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부활의 소망

사 26:19

2005년 12월 11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평화가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대강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만, 오늘도 계속해서 사도신경에 관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까지 저는 몇 차례에 걸쳐 예수님의 고난에 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운명은 고난과 죽음, 지옥행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기독교 신앙과 교회도 완전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혼자 버려 두고, 황급히 멀리 도망쳤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의 운명이 죽음과 매장으로 끝나버렸다면,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도 완전히 죽고 매장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던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흘만에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이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뿔뿔이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으며, 비겁한 그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다시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리하여 죽은 예수님의 부활처럼 죽은 신앙, 죽은 교회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부활 사건은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임과 동시에 기독교의 영원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십자가 못지 않게 부활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종교는 많지만, 부활의 종교는 많지 않습니다. 영혼 불멸을 믿는 종교는 많지만, 육신의 부활을 믿는 종교는 매우 드뭅니다. 더욱이 부활한 모습으로 나타난 분은 오로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불신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아마도 성탄절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어린이들은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고, 어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카드와 선물을 기다립니다. 불신자의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즐거운 공휴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이 가져오신 가장 큰 선물은 한 마디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은 다만 영혼의 구원 혹은 영생만이 아닙니다. 구원은 그보다 더 큰 것입니다. 구원은 총체적인 것입니다. 구원은 영생만이 아니라 용서, 평화, 화해, 해방, 치유, 새 창조 등을 포함하는, 참으로 크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다만 십자가를 통해서만 오지 않습니다. 구원은 부활을 통해서도 옵니다. 실로 구원은 예수님의 모든 활동을 통해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만을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듯하고, 십자가만을 너무 강조하는 듯합니다. 아마도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전 2: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그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그처럼 열렬히 전파한 바울도 그와 못지 않게 부활도 뜨겁게 사랑하고 열렬히 전파하였습니다. 물론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부활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었더라면, 십자가도 힘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 이 두 가지 사실 어느 하나만을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비록 부활을 십자가처럼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내기는 어렵더라도, 우리는 이 둘을 함께 보고, 이 둘을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만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에도 참여하게 될 것임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부활만큼 참으로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부활만큼 참으로 기독교인을 기독교인답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다만 사랑에만 뿌리를 내리지 않고, 소망에도 뿌리를 내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만이 아니라 소망의 종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인은 사랑이 가득한 사람만이 아니라 소망으로 가득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십자가로부터 온다면, 소망은 부활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은 대강절 기간이지만, 순서에 따라 몇 번에 걸쳐 부활에 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대충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부활을 못 믿겠다면, 예수님도 믿지 말고, 하나님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을 안 믿어도 좋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은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신앙과 교회의 사활이 걸려 있는 것으로서 반드시 믿어야 할 사항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습니까? 죽은 자의 부활을 어찌 믿을 수 있습니까? 왜 우리는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에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 사건 때문에 부활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부활 신앙 때문에 부활이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는 신앙이 없었더라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부활 신앙이 없었더라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하였을 것입니다. 너무 피로해서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귀신에 홀렸다고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참만에 제 정신을 되찾은 제자들은 그래서 고향으로 되돌아가 옛날에 하던 일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을 씁쓸하게 떠올리면서, 조용히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제자들은 다시 돌아왔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부활을 전파했습니다. "부활의 증거를 보여달라"고 떼를 쓰던 사람들에게도 부활을 힘차게 전파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신들의 말을 믿어달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부활의 증인을 믿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다만 제자들이 믿음직해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직접 나타나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물론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을 믿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만큼 전능하신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보지 못하고도 믿는 복있는"(요 20:29)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만이 보지 못하고 부활을 믿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부터 이미 부활을 믿어온 신앙의 증인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오늘은 구약성서의 부활 신앙을 통해 부활의 진리로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합시다.

