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목마르지 않으려면

 

요 4:1-24

 2004년 1월 25일, 현풍제일교회

 

 

생명은 신비롭다고 말합니다. 요즘 우리 교인들은 아기를 많이 낳았습니다. 아기를 볼 때마다 저는 생명의 오묘한 신비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기를 볼 때마다 또한 저는 아기가 잘 자라주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벅찬 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돌멩이와 같은 물체는 갈망을 모릅니다. 배고픔도 모르고, 목마름도 모르며, 그리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생명은 다릅니다. 막 태어난 아기는 배우지 않아도 어미의 젖을 세게 빱니다. 어미가 젖을 물리지 않거나 젖이 나오지 않으면, 아기는 계속 울고 보챕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나면서부터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부분의 힘을 쏟았습니다. 지금 식량 문제는 상당해 해결되었지만, 아직도 절대적인 가난을 못 벗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상대적인 가난까지 포함하면, 아직도 이 땅에는 배고픈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식사 기도를 할 때마다 저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늘 스쳐지나갑니다. 하나는 제가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만 먹는다는 사실이 매우 미안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먹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밥을 먹고 나면, 물이나 차를 마시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사랑도 받고 싶고, 자손을 낳고 싶고, 인정도 받고 싶습니다. 소원을 성취하고 싶습니다. 좋은 무리에 끼이고 싶습니다. 이래저래 사람은 욕망 덩어리입니다. 인생은 갈망의 연속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난 시절에 비해 상당히 잘 먹게 되었고, 기본적인 욕구와 문화적인 욕구를 상당히 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결과로 우리는 상당히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비교하면, 약 50-100년 전의 조상들은 거의 원시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상보다 과연 더 행복합니까? 그리고 우리가 잘 살면 살수록 더 행복해졌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금이 가고 밑이 빠진 독과 같아서 채워도, 채워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의 독은 날로 커졌습니다. 그러니 이 독을 영원히 채울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선진국처럼 잘 살려면, 지구가 적어도 열 개 이상은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자원도 점점 고갈되어가고, 환경도 날로 오염되어갑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이 화성 탐사에 나서고 하지만, 태양계조차 인간의 욕망을 다 채워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눈부시게 발전한 광고 기술은 우리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허덕이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만족을 약속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체제가 아니라, 결핍감을 조장하고 불만 때문에 굴러가는 이상한 체제입니다. 우리 나라에 재벌에 속하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할 텐데, TV 드라마는 툭 하면 재벌들의 호화로운 삶을 비쳐줍니다. 이런 드라마를 볼 때마다 비참함을 느끼는 철없는 남자들은 카드를 함부로 긁을 것이고, 얼빠진 여자들은 부자 신랑과 결혼하는 신데렐라의 꿈을 꿀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의 가정과 경제가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비참하다고 생각합니다. 후진국보다 선진국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끝없이 갈망하는 가난한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은 금단의 지역 사마리아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과거 북왕국 시대에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던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게다가 북왕국은 앗수르 왕 사르곤 2세(B.C 722-705년)에 의해 멸망을 당한 후, 앗수르 왕국의 혼혈 정책에 의해서 민족의 순수한 혈통이 더럽혀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보다 더 무시하였고, 아예 그 땅을 밟지도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을 과감히 깨트리고 사마리아로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을 우연히 만나시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천대를 받는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로 물을 길러 나온 시간은 제6시였습니다. 제6시란 지금의 정오를 말합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사막 지대였기 때문에 여인들이 물을 길러 오는 시간은 보통 아침 일찍이 아니면 저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사막에서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정오에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사람의 눈을 피해 나올 수밖에 없었을 만큼 부끄러운 여자임이 분명합니다.

