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부활의 의미(1)

 

고후 5:17

2006년 1월 1일, 현풍제일교회



새해를 맞이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묵은해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시간은 미래로 흐릅니다. 흘러간 물에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듯이, 지나간 해를 다시 붙잡을 수 없습니다. 지난 일이 아무리 그립고 아쉬워도, 지난 일을 아무리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묵은해와 함께 묵은 것들도 다 흘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밝고 희망찬 새해가 밝아 왔으니, 묵은 감정은 훌훌 털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묵은 짐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 다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묵은 생각은 과거와 함께 까마득히 잊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몸은 날로 연약해지고 무거워질지라도, 마음만은 날로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저는 두 번에 걸쳐 부활에 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먼저 예수님의 부활은 현세의 생명으로 되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체, 혹은 거의 돌아가실 뻔한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소생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다 돌아가시지 않고 기절하신 상태로 차가운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무덤 속에서 소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스스로 무덤을 걸어나오셨거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른 데로 옮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정말이라면, 예수님은 잠시 동안은 다시 살아 활동하실 수 있었겠지만, 머잖아 또 다시 돌아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소생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되셨습니다. 다치기 쉽고 상하기 쉽고 죽기 쉬운 옛 생명에서 다치지 않고 상하지 않고 죽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새로워지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육신 안에 있던 영혼이 죽음과 함께 빠져나가 영적인 존재로 영생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상은 유대인들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 헬라인으로부터 내려온 사상입니다. 흔히 이를 이원론(二元論)이라고 합니다. 이원론이란 무엇입니까? 육신은 허무하고 악하고 더럽지만, 영혼은 영원하고 선하고 아름답다는 사상입니다. 이처럼 육신과 영혼을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람들은 육신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육신을 영혼이 입는 옷 혹은 영혼을 가둔 감옥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이 바라는 구원은 육신의 옷을 미련없이 훌훌 벗어버리는 것, 육체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발견한 흔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영혼이 빠져나간 예수님의 육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육신을 감싸고 있던 하얀 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셨습니다. 완전히 돌아가신 예수님은 완전히 새롭게 부활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정신과 예수님의 사업이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돌아가셨지만, 그분의 거룩한 뜻과 그분이 하시는 위대한 사업이 계승되고 발전되는 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이 땅에는 훌륭한 일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을 추도하고 기념할 때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지금 죽지 않고 살아 계십니다. 우리 마음에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예컨대 노동자의 권리를 찾으려고 분신자살을 시도한 전태일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전태일 열사는 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서울시가 청계천을 새롭게 단장하여 수로와 새 다리를 만들 때, 전태일이 분신한 자리에 그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이처럼 그는 죽었지만, 그의 동상은 남아 있습니다. 그는 아주 갔지만, 그의 정신과 그의 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부활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정신과 사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실제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실제로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부터 몇 차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방금 말씀을 드렸다시피,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생명, 죽지 않을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아가셨습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로, 영적인 세계로 옮아가셨습니다. 영적인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신비의 세계로 옮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영적인 차원으로 옮아가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뛰어넘으실 수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하여,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가 갑자기 예루살렘에 나타나실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닫혀진 문으로도 들어오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존재로 변화되셨지만, 귀신이나 유령과 같이 몸이 없는 영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보여질 수도 있었고, 만져질 수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음식을 드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몸은 창조 세계에 속합니다. 우리가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 아니 우리가 바로 몸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모든 피조물의 하나로서 모든 피조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의 몸이 태어나기까지는 수많은 피조물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은 부모님의 몸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계속 성장하고 유지될 수 있기 위해서는 공기와 햇빛과 물과 음식 등으로부터 많은 양분을 취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은 온 세상, 온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귀하신 몸, 아무리 잘나신 분이라도 해와 공기와 물과 음식과 가족과 이웃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처럼 몸이라는 것은 온 세계로 나아가는 창문이요, 온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온 세계가 새로운 존재로 다시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임을 믿고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온 만물, 온 피조물이 새롭게 창조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가 된 자,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변할 것입니다. 