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예수의 지옥행

벧전 3:18-19

2005년 12월 4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평화가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만, 오늘도 계속해서 사도신경에 관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까지 저는 여러 주일에 걸쳐 예수님이 어떤 이유로, 왜 고난을 당하셨는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처절한 고난은 죽음으로 끝맺습니다. 고통이 너무나 큰 경우에는 죽음도 때로는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긴 고통을 견디신 끝에, 마치 안식이라도 하시듯이, 하늘 아버지에게 자신의 영혼(운명)을 맡긴 채,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런 후에 십자가 아래로 내려졌고, 무덤(돌무덤) 안에 안장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예수님이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사도신경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흘 동안 예수님은 어디에, 어떤 상태로 계셨습니까? 부활하실 때까지 무덤 속에서 잠잠히 계셨습니까, 아니면 오른편 강도에게 약속하신 대로 돌아가신 즉시 낙원으로 올라가셨습니까? 우리의 사도신경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만, 원래의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장사되신 후에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말합니다.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들도 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유독 한국교회의 사도신경에는 이 문장이 쏙 빠져 있습니다. 옛날의 사도신경에는 이 문장이 종종 삽입되었다고 합니다만, 지금에 와서는 이 문장이 완전히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예수님이 장사되신 후에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고백은 비교적 늦게 - 4세기에 - 사도신경 안으로 삽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교파마다 이에 대해 서로 엇갈린 해석을 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죽은 자들이 가는 음부(스올)로 내려가셨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는 지옥(게헨나)으로 내려가셨느냐? 음부든 지옥이든, 예수님이 왜 거기로 내려가셨느냐? 그리고 이것이 무슨 뜻이냐? 이런 질문 앞에서 지금도 학자들은 옥신각신,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문장은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까다롭게, 골치 아프게 믿는 것을 싫어하는 한국교회도 바로 그래서 이 문장을 빼버린 모양입니다. 저도 사실 해석하기 까다롭고 부담스러운 이 문장을 건너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시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마저 이 문장을 무시할 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성경이 이를 증거하기 때문이고, 그 다음에는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1) 먼저 예수님이 장사되신 후에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고백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죄의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드러내줍니다. 바깥에서 험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온 사람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는 대충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울 앞에 서 보아야만 비로소 얼굴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험한 세상에서 뒹굴고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 앞에 서지 않아도, 마음이 얼마나 큰 죄로 얼룩져 있는지를, 마음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 서 보아야만 비로소 우리의 죄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고발장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고 심판의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만 우리의 죄가 얼마나 붉고 더러운지 명백히 드러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은 온갖 조롱과 멸시, 채찍과 매질, 가시와 창, 목마름과 고통 등으로 극심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만 육체적인 고통과 육체적인 죽음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 고통도 컸겠지만, 그보다 영혼의 고통은 얼마나 더 컸겠습니까? 동족과 제자들로부터 배반을 당하는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어가기 전에 먼저 정신적으로 죽어갑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정신적으로 단절과 배반, 고독 속에서 돌아가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생명의 기쁨과 인간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보다 더 깊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비록 육체적으로 죽어도,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며 괴로운 죽음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안에서 죽는 자를 복이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

죽음과 지옥은 무엇을 말합니까?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단지 생물학적으로 숨이 끊어지는 것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과 단절된 것을 말합니다. 이를 영적인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다만 육체적인 죽음만을 맛보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도 맛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지옥까지 내려가시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아,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당하신 가장 큰 저주와 형벌, 고통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감당하신 고난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큰 만큼 우리의 죄악도 얼마나 큰 지가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큰 만큼 우리의 허물도 얼마나 큰 지가 폭로되었습니다. 우리의 죄의 결과는 이처럼 심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치르신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죄를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죄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예수님의 깊고 큰 고난을 생각하면서, 유혹을 과감히 떨쳐 버리십시오.

 

(2) 둘째로 예수님이 장사되신 후에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고백은 예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죽음과 지옥도 예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자들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도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계 1:18). 그러므로 이 세상이 살기 괴로워서, 이 세상에서 지은 죄가 많아서,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싶다고, 목숨을 끊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죽어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뵈어야 합니다. 죽는다고, 죄인이 죄를 다 씻지는 못합니다. 죽는다고,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죽는다고, 죄인이 완전한 안식과 위로를 누리지 못합니다. 죽음 속에서도 죄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듯이, 죽음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죄는 더욱 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죄인은 죽음으로 처벌을 면제받지만, 하나님 앞의 죄인은 죽어도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예수님이 장사되신 후에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고백은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맛보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나라, 아니 지옥까지 내려가셨다는 것은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성도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우리는 다만 죽어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바로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있습니다. 천국은 여기 혹은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이처럼 지옥도 다만 죽어야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바로 지금도 우리는 지옥을 맛볼 수 있습니다. 지옥도 여기 혹은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곳, 하나님을 거역하는 곳,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곳,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자기 욕심대로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곳에는 어디든지 지옥이 있습니다. 미움과 살인, 억압과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서 우리는 지옥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종종 지옥과 비슷한, 아니 지옥과 같은 현실이 등장하는 이 세상에서 온갖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성도에게 예수님이 장사되신 후에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위로를 줍니다.

세상에서 성도가 아무리 큰 환난을 당해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난에 처한 성도에게 예수님은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바로 죽음의 환난, 지옥의 환난까지 이기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환난을 이기신 예수님 안에서 모든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지옥까지 내려오셨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고난이 얼마나 깊은 지를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나라, 지옥까지 오셔서 죽음과 지옥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환난을 이기신 예수님은 환난 중에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5-57).

그리고 예수님이 지옥까지 내려오셨다는 것은 또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은 지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사랑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 중에도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소망 중에 늘 즐거워하십시오.

 

(3) 셋째로 예수님이 장사되신 후에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고백은 예수님의 구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사실도 잘 드러내줍니다.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베드로전서 4장 6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구원의 효력이 죽음과 지옥에까지 미친다고 하니, 예수님의 사랑은 참으로 크고도 놀랍습니다.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예수님을 지옥에까지 보내셨고,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나, 예수님을 알아도 믿지 못했던 완강한 죄인들까지도 구원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처럼 죽음도 하나님의 사랑은 막을 수 없으며, 불신과 지옥도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시험을 받거나 항의를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 기회가 전혀 없던 사람들에게는 죽고 난 후에 구원을 받을 기회를 주는 것은 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고도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까지 다시 기회를 준다면, 누가 굳이 살아서 믿으려고 하겠느냐? 일찍 믿은 사람은 억울하지 않는가? 그리고 불신자에게 전도할 이유와 힘이 빠지지 않는가? 이런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설령 좀 억울하더라도, 만약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항의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살아서 믿는 것이 죽어서 믿는 것보다 얼마나 더 행복한가? 어차피 모든 사람이 질병에서 낫는다고 해서, 지금 낫거나 나중에 낫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가? 그처럼 살아서 구원을 받거나 죽어서 구원을 받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늦게 구원을 받는 것보다 일찍 구원을 받는 것이 얼마나 더 유익한가?

그렇습니다. 더 일찍 예수님을 믿을수록 그 만큼 더 많은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더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어서도 다시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그 때까지 미루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있을 때 잘 해"라는 말처럼 살아 있을 때, 잘 믿으십시오. 힘이 있을 때 선한 일을 많이 하십시오. 예수님의 깊고 크고 넓고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의 생애 동안,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난 다음에도 영원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니 분명히 그러하리라 굳게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