실로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남편을 다섯이나 거쳤고, 이제는 여섯 번째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혼이 흔한 요즘에도 여섯 번째 혼인한 여인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하물며 이천 년 전의 유대 땅에는 오죽 드물고 부끄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니 주위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을 것이고, 그 여인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허기보다 더 괴로운, 아니 타는 목마름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그 여인은 더운 대낮에 우물가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 속에 물을 향한 목마름보다 더 진하고 강한, 더 집요한 갈망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해갈은 잠시뿐입니다. 조금 지나면 또 물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 속에 아무리 마셔도 해갈할 수 없는 욕망을 발견하셨습니다. 아무리 남편을 바꾸어도 해결할 수 없는 육욕, 물욕, 온갖 탐욕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다시 목마르게 되는 불타는 욕망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을 채우려는 현대인, 아니 우리 자신, 아니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온갖 탐욕과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를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욕망의 노예가 되어 불쌍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고된 모습을 깨달은 일부 선각자들은 이런 욕망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는 욕망이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부질없는 욕망을 죽임으로써 해탈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욕망을 죽여도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이 수없이 많습니다. 욕망을 끊는다고 해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석가의 가르침에 따라 욕망을 죽이려고 하다보니, 사람들은 욕망을 죽이려는 생각도 부질없는 욕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달마 대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도 죽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욕망 없이 살려는 것은 참으로 고상한 욕망인데, 이 욕망마저 죽이라면, 과연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되는대로 살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다시 욕망대로 살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불교의 심오한 도리를 깨달은 사람이 많지 않은 듯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예를 들면 성철 스님의 법어를 들어보아도, 저의 깨달음이 부족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 말이 깨달은 사람의 위대한 말로 들리십니까, 아니면 초등학생의 문장처럼 들리십니까? 그래서 저는 도저히 스님이 될 수 없나 봅니다.

어차피 생명은 욕망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니, 차라리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더 솔직한 해결인 것 같이 생각됩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이 놈의 욕망이 영원히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늘어만 가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소박한 욕망으로 만족하고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가급적 문명의 혜택을 덜 누리고 육체의 노동을 통해 자연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대개 가난한 삶으로 만족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나마 환경이 조금이라도 보호되고 자본주의의 병폐가 조금이나마 치료될 수 있는 것도 이런 사람들 덕분입니다. 이들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가난한 것이 아름답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름답다"라고 외치며, 대안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교훈을 배워야 하고, 우리도 그런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범인과 같은 우리들은 그런 삶을 살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전기와 수도와 TV를 끊고, 옛날로 돌아가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이 해결책입니까? 해결책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한 생수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을 먹은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 야곱의 우물은 다시 목마르게 하는 우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토록 솟아나는 영생의 물입니다.

여기서 생수란 과연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 생수는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은 메마른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풍성하고 목마르지 않는 삶을 약속합니다. 성령은 갈급하고 메마른 심령을 촉촉이 적시는 은혜의 단비가 될 뿐만 아니라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게 하고, 더욱이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샘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 성령이 임했을 때, 물질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인들은 작은 물질도 서로 나누면서 기쁨과 감격 속에서 살았습니다(행 4:31-35). 이 땅의 것으로는 만족이 없습니다. 많은 것으로도 만족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만 만족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오시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원히 만족케 하시고, 영원히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바로 예배할 때입니다. 예배는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샘터입니다. 찬양과 기도 속에서,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배로부터 멀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불행해지고, 점점 더 가난해지고, 점점 더 비참해집니다. 예배와 가까울수록 우리는 점점 더 만족해지고, 점점 더 행복해지며, 점점 더 기뻐집니다. 아버지를 점점 더 멀리하려는 탕자 문명 속에서 살아가시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점점 더 기피하고 세상의 일시적인 솜사탕에 길들여지는 쭉정이 교인들 속에서 살아가시는 성도 여러분! 아니 세상 속에서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시는 성도 여러분!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려면, 아니 참된 만족과 영원한 행복을 맛보시려면, 무엇보다 먼저 예배를 사모하십시오.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인정하시고, 용감히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우물가의 여인처럼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솔직히 인정하시고, 주님을 모십시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