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부활의 의미(4)

 

고전 15:51-58

2006년 2월 12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였다는 사실을 배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였다는 사실을 배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만인과 만물의 부활을 가능케 한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배우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부활은 문자 그대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죽음은 그 마지막 힘을 잃었습니다. 죽음은 이제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좋아서 날 뛸 만큼 기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땅을 치고 통곡할 만큼 슬픈 일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예수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계 14:13).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을 죽이셨고, 그래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의 죽음은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편히 안식하는 복된 죽임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은 아직도 완전히 죽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계속 죽어야 하고, 죽음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죽음은 다만 죽어 가는 자들에게만 힘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오히려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죽음은 죽은 자들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더 강력히 지배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오직 살아 있는 자만을 넘어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세력은 지금도 쉬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을 사로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며, 곳곳마다 죽음의 문화와 죽임의 방법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사망의 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바울은 사망이 "쏜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우리를 쏘는 것들이 주위에 많습니다. 우리는 주로 벌에게 자주 쏘입니다. 벌에 쏘이면 따끔하고 열나고 붓습니다. 때로는 애석하게도 벌에 쏘여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벌에 쏘이지 않도록 늘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조그만 벌에 쏘여 괴로워하고 죽는 것을 보면, 사람도 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남에게 한턱을 낼 때, "쏜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재미있는 표현입니다만, 무슨 이유로 이런 표현이 들어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젊은이들이 총을 쏘는 컴퓨터 게임을 자주 해서 그런지, 아니면 군대에서 총을 쏜 기억이 나서 그런지, 좌우간 "쏜다"는 말은 원래 좋은 뜻을 지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활을 쏘든, 총을 쏘든, 남을 괴롭히고 죽이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말도 총을 쏘듯이 빨리 하다보면, 실수하기 쉽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기 쉬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가급적 남을 겨냥해서는 말이라도 쏘지 마십시오.

바울이 "사망이 우리를 쏜다"고 하는 것도 분명히 나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망이 우리를 겨냥해서 무엇을 쏜다는 말입니까? 사망이 쏘는 것은 곧 죄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망은 곧 죄의 삯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그런데 죄는 무슨 힘을 갖고 있기에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죄의 힘은 율법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곧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율법이 없다면, 사람은 무슨 죄를 짓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율법이 어떤 행위를 금하지 않았다면, 그런 행위를 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만약 율법이 없다면, 율법이 금하는 것을 해 보려는 욕심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율법이 없다면, 죄도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이 옴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율법 앞에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육체의 죽음은 연기되었다고 하더라도, 죄로 말미암아 사람은 영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를 "둘째 사망" 혹은 "불못"(계 20:6, 20:14, 21:8)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사람을 병들게 하고, 영원히 죽게 합니다. 그리고 죄는 남들도 병들게 하고, 남들도 죽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가장 강력한 죽음의 힘입니다. 죄는 가장 치명적인 죽음의 독입니다. 죄는 가장 예리한 죽음의 화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율법과 죄의 힘은 완전히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이 쏘는 화살도 완전히 꺾이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죄와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들에게는 죄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될 사람들에게 죽음은 완전히 힘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7). 이제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우리를 괴롭히고 두렵게 하는 힘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제 물불과 창검, 환난과 핍박은 물론이거니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도야말로 죽음을 두려워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왕보다 존귀한 자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지 않거나 주님을 멀찍이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아직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죽음은 수많은 사람들을 쏘고 있습니다. 만약 죽음에 쏘이게 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어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벌벌 떨며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주로 화재나 지진 혹은 전쟁과 살상과 같은 큰 재난을 겪고 난 사람들은 깊은 정신적인 공포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어렵습니다. 이를 의학적으로 "외상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예컨대 최근에 대구 지하철에서 간신히 살아난 사람들은 육체적 고통도 크지만 그보다는 더 큰 고통, 정신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죽은 사람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죽음의 공포만이 전부는 아니므로 죽음의 공포를 제거한다고, 그들의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은밀한 공포, 가장 큰 공포,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가장 괴롭히는 공포는 바로 죽음의 공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쉽사리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생각날 때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를 드립시다. 이것은 성도의 거룩한 의무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충격적으로 받지 않은 사람들도 대개는 늘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 중에서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죽을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동물은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히기 직전까지는 죽음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며, 그래서 평소에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물은 죽음의 공포를 쉽게 잊어버리고, 어떤 동물들은 자기를 잡아먹을 다른 동물에게 태연히 다가갑니다. 하지만 사람은 죽음을 늘 의식하고 삽니다. 죽음이 다가올 때만이 아니라 죽음이 전혀 다가오지 않을 때에도, 심지어는 기쁘고 행복할 그 순간에도 사람은 죽음을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은 동물보다 더 위대하면서도 동물보다 더 불쌍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언젠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만사가 한꺼번에 허무한 것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삶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을 바둥바둥 살아서 무엇 하느냐?"는 생각 때문에 만사를 냉담하게 대하거나, 만사를 경멸하게 됩니다. 남들이 잘되든 못 되든, 남들이 죽든 말든, 무관심하게 됩니다. 죽음은 이렇게 사람을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죽음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가급적 죽음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병자들과 망자들을 가급적 안 보려고 눈을 돌리고, 그들을 잘 안 보이는 곳으로 멀리 떼어놓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눌려 버리려고 그들은 쉽사리 향락과 오락에 몸을 던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헛되이 발버둥칩니다. 그리고 죽지 않으려고, 그리고 가급적 오래 살려고 어떤 사람들은 별별 짓을 다 합니다. 남을 괴롭히고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심지어 남을 죽여서라도 자신만은 오래도록, 영원히 살려고 헛되이 발버둥칩니다. 오래 살 수 있게 해 주는 음식과 약품과 재물과 권력을 얻기 위하여 그들은 온갖 범죄도 태연히 저지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들은 죽음을 조금 더 연기할 수는 있겠지만, 죽음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을 억누르면 누를수록 아마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완강히, 더욱 헛되이 죽음에 저항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그들은 남들을 더 많이 희생시키고, 자신의 생명도 더 많이 갉아먹게 됩니다. 녹초가 될 때까지, 죽음에 완전히 항복할 때까지 그들은 추한 생명을 이어갈 것입니다. 그들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집니다.