아니 이미 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만 생각과 태도, 생활 방식이 바뀐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해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새로운 존재가 되었고, 더 새로운 존재로 되어 가는 중에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온 세계가 새로워지는 것, 온 세계의 부활은 종말에 가서야 일어날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 안으로 돌입하였습니다. 죄악과 죽음이 가득한 어두운 땅에 이미 영광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종말에 가서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부터 이미 여기서,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입니다. 오늘 보는 태양은 어제 본 태양과 다릅니다. 오늘 보는 만물은 어제 본 만물과 다릅니다. 만물은 마지막 부활, 마지막 영광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만물이 신음하고 탄식한다고 말합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1-23). 이처럼 만물도 몸의 구원, 만물의 부활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물은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은 지금도 새롭게 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 인심과 제도와 사상이 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날로 새롭게 만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밧모 섬에 갇혔던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보았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하나님이 만물을 날로 새롭게 하신다면, 그리스도인은 보수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보수주의(保守主義)는 옛것과 지금의 것을 무조건 지키려는 태도입니다. 만약 옛것이 허물어지면, 새것으로 바꾸지 말고 보수(補修)하고 수리(修理)하려는 태도입니다. 옛것을 계속 땜질할망정, 새로운 것으로 바꾸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만물을 날로 더욱 새롭게 만들어가십니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이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전 1:9)고 말했다고 해서, 정말 해 아래, 이 땅에 새 것이 없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허무한 인생을 빗대어 던지는 말이지, 말 그대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솔로몬만큼 새로운 외국 문물과 사상을 많이 받아들인 사람이 없습니다. 실로 사람의 생각과 행동, 세상의 전통과 제도는 변해갑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온갖 사상이 번갈아 나타나고, 새롭게 발전하였습니다. 인간의 제도와 나라도 계속 바뀌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자연 만물도 계속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고, 만물이 옷같이 나타난다"(욥 38:14)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재림과 만물의 변화를 부인하는 자들을 향해 이런 말을 합니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4-5). 다시 말하면, 새로운 창조를 부인하는 사람은 첫 창조도 부인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왜 이 세계가 존재하고 있을까? 이 세계가 어디서 왔을까? 이 세계를 누가, 왜 만들었을까? 나는 왜 존재할까? 누가, 왜 나를 만들었을까? 이 세계와 제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이 세계와 제가 새롭게 변해간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습니다. 먼 우주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지식은 너무나 적습니다. 지구만을 두고 생각해 보면, 욥의 말대로 땅은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에 태양으로부터 지구가 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지구도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불덩어리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지구는 점점 식어졌고, 땅과 바다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생명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불덩어리와 같은 지구에서, 생명이 없던 곳에서 생명이 생겨났다니, 얼마나 신기합니까? 한 동안 식물과 동물이 번창하다가, 그리고 어마어마한 덩치의 공룡이 지구를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작은 체구의 인간이 생겨났습니다. 동물과 닮은 구석이 많으면서도 동물과 닮지 않은 구석도 많은 신기한 인간이 지구를 거닐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 생겨난 이래 문명과 문화는 급속도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더 이상 변할 수 없는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인간도 새로운 피조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장차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 것입니까? 과학자들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도록 지음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욥의 말대로 티끌과 같고 진흙, 진토, 먼지와 같은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모습으로 닮아갈 수 있다니, 얼마나 놀랍고 신기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을 본받음으로써 그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본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모습을 본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 인간은 늘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늘 새롭게 변해가야 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바로 그리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롬 12:2).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본능대로만 살아가는 동물의 모습에서 양심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에 따라서만 살아가는 죄인의 모습에서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도록 늘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장차 우리도 순식간에 신령한 존재로 부활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늘 말씀과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창조의 영"이신 성령을 항해 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창조의 영이여!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은 가까이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성령이 여러분도 새롭게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를 그리워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더욱이 과거에 매여 괴로워하는 불쌍한 사람도 되지 마십시오. 그리고 현재에 만족하는 배부른 돼지가 되지 마십시오. 더욱이 현재로 인해 불평하고 절망하는 어리석은 바보가 되지 마십시오. 오직 미래만을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신 소망의 주님만을 바라보십시오. 바로 그리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어려움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이 당하는 어려움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롬 8:18).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장차 받을 영광은 더욱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소원대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여러분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롬 15:13)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