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소망으로 거듭나라!

벧전 1:3-4

2006년 2월 26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여러분에게 "웃고 또 웃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죽음과 절망을 비웃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부활하기 시작한 만물이 웃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 한 주간은 제 생애 동안 가장 많이 웃었던 주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웃고 또 웃어라"고 권고하였던 제가 솔선해서 웃지 않는다면, 지나가는 개도 웃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지난 한 주간 동안 제게 특별히 웃을 만한 좋은 일이 생겼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가슴으로, 아니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진심으로 웃어 보려고 애썼습니다. 과거에는 그저 무심히 쳐다보던 만물이 정말로 웃는다고 확신하면서, 나도 함께 웃어 보려고 애썼습니다. 멋지게 나는 새들이 웃고, 졸졸 흐르는 물이 웃고,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웃고, 하늘의 밝은 태양과 둥실 떠오르는 뭉게구름과 맑은 하늘이 저를 보고 웃는다고 생각하니, 실제로 웃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면서, 누가 보든 말든, 누가 듣든 말든, 저도 큰 소리를 내면서 웃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마음이 훤히 밝아오고, 기쁨이 물결처럼 밀려왔습니다.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고 말하였습니다. 무슨 근거로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까? 무슨 근거로 바울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까? 이 말은 자신의 체험과 확신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바울이 확신한 말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하기 전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여러 가지 환난 때문에 슬퍼하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죽은 자들은 다시 살리시고 살아 있는 자들은 하늘로 들려 올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환난 중에 있는 로마의 성도들에게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롬 12:12)고 권고하였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거듭남의 종교입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거듭나지 않아도 기독교인보다 더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듭나지 않아도 기독교인보다 더 고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착하고 고상하게 살아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것과 거듭난 것의 차이는 이처럼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입니다. 예를 들면,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들이 서로 빨리 달리기 경쟁을 한다고 칩시다. 벌레들이 아무리 빨리 기어간다고 하더라도, 그들 간의 차이는 간발의 차이입니다. 동물들 간의 경쟁을 예로 들어봅시다. 물론 거북이보다는 토끼가 더 빠르고, 토끼보다는 캥거루가 더 빠르며, 캥거루보다는 호랑이가 더 빠릅니다. 하지만 호랑이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공중에서 나는 새만큼 빨리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바로 이처럼 거듭나지 않은 것과 거듭난 것의 차이는 땅에서 걷고 뛰는 것과 하늘에서 나는 것의 차이만큼 큽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고 아무리 선량하게 잘 살아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예수님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를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죄인이 뉘우치고 회개하여 착한 사람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이전보다 죄를 덜 짓거나, 가급적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거듭남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회개는 여전히 율법의 한계 안에 있습니다. 도덕적 수양과 신비한 깨달음으로도 사람은 거듭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공자와 부처의 가르침만으로 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와 부처가 태어난 후에 굳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수양도 좋고, 깨달음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땅 위에서 인간이 최선을 다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남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거듭난다"는 말을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난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입니다"(요 3:6).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의 일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며,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하늘에 올라가실 수 있고, 또 그래서 우리도 하늘에 데려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 3:12-13).

그러므로 거듭남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개과천선하는 것, 더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하늘로부터 온 말씀(예수 그리스도)과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땅에 태어남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듯이, 다시 태어남도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듯이, 다시 태어나는 것도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이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은 다만 이 선물을 감사히 받거나 거부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태어나려고 발버둥치는 태아가 있는가 하면, 태어나기를 거부하거나 거부당하는 태아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인 거듭남도 감사히 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를 완강히 거부하거나 거부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곧 "소망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한 것은 바로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으로부터 새 생명이 태어나듯이,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부터 우리가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돌이켜야만 비로소 구원의 소망이 생겨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나야만, 비로소 소망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즉 미래의 소망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옴으로써 우리가 거듭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뉘우쳤기 때문에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 우리는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으로 공적인 활동을 개시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어서 회개하라, 속히 결단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회개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회개와 결단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는 것은 자신이 지었던 죄에 대한 괴로움 때문이 아닙니다. 더욱이 세례 요한의 말처럼 심판이 두려워서 회개하는 것도 아닙니다. 빛이 비취기 시작하면, 어둠은 자연히 달아납니다. 어둠이 스스로 물러가기 때문에 빛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비춰오기 때문에 인간은 어둠을 털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빛이 어둠을 고발할 뿐만 아니라 어둠을 추방하기 때문에 이제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이 빛을 보고 빛으로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것, 거듭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가온 소망의 빛, 하늘의 소망 때문입니다. 소망 때문에 우리는 절망으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하늘의 영광이 우리에게 비취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이 땅의 헛된 영광을 버리게 됩니다. 아직은 땅을 딛고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더 높은 곳을 바라봅니다. 비록 땅에서 살아가지만, 땅에만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높고 큰 하늘의 소망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 중에 늘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거나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질적인 변화, 새 창조입니다. 인생의 방향과 목적과 운명이 180도로 뒤바뀌는 것입니다. 하지만 빛이 아무리 밝게 비춰도, 방문을 꽁꽁 걸어 잠그는 사람은 빛을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빛을 부인하는 사람은 빛을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를 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재를 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래를 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과거와 현재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미래를 향합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과거를 쉬이 잊지는 않지만, 연약한 사람처럼 과거의 상처에 매여 끙끙거리거나 바보처럼 뒤를 돌아보고 마냥 후회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과거를 과감히 털어 버릴 줄 압니다. 과거의 잘못을 관대히 용서할 줄도 압니다. 그는 새롭게 출발할 줄 압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과거에 세워진 율법이나 원칙에 따라서만 살아가지 않습니다. 옛것을 그리워하거나, 과거를 보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이미 과거가 되었습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현재에 매어서만 살아가지 않습니다. 눈앞의 이익이나 상황에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완고한 보수주의자, 원칙주의자도 가끔은 쉽게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현재만을 바라보는 상황주의자, 기회주의자는 항상 흔들립니다. 하지만 저 먼 곳, 저 높은 곳,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웃을 수 있습니다.

소망으로부터 거듭난 사람은 늘 소망 가운데 거하며, 더 높은 소망을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매일이 새롭습니다. 그는 매일 새로운 꿈을 꿉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항상 새롭게 봅니다. 그는 지금 일어난 일보다 그 일이 장치 어떻게 되어갈지를 더 골똘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사람을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정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의 가능성을 보고서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그를 쉽게 용서합니다. 과거의 원수조차도 미래의 친구로 만들 줄 압니다. 그 자신도 매일 새롭게 되기 위해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합니다. 승리의 날까지 매일 선한 싸움을 싸웁니다. 비록 몸은 상처투성이지만, 마음은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 거듭난 사람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진정 소망으로부터 거듭난 사람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더 큰 소망을 바라보십시오! 아직은 힘든 싸움을 싸워야 하지만, 아니 비록 지금은 쓰러지고 넘어졌고 울고 있더라도, 이미 승리하셨고 그래서 우리에게도 승리를 가져다주실 예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십시오! 미래의 소망 가운데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비록 지금은 울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크게 웃고 환하게 웃어 보십시오! 그러면 정말로 웃음의 날이 옵니다. 웃어야 건강하듯이, 웃어야 복이 오듯이, 웃어야 소망이 밝아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이 진정으로 권고한 것처럼 우리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송하십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