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놀라운 은혜

 

히 2:9

2005년 11월 13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으셨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 다시 말하면, 우리 때문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서 아들의 고통을 그냥 내려다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성령을 통해 아들 안에서, 그리고 아들과 함께 몸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고난을 당하신 것은 다만 우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를 위해 우리의 고난을 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일시적으로만 사랑이신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아니 영원히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 때문에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시라면, 굳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이 범한 죄의 대가를 하나님이 스스로 지실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잘못을 왜 하나님이 떠맡으셔야 합니까? 인간이 범한 죄의 대가를 인간이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니 당사자가 책임을 지는 것이 정의로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을 스스로 대신 지셨다면, 우리를 미성숙한 인간으로 취급하셨을 뿐만 아니라 정의에도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고난을 자초하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설마 나훈아처럼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시지는 않겠지요! 사람마다 사랑을 제 각기 다르게 설명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달콤한 꿀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애인을 부를 때, "하니"(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는 서양 사람들도 이혼을 밥먹듯이 합니다. 꿀과 같은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 밥맛(?)으로 변하기 때문일까요? 아니 사랑이 점점 독으로 변한다는 말입니까? 사랑이 이혼으로 끝나는 중요한 이유는 사랑을 꿀처럼 달콤한 감정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다만 감정만이 아니라 책임이 동반되는 인내와 지혜의 기술이라는 것을 쉽사리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기술"을 쓴 에릭 프롬(Erich Fromm)은 사랑을 감정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사랑은 물론 감정도 동반하지만, 감정 그 이상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사랑은 지식, 보호, 책임, 존경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사랑은 온전하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진정 존경한다면, 상대방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위한답시고, 상대방에게 시시콜콜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답시고, 상대방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자기가 다 하려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상대방이 성숙한 행동을 하고 성숙한 사랑을 하도록 도와주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간섭하고, 상대방을 자기 방식대로 바꾸려고 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심지어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므로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을 자유까지도 쉽사리 박탈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대해 우리가 스스로 책임을 질만큼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십니다. 하지만 프롬의 말대로 사랑에는 보호와 책임도 따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만물을 보호하실 권리와 의무를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므로 피조물을 끝까지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므로 만물을 항상 살펴보십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만물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십니다.

사랑은 값싼 감정이 아니라 책임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다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만을 하나님의 희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작정하셨다면, 그냥 무조건, "은혜"라는 말 그대로 공짜로, 아무 조건도 없이 용서하실 것이지, 왜 그토록 참혹한 고난을 아들에게 지우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죄인들에게 아무 조건도 없이 용서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실 때, 아무런 희생 제물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들을 희생 제물을 삼으셨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닙니까? 이런 일은 미성숙하고 야만적이었던 옛날 사람들에게나 통용되던 일이지, 지금처럼 민주적이고 성숙한 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허황한 신화가 아닙니까? 만일 사람이 잘못했다면, 다른 사람이 대신 책임을 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책임을 지면 될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저는 점점 더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는 용서하더라도, 죄의 대가는 그 누가 반드시 거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죄악이 빚은 불행도 그 누가 반드시 보상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또 다시 어리석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가 잘못하거나 악하여 남의 집을 홀라당 다 불태웠다고 합시다. 요즘에도 어떤 사람들은 홧김에, 혹은 억울한 심정 때문에 남의 집이나 남의 자동차를 불태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녀를 좀 때릴 수는 있어도 똑같이 앙갚음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자녀를 불태워 죽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자녀를 참으로 사랑하는 부모는 결국 자녀를 용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자녀는 아무 조건도 없이 용서할 수는 있어도, 그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책임은 그 누가 져야 하지 않습니까? 만일 자녀가 피해를 보상할 능력이 없다면, 그를 사랑하는 부모가 대신 보상하는 게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모는 자녀 대신에 스스로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에는 책임이 따르고, 책임에는 누구의 희생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까? 오직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희생이 반드시 따른다고 했습니다. 옛날에 저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므로 천지창조에 아무런 희생이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나로 천지를 창조하실 만큼 전능하시고, 또 하나님의 전능은 무궁하고 무한하므로 천지를 창조하는 일에는 아무런 희생이 따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저는 최근에야 비로소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은 일에도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자녀를 낳기 위해 부모, 특히 엄마는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처럼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성령 하나님(하나님의 신, 영)도,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물을 품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치 엄마가 자궁의 양수 안에서 태아를 품듯이, 성령 하나님도 물 안에서 만물을 품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태어나면, 부모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집안이 좁아지기 때문에 부모는 좁은 공간으로 물러가야 합니다. 집안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부모는 수시로 집안을 청소해야 합니다. 집안이 시끄러워지기 때문에 부모는 자주 아기를 달래고, 집안을 단속해야 합니다. 돈이 더 들어가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도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시는 과정에 많은 것을 희생하셔야 했습니다.

