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부활과 영생

고전 15:35-58

2006년 4월 23일 : 현풍제일교회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소망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언제나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장차 죽어야 하고 썩어야 할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놀라운 특권과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행복합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고달픈 인생살이 중에도 종종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괴로운 인생은 살만하고, 살맛이 납니다. 인간이 애타게 기다리는 좋은 소식들이 많지만, 그 중에 부활보다 더 반갑고 기쁘고 놀랍고 축하할 만한 소식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옆에 계신 분의 얼굴을 서로 마주 바라보고, 다음과 같이 진심으로 축하해 주십시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당신의 부활도 축하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연속적으로 사도신경을 해설하는 설교를 해 왔습니다. 오늘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에 관해 설교할 차례가 되었는데, 마침 오늘 우리는 부활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설교와 날짜를 맞추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이렇게 되었습니다. 아니 세상 만사가 다 그렇듯이, 이 일도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하나님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생겨난 과정에 관해 말씀을 드렸고,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관해 말씀을 드렸으며,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부활의 소망이 주어졌으니, "웃고 또 웃자!", 그리고 "소망으로 거듭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부활에 관해 말씀을 드릴 차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사도 바울의 질문이 아니라, 누구인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이 던진 질문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성경이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몸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도 영생은 믿었지만,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사람들은 영혼은 영원하고 선하고 귀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육체는 연약하고 악하고 더럽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입기 쉽고 변하기 쉽고 죽기 쉬운 육체는 허무하고 덧없는 것으로서 다만 영혼의 옷, 영혼의 껍데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 사람들은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감옥 생활을 좋아하겠습니까? 감옥이 사람을 가두고 구속하듯이, 육체도 영혼을 가두고 구속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복하게 살려면, 감옥을 부수고 탈출해야만 합니다. 그처럼 어떤 사람들은 영혼의 감옥인 육체도 멸시하거나 학대하곤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육체는 어차피 덧없는 것이므로 육체를 아무렇게나 굴려도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방탕과 음란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는 이런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육체가 부활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과 바울을 비난하였습니다. 육체는 죽고 나면 썩어져 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는 말인가? 더욱이 육체는 더럽고 덧없는데, 그래서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에 참된 구원과 행복이 주어지는데, 어찌 낡고 더럽고 추한 육체를 다시 걸치고 부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욱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는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보니, 세상과 육체가 덧없어 보였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보니, 이미 신령한 하늘 나라에 들어간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보니, 그들은 천사들처럼 이미 천상 세계에 속해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영혼이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느껴지니, 이 세상의 생활과 육신도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육체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를 벗어나서 신령한 하늘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육체의 부활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육체의 부활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질문하였듯이,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는지를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먼저 바울은 씨앗을 비유로 듭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농부는 장차 씨로부터 열매를 맺기 위해 씨를 뿌리지만, 그가 지금 뿌리는 씨의 형체는 열매의 형체가 아니라 씨 알맹이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씨를 땅 속에 뿌리는 것을 죽음에 비유합니다. 씨를 땅에 뿌리면, 씨눈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땅과 함께 썩어서 비료가 됩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바울은 이와 같은 과정을 씨의 죽음으로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나라와 문화마다 장례의 방식은 제 각기 다릅니다. 시신을 땅에 묻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관을 동굴 안에 넣는 방식도 있고, 시신을 불에 태우는 화장의 방식도 있습니다. 시신을 물에 가라앉혀 물고기의 먹이가 되게 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높은 산에 시신을 눕혀 놓고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땅이 부족한 탓에 시신을 화장한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하거나, 유골 가루를 산하에 뿌리거나, 유골을 나무의 비료로 주기도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시신을 처리하든, 인간의 육체는 결국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땅 속에서 심겨진 씨앗은 그 원래의 모습을 잃게 되듯이, 인간도 죽으면 그 원래의 모습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땅 속에서 심겨진 씨앗이 나중에 전혀 새로운 형체로 되살아나듯이, 인간도 죽은 다음에 전혀 새로운 형체로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떤 형체로 다시 살아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씨앗에게 합당한 형체를 주시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합당한 형체를 주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모든 육체가 다 같은 육체가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가 있는가 하면, 짐승의 육체도 있고, 새의 육체도 있고, 물고기의 육체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땅에 속한 형체들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했던 인간의 육체가 죽으면, 장차 하늘에 속한 육체로 부활하게 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농부는 작고 볼품이 없는 씨앗을 심었는데, 나중에는 매우 다르고 굉장히 아름다운 식물이 자라납니다. 씨앗의 형체와 식물의 형체는 매우 다릅니다. 그처럼 죽은 몸은 전혀 다른 형체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씨앗과 그 씨앗으로부터 자라난 식물은 다같이 땅에 속한 형체입니다. 하지만 부활하게 될 육체는 땅의 형체가 아니라 하늘의 형체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제 각기 나름대로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물은 제 각기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그래서 나름대로 독특한 가치와 영광을 지닙니다. 만물은 영광의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이 땅에 그 어떤 하찮은 존재도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모두가 존귀하고, 모두가 가치가 있고,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하지만 영광은 모두 같은 영광이 아닙니다. 해와 달의 영광이 다르며, 달과 별의 영광도 다릅니다. 바위와 나무의 영광이 다릅니다. 나무와 짐승의 영광이 다릅니다. 짐승과 인간의 영광이 다릅니다. 인간과 천사의 영광도 다릅니다. 이처럼 만물은 제 각기 다른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형체에도 두 가지가 있듯이, 영광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영광이 있는가 하면, 땅에 속한 영광도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보다는 뛰어나지만 천사보다는 못한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자입니다. 아무리 존귀한 영광을 가진 인간도 죽으면 결국 땅과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둘째 사람, 즉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셨고, 하늘로부터 오셨습니다. 비록 그리스도는 인간의 형상으로 오셨지만, 하늘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는 다시 하늘의 형상, 하늘의 영광을 회복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장차 하늘의 형상, 하늘의 영광을 입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 사람들과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이 잘못 생각하였듯이, 이것은 고귀한 영혼이 더러운 육체를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새로운 육체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썩을 육체가 썩지 않은 것을 덧입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신령한 몸, 영적인 몸(고전 15:44)이라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비록 새롭게 변화된 몸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신령한 몸이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갑자기 여기에 나타나셨다가, 갑자기 저기에도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느 때에는 보이도록 나타나시는가 하면, 어느 때에는 나타나셨는데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근 방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오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신령한 몸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몸은 어디까지나 몸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만질 수 있었고, 음식을 들 수도 있었습니다.

