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십자가의 길

마 16:24

2005년 11월 27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평화가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도 저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 혹은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번째 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말씀을 드려야 하겠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대개의 사람들은 성탄절을 하나의 축제일로 생각하고, 그 날을 기쁘게 보낼 궁리만을 합니다. 벌써부터 여기저기 크리스마스 장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크리스마스 트리 외에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촛대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실로 성탄절은 우리에게 기쁘고 뜻깊은 절기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성탄절이 그리 기쁜 날일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은 고난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의 탄생도 대개 고생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는 호흡을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태어나도 울지 않는 아기를 보면, 사람들은 엉덩이를 때려서라도 울립니다. 아마도 갑자기 달라진 환경 때문에 아기가 놀라서 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제 고생길이 시작되었구나!" 생각하니 아기도 울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이런 해석이 좀 과장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인생은 고난의 연속임을 막 태어난 아기도 어렴풋이 느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달 동안 아무 걱정도 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엄마 뱃속에서 살다가 갑자기 춥고 낯선 환경에 나오니, 모르긴 해도, 아기는 정말 서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막 태어나자마자 예수님만큼 고생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피난길에 태어나거나 다리 밑에서 태어난 아기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예수님처럼 동물 밥통 속에 누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더럽고 어둡고 차가운 외양간 구유 속으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삶이 고난의 연속임을 말해 줍니다. 탄생으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최고의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난이 어떠하였겠는지 우리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피투성이 되도록, 녹초가 되도록 매와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물과 피를 모두 다 흘리시기까지 대낮의 땡볕에서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몇 시간 동안 높은 나무에 매달리셨습니다. 머리를 찌르는 가시관을 쓰셨고, 양팔과 양발에는 굵은 대못이 박히셨습니다. 허리에는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목마름과 배고픔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치욕과 두려움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아마도 육신의 고통보다 정신의 고통, 영혼의 고통이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느끼신 가장 큰 고통은 고독, 외로움의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를 사랑하고 따르던 모든 제자들마저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양편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리고,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동정하기는커녕,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그들은 예수님을 심하게 조롱하였습니다. 그나마 멀리서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님을 지켜보았지만(막 15:40), 멀리 지켜본 그들이 예수님에게 무슨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은 홀로, 외로이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셔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직 예수님이 홀로 지신 십자가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무거운 십자가를 잠시 매고 간 적은 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혹은 함께 질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생전에도 십자가 형틀에 매여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두 강도가 함께 달렸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육신의 고통도 괴롭지만, 영혼의 고통은 더 괴롭습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동지와 함께, 동족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 속에 죽어갔습니다. 두 강도조차도 같은 운명 속에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직 홀로, 오직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아무도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고난을 덜어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고난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당하는 고통보다 더 심한 고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오직 예수님만이 감수해야 할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직 예수님만이 지셔야만 하는 십자가인 이유는 다만 이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인도에서, 병실에서, 감옥에서, 객지에서, 독방에서, 지하도에서, 다리 아래서 쓸쓸히 죽어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록 그들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고통처럼 처절하고 괴로운 고통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 아마도 우리의 고통일지도 모르는 이런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우리의 고난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남을 위한 고난, 모든 인간들을 위한 고난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대개 우리의 잘못과 죄로 인한 고난이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아무 죄도 없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남에게 거의 유익을 주지 않거나 작은 유익을 주는 고난, 종종 남에게 불행을 끼치는 고난이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거룩한 희생적 고난입니다. 우리의 고난이 가끔은 남과 화목케 하는 역할도 합니다만, 대개는 남을 불편케 하고 남과 불화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과 화목케 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심지어 만물과도 화목케 하는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다만 바라볼 따름이다. 민수기 21장 4-9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 땅을 둘러 가던 도중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다. 우리는 거칠고 맛없는 식물에 질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뱀을 백성에게 보내셔서, 많은 백성을 물어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간청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당신을 불평하여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 기도하여 불뱀들이 물러가게 해 주소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손 치더라도, 광야에서 모두 다 죽어버리면 얼마나 큰 조롱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명대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았고, 뱀에게 물려 죽게 된 사람들이 놋뱀을 쳐다봄으로써,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자신의 죽음을 이렇게 예고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예수님도 광야의 놋뱀처럼 나무에 높이 매달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지셨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형벌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우리의 죄책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시 떳떳이 설 수 있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는 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바라보았듯이, 우리도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 의학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뱀에 물렸으면, 치료약을 주거나 수술해 주어야 옳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더러는 놋뱀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을 다 이해할 순 없습니다. 