자녀가 성장할수록, 부모는 더욱 수고해야 하고, 더욱 애간장을 태워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성장하고 번성할수록 하나님은 더 많이 수고하시고, 더 많이 일하십니다. 인간들이 잘못을 행할 때, 하나님도 역시 고통스러워하십니다. 한 손으로는 죄인을 징계하시더라도, 다른 손으로는 죄인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죄인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시고, 새로운 소망을 보여 주십니다.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심지어 죄인의 자리까지 친히 찾아 오셔서, 함께 괴로워하십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친히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친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험악한 세상과 함께 하시고, 연약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죄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시기 위함입니다. 죄인의 짐을 지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도 전능하신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병자를 고치실 때, 예수님의 능력도 빠져나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죄인을 용서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기 위해 예수님도 희생하셨습니다. 이사야(사 53:5-6)의 예언대로 우리의 허물로 인해 예수님은 찔림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예수님은 상함을 입으셨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기 위해 예수님은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나음을 입기 위해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저는 이런 진리를 늦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치유가 그냥, 아무 희생도 없이, 마치 마술방망이처럼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로, 공짜로 주어졌지만, 이를 위해 하나님이 치르신 희생은 너무나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통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희생은 항상 값비싼 대가를 치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라."라는 노랫말(찬송가 404장)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온갖 풍성한 과일과 채소, 곡식이 우리 입으로 들어오기까지도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랐겠습니까? "사람이 늙어가면서 점점 더 철이 든다." 는 말도 바로 이런 진리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늙어갈수록 사람은 남의 은혜를 더 많이 깨닫게 되고, 그래서 더욱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는 이치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왜 고개를 숙입니까? 다만 음식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수많은 이들, 심지어 동물과 식물에게도 감사하라는 뜻으로도 경건히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더욱이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음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굶주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진심으로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정말 공짜가 없습니다. 값비싼 것이든 값싼 것이든, 모두가 남의 희생을 통해 주어집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돈으로 감히 계산할 수 없는 것들, 예컨대 공기와 물, 들과 산, 해와 구름, 하나님과 부모님의 사랑 등은 모두 공짜로 주어졌습니다. 공짜일수록 매우 값비싼 희생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심지어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실패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아는 큰 신앙인, 전천후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결코 공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실패도, 만일 여러분이 이를 잘 감수하시고 잘 선용하신다면, 안 당하는 것보다 더 낫고, 때로는 행복과 성공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고통과 실패도, 만약 감사히 받아 지혜롭게 활용하신다면, 반드시 더 크고 아름다운 열매를 거둡니다. 우리가 먹은 과일과 곡식들도 얼마나 많은 인내와 고통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권고대로, 좋은 일에 대해서만 감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번 추수감사주일에는 우리 모두가 이전보다 더 뜨겁게 감사하는 날이 됩시다. 먼저 만물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만물에게 생기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또한 생명을 위해 좋은 것들을 많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생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에 깊이 감사합시다. 그리하여 이번 추수감사주일은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감사주일이 아니라, 참으로 뜻깊고 감격적인 감사주일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감사주일만이 아니라 언제나, 매일 매일 놀라운 감격과 뜨거운 감사가 끊임없이 샘솟아 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감사로 인해 여러분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친구와 이웃들도 감사로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다면, 여러분은 "감사의 근원"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와 여러분의 사랑에 저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