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부활의 의미(2)

마 5:10

2006년 1월 15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부활에 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시 죽어야 할 생명으로 되돌아온 것, 시체의 소생도 아니고, 썩을 몸에서 썩지 않을 영혼이 빠져나간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정신과 사업이 계속되는 사건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어야 할 생명이 죽지 않을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무(無)로부터 유(有)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다시금 덧없고 허무한 생명으로부터 영원하고 충만한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라고 말할 수 있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세계도 새롭게 창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이 세계의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실현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통치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 30:18).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사 45:21).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사 51:4).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사 61:8).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암 5:24).

공의의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종을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도 마땅히 공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1-4).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마땅히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기도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게도, 공의를 실현하려고 오신 바로 그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은 불의한 자로 낙인찍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서 볼 때, 예수님은 처형되고 제거되어야 할 불량하고 불순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양편 십자가의 죄수들과 더불어 죄인의 한 사람으로서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젊은 나이에 그토록 처참한 사형을 당할 만큼 불의한 분이었습니까? 힘있는 권력자들과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들과 어리석은 민중들이 그렇게 낙인을 찍으면, 힘없고 볼품없고 고독한 예수님은 그렇게 당할 도리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의조차 제대로 못하셨지만, 항의를 하셨다고 해도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로마 권력을 위협하는 정치적인 위험분자로 낙인찍힌 상태였고, 율법을 범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낙인찍힌 상태였으며, 민중의 이익을 외면하는 반사회적인 존재로 낙인찍힌 상태였습니다. 제자들마저 뿔뿔이 도망하였고, 멀리서 여인들만이 눈물로 지켜보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이 무거운 낙인을 어떻게 벗으실 수 있었겠으며, 홀로 어찌 도망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돌아가셨다면, 다시 말하면,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세상 사람들이 찍은 낙인은 정당한 낙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저주와 형벌의 증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전파하시던 하나님의 공의도 별것이 아닌 것, 아니 휴지처럼 조각조각 찢어지고 구겨지고 불태워지는 허무한 망상, 불교 용어로 말하자면, 공염불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 어리석은 실패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만을 믿고 살다가, 아니 하나님에게 속아서 살다가 실패한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간 불쌍한 젊은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으로 인생과 활동을 마감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예수님이 갑자기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 속에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전파하던 의인을 그냥 썩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죽음 속에 매장된 하나님의 공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로써 공의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불의한 자로 낙인찍어 죽인 자들이야말로 바로 불의한 자들이었고, 불의한 자로 낙인찍혀 돌아가신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의로운 자였음을 만천하에 증명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옳다"는 인정을 받으셨고, 이로써 하나님도 스스로 자신이 옳은 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공의가 승리한 사건입니다.

무엇이 잘 사는 것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사람은 왜 태어났습니까? 사람은 돌멩이와 나무 막대기처럼 멍청하게,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사람은 동물이나 식물처럼 본능대로, 욕망이 끌어가는 대로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은 모름지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도 공의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무엇이 공의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 문제에 늘 부닥칩니다. 마구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고, 본능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다만 성공하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옳게, 바르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로 사는 것입니까? 대개 세상 사람들이 만든 기준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먼저 "힘이 곧 정의"라는 원리가 있습니다. 정의가 힘이 아니라, 힘이 정의라는 말입니다. 대개 이 세상은 힘있는 사람이 법을 만들고 세상을 지배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대개 힘없는 사람들은 힘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당시에 가장 힘있던 로마 권력에 따라서 사는 것이 정의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 권력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지배하는 자가 높은 자가 아니라 도리어 섬기는 자가 높은 자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권력을 무력하게 만드셨습니다. 막강한 권세를 행사하던 로마 황제를 아주 낮은 자처럼 취급하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포악하고 높은 권세들을 내리치셨고, 지금도 내리치시며, 심판 날에는 완전히 내리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될 것입니다.