좌우간 부활체는 몸으로부터 빠져나가거나 몸을 벗어난 귀신과 같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신령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육체가 죽은 다음에 영혼이 홀로 남아서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음과 부활 사이에 우리가 어떤 존재로 계속 살아 있을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대개 죽은 자를 잠자는 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고전 15:51)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되면, 잠자는 자들이 모두 나팔 소리를 듣고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고, 죽고 썩은 자들이 다시는 죽고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면서, 사망에 대해 완전한 사망 선고를 내리게 될 것이고, 사망을 조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든 역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시고 죽은 자들이 언제 부활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시 오실 주님도 모르시고, 하늘의 천사도 모릅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그 날과 그 때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이 더디 온다. 그 날이 오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며 방심할 것이 아니라, 도적처럼 언제라도 그 날이 불시에 닥쳐올 올 줄로 알고,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분명히 재림과 부활은 아직 미래의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의 능력인 성령을 미리 맛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여기서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이미 우리는 부활의 능력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영생은 분명히 미래의 약속이지만, 영생은 이미 우리 가운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이 이미 시작되었듯이, 영생도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이 그저 무한히 이어진다는 것을 말합니까? 그것도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아무런 의미와 기쁨도 없이 생명만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입니다(요일 4:8). 그렇다면 영원과 사랑은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생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충만한 기쁨을 누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도 사랑이 없이는 생명이 태어날 수도 없고, 잘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어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이미 영생을 소유한 자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바울은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3:8). 이 땅에서 우리가 맺는 사랑의 열매는 도중 떨어지지 않고 영원까지 이어진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사랑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늘 나라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사랑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여기서, 이 땅에서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고, 영생을 미리 소유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생명이 올 때까지, 비록 부분적이고 희미하지만 이 땅에서도 사랑과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여기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봄이 오니, 언 땅과 죽은 땅 여기저기서 연한 새순이 올라오고, 머지 않아 그 연한 가지마다 싱그러운 잎과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꽃은 얼마 후에 지고 말 것이지만,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열매도 땅에 떨어지고 말지만, 겨울을 지나면 또 새로운 싹을 피울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생명의 순환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맛과 향기를 미리 느껴 봅니다. 찬란한 생명의 축제 속에서 이보다 더 찬란한 영원한 생명의 축제를 미리 그려봅니다. 향긋한 꽃향기를 맡고 맛있는 열매를 먹어 보면서, 이보다 더 황홀한 하나님 나라의 향기와 열매를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일장춘몽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분명히 오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과 영생의 소망 가운데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의 수고가 반드시 영원한 생명과 충만한 기쁨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