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사죄의 은총

시 32:1

2006년 4월 9일 :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매번 설교할 때마다 여러분에게 드리는 이런 인사가 하나의 겉치레 인사로 생각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에, 그리고 이 사회에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사회가 참으로 평화스러우려면, 모름지기 정의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지금 지구 곳곳에 분쟁과 전쟁이 그칠 날이 없는 이유는 정의보다는 힘이 더 우세하고 불의가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에 참 평화가 없는 것은 정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참 평화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의 마음도 제 각각이므로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힘이 없어서 평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힘을 기르려고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힘이 생긴 다음에는 참으로 평화가 찾아옵니까? 힘센 사람들이 왜 경호원을 거느리고 다니며, 왜 방탄차를 타고 다닙니까? 왜 담을 높게 세우고, 왜 감시 카메라를 설치합니까?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힘없는 사람들도 불안하지만, 힘센 사람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이 떨어지면 불안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으면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많은 돈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부자들은 왜 돈을 비밀 금고와 비밀 통장에 꼭꼭 숨겨놓고 삽니까? 먹고 살만한 부자들이 왜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안간힘을 씁니까? 부자들은 왜 탈세와 편법 상속을 일삼습니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돈은 잃을 수 있고, 언젠가 부자도 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예와 인기에 참 평화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지만, 명예와 인기를 누린 사람들이 도리어 불행해진 경우가 허다합니다. 명예와 인기를 먹고사는 사람들은 명예와 인기를 잃지 않으려고 불안하며, 명예와 인기를 잃은 사람들은 종종 비참하게 추락합니다. 지식도 반드시 사람에게 평안을 주지 않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한다"(잠 24:5)는 말씀도 있지만, "지식이 많은 자는 근심이 많다"(전 1:18)는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마음의 참 평화는 어디서 나옵니까? 자유로운 마음에서 나옵니다. 참 자유는 힘과 돈, 명예와 지식이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적어도 자유로운 자는 왕과 같은 자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종과 같은 자입니다. 아니 때로는 적게 가졌을 때가 훨씬 더 자유롭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을 겉으로는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마음으로는 훨씬 더 바쁘고 부자유스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적게 가진 사람들이 항상 자유롭고 평안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적게 가진 사람들의 마음이 욕망과 질투와 사기로 가득하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자유와 평화가 없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참 평화는 자유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적게 가졌든 많게 가졌든,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참 평안은 자유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자유로운 사람입니까? 어떻게 해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까? 참 자유를 누리려면, 먼저 인간을 얽어매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먼저 앞날과 관련된 것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가장 얽어매고 불안하게 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염려입니다. 만약 사람의 마음이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많이 가진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아무리 유복한 환경에서 산들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마 6:34)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 이는 주가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다."(벧전 5:7)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염려의 대부분은 아무 쓸데도 없는 것, 부질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고 깨닫고 후회할 일을 미리, 지레, 겁을 먹고 염려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라면, 사람들은 동물보다 조금도 지혜롭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대개 배가 부르면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동물들은 겨울과 가뭄 등을 대비하여 먹이를 미리 저장합니다. 하지만 그런 동물들도 사람처럼 신경 안정제를 먹거나 식은땀을 흘리거나 불안과 초조 속에 잠들지 않습니다. 내일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만 무턱대고 "염려하지 말라"고만 하시지 않고,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니 도무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일 일을 내일이 어떻게 염려한다"는 말씀입니까? 내일 일은 내 일(My Job)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먹을 빵이 있는데도 내일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내가 내일에도 죽지 않고 살아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다면, 내일을 염려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닌 것을 염려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내일이 내 일인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에 내일 가서 보자"는 뜻이 아니라, "오늘처럼 내일도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들에 자라나는 풀과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사람이 최선을 다한 후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설령 사람이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해도, 내일 일은 오늘처럼 내일도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에 맡겨야 합니다. 내일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오늘은 염려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염려로써 염려를 이길 순 없습니다. 염려는 오직 신뢰로써만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염려가 없는 삶을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를 보장하셨습니다. 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분의 약속을 믿지 않고, 불신과 염려 속에서 마냥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인생이 얼마나 짧은데, 아니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데, 매일 염려만 하고 살려고 하십니까? 염려 놓으세요! 염려 끊으세요! 아니 염려를 주님에게 맡기세요! 그러면 놀라운 평안이 밀려옵니다.