(2) 둘째로, "법이 곧 정의"라는 원리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법치주의 사회입니다. 법을 지키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고, 법을 안 지키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가장 높은 법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따라 충실히 사는 사람이 곧 의로운 사람이었고, 율법을 모르거나 범하는 사람은 죄인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셨습니다.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의로운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사람이 곧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 사람이 획득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 당시에 율법을 충실히 지키던 사람들의 기준을 뒤집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내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3) 셋째로 "돈이 곧 정의"라는 원리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돈은 매우 큰 힘을 가졌습니다. 돈으로 힘있는 사람을 매수할 수 있고, 재판도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힘없고 법을 잘 모르는 대중들은 돈을 가장 좋아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민중의 가장 큰 관심은 재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빵을 주실 때에는 민중은 예수님을 잘 따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빵을 잘 안 주시거나 심지어 자신의 이익과 상반된 행동을 하실 때에는 민중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비록 민중이 지도자의 선동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민중의 눈으로 볼 때도 예수님은 차라리 '바라바'보다도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물질의 필요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것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재물이 인생의 우선 가치, 기도의 우선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럴 때에 비로소 재물도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힘, 법, 돈이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곧 정의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결국 힘있는 자, 율법주의자, 돈을 따르는 민중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불의한 자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와 행동이 결국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일으키셨고, 높이 세우셨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당하신 예수님을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분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따르시던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아니 공의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지키신 예수님에게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옳은 길입니다. 이것이 곧 의로운 삶입니다. 이것이 곧 승리의 비결입니다.

하지만 승리하신 예수님은 육신을 지닌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는 않으셨지만, 우리처럼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최후의 유혹과 시험을 당하셨고,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고, 괴로운 고통과 죽음을 면하려고 십자가를 걷어차시지 않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다만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단 한번 치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시험을 당하셨고, 그래서 일평생 시험을 당하는 우리 편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시험을 이기셨고, 그래서 우리에게도 죽기까지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은 실로 십자가에 이르시기까지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의 축소판입니다. 광야에서 마귀는 예수님을 무엇으로 시험하였습니까?

(1) "돌로 빵을 만들어 보아라!" 이것은 인간의 본능에도 충실할 뿐만 아니라 민중의 인기에 영합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일을 잘 해 나갈 수 있다는 시험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빵과 돈, 물질이 있어야 하지만, 사람이 이것으로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기준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불의한 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아닙니다. 아니 이것은 잠시는 성공하는 길인 것 같아도 결국에는 실패하는 길입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싸워왔지만, 깊이 알고 보면, 모두가 돈과 재물을 주인처럼, 우상처럼 모시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은 문명, 우상을 섬기는 문명은 결국 패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복은 영원무궁할 것입니다.

(2)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두 번째 시험은 무엇입니까? "성전 꼭대기 위에서 뛰어내려 보라!"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의 용기와 담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여라, 너의 능력을 과시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와 같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 율법을 행하면,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그를 번성케 하신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오지 못합니다. 사람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의 응답이고, 은혜에 대한 믿음의 표시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려고,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이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하나님과 인간들 앞에서 교만하게 만듭니다. 만약 자랑할 것이 있다면, 바울의 말대로 주 안에서 자랑할 것입니다(고후 10:17). 가급적 자랑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부득불 자랑하려면, 바울의 말대로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고후 11:30). 그리고 만약 선한 일을 행했다고 하면, 베드로의 말대로 오직 하나님이 공급하신 힘으로 한 것 같이 말해야 합니다(벧전 4:11).

(3) 마귀는 세 번째로 예수님에게 "세상의 영광을 다 줄 테니 자신을 경배하라!"고 시험하였습니다. "화려하고 높은 세상의 권력을 다 줄 테니, 하나님을 경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귀는 자신이 세상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괴롭고 힘든 이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일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포악한 이방 민족들이 사탄의 지배 아래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어서 빨리 망하기를 기다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괴로운 세상이라도, 예수님은 "이 세상이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나라는 잠시뿐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더 이상 착취와 지배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믿고, 구하고, 찾고, 실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불의에는 절대로 굴복하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자가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음도 실패하였습니다. 죽음도 예수님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은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도 예수님을 따라 권력(힘)과 율법(나)과 민중(돈)을 믿지 마십시오. 그것들과 더불어는 살되, 그것들을 이용할 수는 있되, 그것들에게 끌려가며 살지 마십시오. 더욱이 그것들에게 굴복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공의만을 따르십시오. 잠시는 어리석어 보여도, 잠시는 실패하는 것같이 보여도, 이것만이 영원히 잘 사는 길입니다. 이것만이 영원히 잘 되는 길입니다. 이것만이 영원히 승리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도 예수님의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아니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늘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