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하늘에 오르사

 

행 1:9-11

2006년 3월 5일 :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 주일까지 저는 예수님의 부활과 부활을 믿는 성도의 자세에 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자신을 철저히 비우시고 낮추셨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대로(빌 2:6-11)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지닌 사람이 될 정도로 자신을 비우셨고, 십자가에서 죽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을 하나님은 높이 들어올리셨습니다. 그를 다시 살리셨고, 하늘로 들어올리셨으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벧전 5:6).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잠 18:12).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친히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과연 하나님은 높이셨습니다. 하늘로 높이 들어올리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번역하자면, "하늘로 들림을 받으셨다"고 해야 합니다. 죽은 자가 스스로 일어날 수 없듯이, 자신을 낮춘 자가 스스로 높일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예수님을 살리셨고,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기까지, 그리고 지옥에 내려가기까지 낮추신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어디로 높이셨습니까? 하늘로 높이셨습니다. "하늘로 높이셨다"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저 높은 창공으로, 저 높은 우주로 들어올리셨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을 높은 공중에 올리셨다니, 하나님이 그 무슨 서커스단의 단장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하늘 높이 올라가셨다니, 예수님이 그 무슨 우주 비행사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제자들 앞에서 공중 부양을 하시다니, 예수님이 신기한 마술사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대단한 쇼를 하셨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하늘은 구름이 떠 있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창공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늘은 수많은 별들이 떠 있는 광대한 우주를 말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들림을 받은 곳은 그런 하늘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늘 멀리, 아무리 하늘 높이 올라가셨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여전히 우주 안입니다. 예수님은 우주 비행사가 아니며, 더욱이 외계인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올림을 받은 곳은 '자연의 하늘'이 아니라 '은혜의 하늘'입니다. 예수님은 천사들이 거하고 있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으로 올림을 받으셨습니다. 바울은 이를 '제3의 하늘'(고후 12:2)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올라가신 곳은 창조된 하늘이 아니라 창조되지 않은 하늘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하늘로부터 오셨고, 이 하늘로 다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곳, 곧 본향으로 다시 되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신 그곳은 우리의 본향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 후에 가게 될 곳을 '본향'이라고 말합니다만, 엄격히 말하자면, 우리는 하늘에서 태어나 땅으로 내려온 나그네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모두 태어난 본향을 갖고 있고, 그래서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본향을 그리워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늘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과 평화를 얻기를 갈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품은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우리는 이 땅의 본향보다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합니다(히 11:16).

지난번에 말씀을 드린 대로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대리자, 우리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앞에서 하나님을 대리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리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곧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활동, 죽음과 지옥행, 부활과 승천은 모두 우리를 위해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천상의 존재,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지음을 받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드러내지만(롬 1:20), 사람만큼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드러내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존귀하지만, 사람보다 더 존귀한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생명은 죽일 수는 있어도, 사람은 죽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꼭 빼어 닮은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시편 기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1-5). 여기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왕과 같이 존귀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바로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매우 혁명적인 말입니다. 옛날에는 한 나라 안에 오직 한 사람의 왕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하가 아니면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까마득하게 먼 옛날의 왕조 시대에 한 시편 기자는 모든 사람을 일컬어 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왕이라니, 얼마나 놀랍고 찬란한 인권 헌장, 인권 선언입니까!