오늘의 일과 관련해서 사람의 마음을 가장 얽어매고 불안하게 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선택입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라는 유행가처럼 인간은 동물과 달리 시시각각으로 여러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부담감을 늘 지고 삽니다. 동물은 거의 본능에 따라 민첩하게 행동하지만, 인간은 종종 갈팡질팡, 오락가락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간 앞에는 여러 가지 길이 놓여져 있으므로 어느 길이 가장 좋은 길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매사에 최선의 길을 선택하려고 노력합니다.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이라도 선택하려고 노력합니다. 때로는 최악을 선택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사소한 일은 그르쳐도 상관이 없지만, 중요한 일은 그르칠 수 없습니다. 작은 일은 망쳐도 좋지만, 큰 일에는 실패하면 큰 낭패입니다. 중대한 일을 두고 "성공이냐, 실패냐?"하고 걱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암담한 현실 앞에서 "사느냐, 죽느냐?"하는 것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의 차이는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무겁고 괴롭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자신의 지혜와 남의 지혜도 구해야 하겠지만, 먼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솔로몬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백성을 통치하기가 매우 힘든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다른 그 무엇다도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과연 그는 지혜로운 왕으로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도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하라"(약 1:5)고 말했습니다. 특히 "사느냐, 죽느냐?"와 같은 위기 앞에서 성도는 기도해야 합니다. 민족이 멸망을 당할 위기 앞에서 에스더는 모든 백성이 금식하며 기도할 것을 부탁하였고, 그도 민족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앞두고 예수님은 피와 땀을 흘리시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눅 22:44). 최선의 판단이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낳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최선의 선택이 최악의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도록,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택한 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선택한 다음에는 "내 손을 떠났으니,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운명에 맡긴다!"고 자신하거나 달관하거나 체념하지도 말고, 선택의 결과를 위해서도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합니다. 선택의 결과를 운명에 맡기지 말고 주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일과 관련해서 사람의 마음을 가장 얽어매고 불안하게 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상처와 죄책감입니다. 내가 남에게 준 상처는 쉽게 잊어도, 내가 남에게 받는 상처는 잘 잊지 못합니다. 몸의 상처는 잘 치유되어도, 마음의 상처는 잘 치유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60살이 지난 누님과 대화할 때, 누님이 아주 어릴 때에 어머님으로부터 받는 마음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어머님에게 그 사실을 알려드렸더니, 어머님은 오래 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오래된 일을 섭섭하게 여기는 누님을 전혀 이해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 때에 저는 깨달았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은 오래 잊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남에게 가급적 마음의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 이후로 화를 잘 내지 않는 것을 보시고, 집안에서도 그렇게 하는지 궁금해하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절에 저는 집안에서 화를 잘 내던 사람이었습니다. 바깥에서 괴로운 일을 겪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 잘못이 없는 아들과 아내에게 앙갚음하듯 벌컥 화를 내고 심지어 손찌검도 하였습니다. 저의 마음의 상처 때문에 식구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곤 하였습니다. 그럴수록 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는커녕, 저의 상처는 날로 더 커졌습니다. 마음의 상처 위에 후회와 자책, 비판과 비난이 덧입혀져서, 저의 상처는 더욱 깊어져갔습니다. 그럴수록 저의 성격도 더욱 거칠어져갔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거친 성격과 상처가 조금씩 누그러져 갔습니다. 아마도 나이를 먹으면서 남성 호르몬이 점점 더 줄어든 탓이 클 것입니다만, 그보다는 용서를 통해 조금씩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어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에게 보복하지 말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선대하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렇게 할 정도로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성인 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살아가는 동안에 남과 원수 관계를 전혀 안 맺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도 피해를 준 것보다는 피해를 받은 것을 더 오래, 더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와 원한은 원수를 괴롭히기 전에 먼저 저를 괴롭힙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라도 원수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힘들지만, 저도 가끔은 제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흉내라도 내어봅니다. 이것도 진정 원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제 마음을 달래고 제가 평안과 복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래도 용서는 참으로 큰 힘을 발휘합니다. 내게 마음의 상처를 준 자를 용서하기 시작하니까, 내 마음의 상처가 점점 치유가 되기 시작하고, 집안에서도 점점 화를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바깥에서도 화를 내기보다는 화를 내지 않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가급적 남에게도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화를 내지 않고도 문제를 푸는 길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개 내 자신의 문제, 내 마음의 상처 때문에 남에게 화를 내기 쉽기 때문입니다. 