럼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아무런 죄가 없으셨습니다(히 4:15).

그렇다면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의 죄와 잘못 때문에만 고난을 받지 않습니다. 남들이 저지른 죄악과 잘못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불행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른의 잘못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불행을 당합니까? 지도자의 잘못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백성이 도탄에 빠집니까? 가족과 친지, 이웃과 친구의 잘못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환경 재앙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인류가 모두 공동 운명과 공동 책임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과학자들은 나비 한 마리가 먼 곳에서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말 하나, 우리의 행동 하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큰 파급을 일으킬 수 있음을 알고, 지혜롭고 신중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다만 수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뒤집어 쓴 불행한 사건만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조용히 사셨다면, 그토록 참혹한 고난을 받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방원의 말처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더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라고 하시며 지혜롭게 처세하셨다면, 고난을 당하셨을 리가 만무합니다. 오히려 승승장구 출세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질시와 고난, 멸시와 박해가 따라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옛날부터 의인과 선지자들은 주위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의인은 항상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인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예수님의 고난을 의인과 선지자의 고난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의인과 선지자의 고난은 다른 사람에게, 한 사회에 어떤 유익을 끼칩니까? 영악한 사람은 "괜히 잘 난 척, 의로운 척 하며 살다가 고난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의인의 고난에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설령 의미를 찾는다 하더라도, 의롭게 살기보다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편이 더 낫다는 처세술을 더 확고히 다지는 것으로 의미를 삼을 것입니다. 하지만 착하고 의로운 사람은 의인과 선지자의 업적과 무덤을 잘 정돈한 후, 이를 후손들에게 귀감으로 삼으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고난을 이런 수준에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위대한 의인, 성인, 위인의 한 사람으로 여겨서,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길이 본받기를 원합니다. 분명히 예수님도 고난을 받은 의인과 선지자의 대열 속에 계십니다. 예수님도 친히 의인과 선지자의 운명을 겪게 되실 것임을 종종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같은 의인들의 고난은 다만 후손들에게 훌륭한 교훈을 남기는 것으로 족합니까? 아닙니다. 비록 성경(정경)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구약시대의 외경인 마카비서는 의인들의 순교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대리적인 속죄가 된다고 말합니다. 엘레아사르(Eleasar)라는 사람은 순교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아시거니와 내가 나를 구할 수도 있으나, 율법을 위해 불 속 고난 가운데 죽나이다. 당신의 백성에게 자비로우시사, 그들을 위한 우리의 징벌로 만족하소서, 나의 피로 그들을 깨끗하게 하시며, 내 목숨을 그들의 목숨 대신을 삼으소서." 이처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의인들과 경건한 자들의 죽음이 백성의 죄를 대신 속할 수 있다는 신념이 퍼져 있었습니다. 이처럼 의인의 고난과 죽음은 백성을 깨우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씻은 효과가 있다는 것을 믿었던 사람들이 예수님 전에도 있었습니다.

의인의 고난도 많은 사람을 속하는 효력이 있거늘,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님의 고난이 어찌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한 희생이 되지 못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기록은 신약성서에 수십 번 나타납니다. 몇 가지만 들라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0:11),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느니라"(고전 15:3),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오,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히 2:17)는 말씀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속죄의 희생 죽음을 죽으신다는 생각은 사실 구약시대에서는 조금 생소한 편이었습니다. 메시야는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하는 힘있는 승리자로  올 것이라는 소망이 이스라엘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래서 일찍부터 초대 교회는 이 말씀을 근거로 삼아 그리스도의 수난 속에서 세상의 죄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에 따라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대리적인 고난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아들도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속죄는 꼭 필요합니까? 사죄는 절대로 필요합니까? 만일 죄의 용서가 없다면, 죄를 지은 자는 떳떳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는 계속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면, 죄인의 자존심은 점점 약해지고,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 결과로 죄인은 막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죄인은 자신과 남에게 점점 더 큰 악행과 불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지만 속죄가 없이는 죄가 용서될 수 없습니다. "천 냥 빚도 말 한 마디로 갚는다"는 말처럼 말로 잘못을 때우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사람들에게 지은 잘못을 똑같이 보상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범한 대부분의 잘못은 말로나 물질로 제대로 보상하기 어렵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게 말과 물질로 어떻게 다 보상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깊은 상처를 물질로 혹은 마음으로 충분히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에게 짓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모든 죄는 즉시 악한 열매를 맺으므로 속히 용서되고, 속히 단절되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은 신들의 진노를 달래려고 희생 제사를 드리곤 하였지만, 성경에서 속죄는 인간의 불의로 인해 생겨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려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속죄 제사는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안수를 통해 백성의 죄를 속죄양에게 전가하여, 속죄양으로 하여금 죄를 광야로 가지고 가게 함으로써, 백성에게서 죄를 멀리 떼어놓으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속죄양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려고 사람이 하나님에게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속죄 제도를 만든 자는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속죄양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성경에서 백성의 죄를 지고 속죄를 이루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은 백성의 죄를 지고 가도록 새로운 하나님의 종을 보내실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시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시는 하나님의 종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아니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실 수 있으며, 사람들의 죄를 친히 지고 가실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친히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시키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고 아들 안에서 하나님이 친히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며,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닷물을 먹물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숨과 이 세상을 다 드려도, 하나님의 은혜에 다 보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죽기까지, 아니 영원히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영원히 찬송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