이스라엘의 옛 족장들은 죽음을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젊을 때에 죽거나 타지에서 죽는 것은 애통하지만, 하나님을 신앙하다가 나이가 들어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곡식이 익으면 자연히 땅에 떨어지듯이, 죽음도 그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욥 5:26). 하지만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그림자, 아침 이슬, 허무한 잡초, 흘러가는 물처럼 덧없다. 살아 있는 개가 차라리 죽은 사람보다 낫다(욥 9:4).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의 운명은 짐승의 운명과 다를 게 없다. 모두가 티끌에서 왔다가 티끌로 돌아간다(전 3:18-21).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믿음의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죽음이 모든 것의 끝장일까? 만약 하나님이 생명과 죽음의 주님이시라면, 왜 하나님과의 사귐이 죽음으로 끝장나야 할까? 왜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더 이상 생각하시지 않고, 왜 죽은 자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찬양하지 못할까? 만약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님이시고 창조자이시라면, 하나님과의 사귐은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영생에 대해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모하는 몸을 썩게 내버려두시지 않는다(시 16:9-11). 죽은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시 73:23-26).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영생을 확신한 것은 몸이 썩은 후에도 썩지 않는 영혼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들만을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도 통치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시 22:29-30).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나라에는 죽음과 같은 한계선이 있을 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래에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사 25:6-8).

믿음의 사람들이 영생과 부활을 소망하게 된 것은 "죽고 싶지 않다"는 생존본능 때문도 아니고,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 때문도 아닙니다. 부활의 소망이 생겨난 것은 무엇보다도 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죽은 의인들과의 사귐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더욱이 의인들과 죄인들이 다같이 죽음으로 끝장난다면, 공의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가운데서 믿음의 사람들은 영생과 부활을 확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다니엘서는 부활의 신앙을 강하게 불러 일으켰습니다. 박해의 시대에 경건한 자들은 힘없이 죽어갔고,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은 번성했습니다. 사악한 자들은 처벌을 피하였고, 충성된 자들은 아무런 보답도 누려보지 못한 채 괴롭게 죽어갔습니다.

이런 시대에 기록된 다니엘서는 불의한 자들에게 다가올 심판과 의로운 자들에게 다가올 구원을 선포합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1-3).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 활동하였던 이사야 예언자도 부활의 날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사 26:19).

그리고 외경에 속한 마카비(II)서도 부활에 관한 소망을 생생히 전파합니다. 헬라 왕이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에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이 때에 일곱 명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어머니는 안티오쿠스 왕에게 고문을 받고 죽었는데, 젊은이들은 차례로 자신들의 부활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우주의 왕께서 우리들을 영원히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키실 것입니다"(7:9).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다시 일으키시리라는 희망으로 즐거워합니다"(7:14). 그들의 어머니도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너희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다시 주실 것이다"(7:23). 이 본문은 부활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돌려주실 것임을 굳게 믿고, 부활의 희망을 고백합니다(7:29).

만약 부활의 소망이 없었더라면,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과 박해의 시기를 능히 극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더라면, 믿음을 지키기조차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의로우시고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부활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현대인처럼 "어떻게든지 오래 살고 싶고, 목숨을 최대한 연장시켜 보겠다"는 허무한 욕망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위로와 희망입니다. 설령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부활한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부활은 심판을 위한 부활이므로 위로와 희망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부활을 믿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만 오래 살고 싶어서, 죽기 싫어서 부활을 믿는 어리석은 사람만은 되지 마십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므로 부활도 아울러 믿으시길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당신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을 썩도록 내버려두실 분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므로 부활도 아울러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신실해도 무능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므로 죽은 자들도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므로 아울러 부활도 믿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을 믿으므로 부활도 아울러 믿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는 공의가 완전히 실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기 위해 언젠가 죽은 자들을 다시 불러들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형편과 처지가 어떻든지,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믿으시는지를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일에만 매어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상대적인 신앙인이 되지 마십시오.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늘 웃는 절대적인 신앙인이 되십시오. 역경 가운데서도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늘 기뻐하십시오. 아니 역경을 부활의 소망으로 이겨 나가십시오. 그 나머지는 부활의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을 져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소원대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여러분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롬 15:13)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