지식이 해박한 사람들, 심지어 성경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른 해석을 내어놓았습니다. 그 누가 지었던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백만 년이 지나도 알 수 없네, 우리 위해 돌아가신 욕된 죽음을..."이라고 고백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든, 다만 우리가 굳건히 믿어야 할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냥 쳐다보기만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야고보는 말했습니다. 순종과 희생이 없는 신앙은 "싸구려 신앙"이라고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오직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큰 열매를 맺도록, 그리하여 큰 상급을 받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무가 살기 위해서는 영양분을 빨아들여야 하듯이, 죄인이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무는 다만 살아 있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존재하는 것은 많은 열매를 맺어 주인과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도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나무처럼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도 많은 희생과 고난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입니까? (1) 우리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발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뜻을 꺾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영광을 버리는 것,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리고 나누고 섬기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남으로부터 억울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오해와 시기를 받고, 심지어 박해와 죽음까지 받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십자가는 허무한 피조물로서 받아야만 하는 고난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연약성과 제한성 때문에 사고와 질병을 당하는 것, 허무한 피조물로서 남의 종살이를 하고, 끝내는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는 다릅니다. 이 둘을 똑같이 보는 것은 잘못된 신비주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다 못하신 일을 보충하거나 계속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은 이미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처럼 "다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복된 소식을 전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복된 소식대로 살아야 할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 바울은 '그리스의 남은 고난' 혹은 '그리스도의 흔적'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히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있고, 몸에 고난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다만 장식용으로 목에 걸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등에 지기 위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만 몸에 어쩌다 다친 상처만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몸과 마음에 맞고 찢긴 상처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괴로운 짐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괴로워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즐거이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만물의 구원을 위해서 쓴잔을 달게 마시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아버지의 보좌 우편으로 높이 들림을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비록 괴롭지만, 십자가는 성도에게도 많은 유익을 줍니다. (1)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하나님도 바울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고통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육신을 찌르는 가시 때문에 바울은 일평생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바울은 한없이 겸손해졌습니다. (2) 십자가는 성도를 강하게 훈련합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강하게 하려고 낭떠러지 아래 떨어뜨리듯이, 십자가는 우리를 더욱 강한 '그리스도의 병사'로 만들어 갑니다. (3) 십자가는 거룩하게 되는 길, 성화의 길입니다.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만큼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비결은 없습니다. (4) 또한 십자가는 장차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영광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롬 8:17). (5) 십자가는 주님과 깊이 사귈 수 있는 통로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지만, 십자가를 짐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곁에 서게 되고 주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과도 사귐을 나누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성도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뒤따르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과정에서 고난은 어쩔 수 없이 당하는 불운만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행운이기도 합니다. 고난 끝에 부활이 왔듯이, 성도의 고난도 영광으로 끝날 것입니다. 고난 끝에는 고난과는 가히 비교할 수 없는, 해보다 더 밝히 빛나는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고난도 잘 감수해야 하겠지만, 때로는 주님을 위해 고난을 기꺼이 자초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이라면, 아골 골짝과 빈들에도 가야만 하며, 골고다 산까지도 올라가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 어떤 십자가든, 십자가를 피할 방법과 도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벗어버린다고 해서, 몸과 마음이 더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잠시는 가벼워질지 몰라도, 갈수록 더 무겁고 더 괴로운 십자가를 지게 될 겁니다. 십자가는 오직 십자가로써만 이길 수 있습니다(본회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차피 져야 할 십자가라면, 피할 수 없는 십자가라면, 기꺼이, 즐겁게, 감사히 지십시오! 앞서 가신 주님이, 이미 승리하신 주님이 의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려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간절히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우리의 십자가를 함께 져 주시고,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귀찮다 여기지 마시고, 벗어버리지도 마시고, 인내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여러분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매일매일,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기쁘게 잘 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영광의 그 날에 우리가 입은 상처와 우리가 받은 상급을 비교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찬송할 그 날을 미리 바라보면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힘차게 걸어갑시다. 힘내십시오!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