쉽게 화를 내다보면, 억울한 피해자, 억울한 원수를 만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해야 하듯이, 나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남의 용서는 억지로 받을 수는 없지만, 남의 용서를 받으려고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설령 남이 사과를 안 받아주더라도, 내가 먼저 사과하면 됩니다. 설령 남이 나를 품지 않으려고 해도, 내가 먼저 남을 품으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남을 용서하기 전에, 그리고 내가 남의 용서를 받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야만 하는 선결 과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일입니다. 마음의 상처만큼 오래 가는 것은 죄책감입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별반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품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죄가 되는지는 몰라도, 저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착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랜 전에 일어났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죄책감을 일으킨 몇 가지 잘못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버스 안에서 안내양이 거스름돈을 제게 준 줄을 모르고 또 주었을 때, 저는 엉큼하게 거스름돈을 두 번이나 받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안내양에게 들켜 창피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또 한번은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부잣집의 가정교사로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하루는 파리 한 마리가 방안을 온통 시끄럽게 날아다니기에 작은 탁자 위에 올라가 파리채를 내리치다가, 탁자의 안쪽 나무를 부러뜨린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밑에서 올려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기에 시치미를 떼고 있었는데, 나중에 주인이 이를 알아차린 모양입니다. 그리고 주인 아주머니가 종종 간식거리로 과자를 주셨는데, 너무나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느 날 우연히 어떤 방안에서 그 과자가 들어 있는 부대자루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 아주머니 몰래 과자를 꺼내먹었는데, 너무 많이 꺼내먹다 보니, 아마도 주인 아주머니가 눈치를 채셨던 모양입니다. 아주머니가 이 일로 저를 문책하시지는 않았지만, 머잖아 저는 그 집을 나와야 했습니다. 내가 그때 왜 정직하지 못했는지, 왜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지 못했는지 생각할 때마다 지금도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잘못이 지금까지 저의 마음에 죄책감을 주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일을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얼마 전에 그 일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였고, 지금은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되, 죄인까지 미워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너그러이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하나님은 천대까지 자비를 베푸시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십니다(출 34:6-7). 하나님의 용서에는 횟수와 정도의 제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490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8:22). 이 말씀은 490번까지는 용서하고 491번부터는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무한히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마침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인류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그래서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부끄러운 벗은 몸을 나뭇잎으로 가렸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아무 죄도 없는 양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양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거나 염소에게 죄를 씌어 광야로 보내게 하셨습니다. 양과 염소는 장차 속죄 제물로 오실 예수님을 미리 가리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담당할 종을 보내셨는데, 그에 대해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요일 2:2).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하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셨고, 그리하여 하나님 자신도 의로운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롬 3:25).

그러나 속죄는 무조건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싸구려 은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아무에게나 마구 던져주는 '떨이 물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참회를 통해 비로소 효력을 발휘합니다. 용서의 객관적인 근거는 하나님에 의해 마련되었습니다. 사죄는 이미 객관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용서가 주관적으로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편에서는 회개가 요청됩니다. 죄를 통회하고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는 용서의 위로가 주어집니다(마 5:4). 회개하지 않은 바리새인은 용서를 받지 못하였지만, 죄를 애통하게 여기며 회개한 세리는 용서를 받았습니다(눅 18:13-14).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요일 1:9).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정직하게 나오십시오(히 4:16). 비록 여러분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과 같이 희게 될 것입니다(사 1:18).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시 25:7). 그러므로 여러분도 지난 죄로 인해 죄책감에 눌려 살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 안에서 늘 평안을 누리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