그리고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자칭하였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매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요한복음 10장 35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하나님처럼 행동하시는 것도 매우 참람(교만)한 일일진대, 사람을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참람한 말이겠습니까? 십계명 중의 제1계명은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도 신이라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고 얼토당토하지 않고, 얼마나 건방진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괜히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신이라고 칭하실 때에 시편 82편을 인용하셨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드러지리로다"(시 82:6).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과 똑 같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을 가장 닮은 존귀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신적인 존재라는 존재입니다. 동양의 전통에서도 죽은 사람은 신(神)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종이로 만든 지방(紙榜)을 보면, 죽은 사람의 이름에다가 신위(神位)라는 글을 붙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었다는 말일까요? 좌우간 동양 사람은 죽은 사람도 신과 같은 지위를 갖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사 음식을 차려놓고 조상신이 와서 먹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은 사람들, 예컨대 김기동 목사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모두 귀신이 되어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고 말하면서, 심지어 감기에 든 사람에게도 귀신이 들렸다고 하여 귀신을 추방한다고 합니다. 모든 질병을 귀신들림의 현상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만, 예수님도 귀신을 자주 추방하신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귀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불신자의 영혼이 귀신이 된다"는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았습니다. 귀신의 존재를 믿든 안 믿든, 귀신이 어떤 존재든, 귀신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고,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의 운명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은 물건과 동물 이상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존재, 신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타락했습니다. 물건과 동물은 타락할 줄을 모르지만, 사람은 타락할 줄 압니다. 아니 사람은 실제로 타락하였습니다. 사람은 신적인 존재와 같이 존귀한 자신의 참된 본성을 망각하고 동물처럼, 아니 어떨 때에는 동물보다 더 비천하고 무지한 존재로 타락하였습니다. 동물 이하로 타락한 사람을 본래의 위치, 곧 하나님의 형상의 위치로 되돌리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예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더욱 본받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더 많이 닮도록 하셨습니다. 날로 하나님의 영광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우리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에서 더 큰 영광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고후 3:18).

예수님은 붙잡히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하늘의 영광을 직접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형체로 변모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모세와 엘리야도 역시 눈부신 형체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죽은 그들이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살아 나타났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환상이라고 말하고,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실제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장차 일어날 사건을 미리 보여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의 영광을 받으실 때,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도 장차 그렇게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을 보여주었다는 말입니다. 좌우간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존재로 변해갈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해갈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존재에서 더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해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활 후에 하늘 나라에서 해처럼 밝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약속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는 이 땅에서 이미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땅의 시민일 뿐만 아니라 하늘의 시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록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젠가 그 나라에 들어갈 날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늘에 올라가려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늘나라를 이 땅에 내려오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장차 거룩한 하늘의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그 모습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화려하게 단장한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하늘에서부터 사람들에게 내려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 그리하여 사망과 통곡과 아픔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땅을 저주하거나 도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타락한 이 땅에 영원히 거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땅은 죄악으로 심히 더렵혀졌으므로, 우리에게는 고향도 타향과 같습니다. 이 땅에는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더 나은 고향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을 창조하셨고 우리로 하여금 정해진 시간 동안 이 땅에 살도록 하셨으므로, 이 땅의 일로 기뻐하고 이 땅의 것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나그네인 우리는 이 땅의 것으로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땅, 더 좋은 고향을 찾아야 합니다.

이 땅의 나그네는 어디로 가야 할 지 잘 모릅니다. 발길이 닫는 대로 정처 없이 다닐 따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갈 곳을 분명히 압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이 들어가신 하늘나라, 아니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이곳을 찾고 구하고 두드립니다.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없기 때문에 이를 얻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아무리 값진 것도 아낌없이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인생이 피곤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있기에 다시 힘을 낼 수 있고, 어떤 일이 닥쳐오더라도 근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설령 예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설령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셔서 지금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되더라도, 우리는 슬퍼하거나 외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려고, 아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려고 곧 오실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은 하늘로 완전히 철수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가운데 우리에게 다시 오셨습니다. 육신으로 오셨을 때보다 더 가까이 오셨습니다. 성령 가운데서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지치고 힘든 나그네와 같은 우리와 늘 동행하시고, 하늘나라의 소망을 보여주시며 "힘내라"고 응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시민권을 소유하고 계신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어떤 처지에 있든, 성급히 실망하거나 어리석게 우쭐대지도 마시고, 하늘 나라의 소망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아니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늘 힘차게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