이처럼 죽음이 쏘는 고약한 화살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죽음의 화살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사람들을 크게 위축시킵니다. 죽음 때문에 허무주의에 빠지게 합니다. 죽지 않으려고 악하고 헛된 짓을 일삼게 합니다. 이와 같은 죽음의 고약한 화살을 맞지 않으려고 꾀를 부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죽음의 화살을 피하면 피할수록 오히려 화살을 더 많이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똑똑한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택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현실을 용감히 직시합니다. 그래서 어차피 죽을 인생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허무하다고 여겨 탕진하기보다는 짧은 인생이지만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죽으면 모든 게 끝장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오늘을 소중하게, 충실하게 살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솔직히 죽음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는 삶을 소중히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죽음을 인정하지 않거나 죽음을 제 힘으로 이겨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손과 업적을 통해 자신의 씨앗과 이름을 오래 남기기를 원합니다.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될 사람으로 남기 위해 그들은 대개 훌륭한 자손을 기르고 훌륭한 일을 하려고 애씁니다. 그리하여 비록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자손과 정신은 오래 남아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와 추도식, 기념일을 통해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살아서 영향력을 주는 사람처럼, 마치 영원한 사람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죽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은 죽음에 진 사람입니다. 역사에서 죽음을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을 이기셨고,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홀로 부활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그 다음에도 계속 부활의 열매가 열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뒤따라 실로 많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의로운 자들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죄인들도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 되실 것이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을 애써 부인하지 말되, 그렇다고 죽음을 찬양하지도 맙시다. 심지어 죽음이 절대적인 것처럼 죽음을 우상처럼 떠받들지도 맙시다. 아니 죽음의 우상을 쳐부숩시다. 죽음의 화살을 맞지 말고, 믿음의 방패로 죽음의 화살을 막읍시다. 아니 부활의 소망으로 죽음의 화살을 꺾어 버립시다. 이제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맙시다. 죽음 때문에 허무와 체념에 빠지지도 맙시다. 더욱이 육체의 죽음을 연장하려고 헛되이 몸부림을 치지도 맙시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과 장차 죽을 우리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니, 사도 바울의 권고대로 부활의 소망 안에서 굳게 서고, 이리저리 흔들리지 맙시다.

아니 부정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소망으로 가득한 행동을 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합시다. 이 땅에서 수고한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눈물과 수고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롱한 보석으로 길이 빛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됩시다. "사랑은 영원하다"고 했으니,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하나님을 든든히 붙잡고 의지합시다.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가고 모든 소망이 다 사라지더라도, 주님이 던져주신 소망의 밧줄만은 든든히 붙잡읍시다. "죽음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죽음의 공포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주님을 크게 찬양합시다. 하늘 나라에서는 웃음이 넘치고 있으니, 우리도 이 땅에서 크게 웃읍시다. 죽음을 크게 비웃고, 영생을 맛보며 환하게 웃읍시다. 봄이 가까이 오니, 벌써부터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생명은 언젠가 반드시 시들고, 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약속하신 생명은 다시는 다치거나 상하거나 죽지 않을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이 시작하신 생명의 노래와 웃음이 지금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크게 웃읍시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