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전하라

 

겔 33:1-9

2004년 3월 7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지각을 뛰어넘는 주님의 평강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30년을 목회하면서 신앙 잡지 풀핏(Pulpit)을 발행한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님은 '살아 있는 교회와 죽어가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늘 교실, 주차장 등 공간의 문제가 있다. 죽어가는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살아 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소년 소녀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꾼이 부족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 있는 교회는 새 얼굴을 알기가 어려워 애먹는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살아 있는 교회는 선교사업이 활발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 있는 교회는 주는 자로 가득 차 있고,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로 가득 차 있다. 살아 있는 교회는 믿음으로 움직이고,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으로 움직인다. 살아 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고, 죽어가는 교회는 편안하다. 살아 있는 교회는 활발히 전도하고, 죽어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져간다.

우리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죽어가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다르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죽어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제가 물어볼 필요도 없고, 여러분이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을 괜히 던진다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이런 질문이 괜한 질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는 둘 중의 하나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교회가 혹시 죽어가는 교회가 아닌지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교회가 죽어가는 교회라고 진단이 되면, 회생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든지, 아니면 이왕 죽어갈 바에야 편하게 죽자고 결심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우리 중에 아무도 우리 교회가 서서히 죽어가는 교회가 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교회가 정말 죽어가는 교회가 아니라 살아있는 교회, 아니 최소한 회생하는 교회가 되고 싶다면,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님의 말대로 선교를 위해 열심히 애써야 합니다. 그러자면, 공간을 위해서 염려해야 하고, 온갖 사람들로 시끄러워야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하며, 여러분이 스스로 일꾼이 되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부족한 예산 때문에 늘 기도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 교회는 여간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죽은 교회는 아니라도 혹시 서서히 죽어가는 교회가 아닌지 심히 염려가 됩니다.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죽어가는 교회라는 말이 아닙니다. 작은 아이가 곧 죽은 아이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 교회가 너무나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비록 작은 아이도 활발히 움직인다면, 장래의 희망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덩치가 큰 아이라도, 활발히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교회는 죽어가는 교회를 너무 닮았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오랜 지하생활을 청산하고 공간을 넓혔습니다. 그래서 공간을 위해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공간의 문제점을 안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공간을 조금 넓혀 놓긴 했지만,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못합니다. 예배실에 유아실이 없기 때문에 유아를 데리고 오시는 성도들에게 불편을 줍니다. 식당을 친교실처럼 꾸몄지만, 아직은 만족할 수준은 아닙니다. 더욱이 어린이 예배실은 좀 더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소년 소녀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다고 했는데, 우리 교회는 어린이들을 위해 너무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린이 예배실을 최고의 공간으로 꾸며주고 싶은데, 여러분의 믿음이 아직 따라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린이 도서실을 꾸미고, 연극을 공연하거나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공간을 꾸민다면, 많은 어린이들을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산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과연 예산 문제가 전부일까요? 저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만약 교회 공간이 여러분의 집이라면, 여러분이 과연 이 정도로 만족하실까?"하고 말입니다. 어린이 공간은 언제나 어른 공간에 밀리고, 교회 공간은 언제나 집안 공간에 밀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사람의 집'보다 못한다고 해서야, 정말 말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교회는 너무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예배 시간도 조용하지만, 예배 후에도 활동이 너무 없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여러분이 교회당을 떠나면, 마치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이 허전합니다. 교회당은 늘 사람들로 북적대야 하는데, 기도하러 오거나 저를 찾으러 오는 사람은 매우 드물고, 오직 우체부 아저씨와 거지만이 종종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당의 모습도 마치 작은 요새와 같습니다. 바깥에서 볼 때의 생김새도 그렇지만, 안을 들여다보아도 너무 조용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언제나 시끄럽지만, 병든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조용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다시 공간에 관해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 교회당은 외부 사람들에게 폐쇄적인 느낌을 줍니다. 누구나 친숙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입구를 좀 환하고 아름답게 가꾸었으면 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쓰지만,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은행 잔고가 별로 없습니다. 아니 시설 이전 때문에 빚을 조금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빚을 감당해야 하는데, 여러분 중에 혹시 빚이라면 벌벌 떠는 분들이 안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국 교회는 암암리에 헌금을 너무 강요하는 듯이 보이고, 헌금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기 어려워하는 성도들이 없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급적 여러분에게 헌금 부담은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어떤 경우에는 믿음으로 과감하게 모험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코 인간적인 계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일수록 빚이 가장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빚을 갚을 능력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과감히 모험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래서 그 교회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다시 과감히 모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보다는 예산에 너무 신경을 쓰는 교회는 성장하기 어렵고, 바로 그래서 또 크게 모험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는 일꾼이 너무 부족합니다.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님이 살아 있는 교회에 언제나 일꾼이 부족하다고 말한 것은, 교회가 준비된 일꾼보다 더 많은 일을 왕성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는 준비된 일꾼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연로하신 분들을 빼고 나면, 젊은 성도들이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젊은 성도들도 교회당을 마치 손님처럼 드나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는 분이 너무 적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생계로 바쁘시기 때문에 그런 줄은 압니다. 하지만 교회 일을 남의 일처럼, 목사 혼자만의 일처럼 생각하는 교회는 결코 발전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저는 기도 시간에 종종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열렬히 헌신하는 사람을 최소한 세 사람은 보내 주십시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교회는 참으로 헌신할 태세를 갖춘 분이 세 사람도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는 시간이 남아도는 한가한 사람들만이 일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일은 자기 일을 하고 남은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찌꺼기 시간, 찌꺼기 정력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 하나님의 일을 먼저 걱정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 성장합니다.

저는 쭉정이 성도들이 많은 교회보다는 비록 규모는 작아도 알곡 성도들이 많은 교회를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올해부터 저는 여러분에게 경건 생활에 힘쓰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기를 권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를 권하고, 열심히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내적으로, 질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영적으로 깨어나기 시작하면, 자신의 영혼만을 돌보지 않고 이웃의 영혼도 돌보기 시작합니다. 불신자를 가엾게 여기게 되고, 그래서 전도하려는 마음이 불일 듯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양적으로도 성장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교회는 활발히 전도하는 교회가 됩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인 성장과 더불어 양적인 성장을 얻기 위해 저는 올해 네 차례 '총동원 주일 겸 총력전도 주일'을 갖기를 원합니다. 3월, 6월, 9월, 12월 마지막 주일이 바로 그 날입니다. 이번 3월 마지막 주일은 그 첫 번째 주일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영적인 훈련을 더욱 열심히 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생명력이 있는 사람만이 전도할 수 있고, 영적인 활기가 넘치는 교회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루 한번, 정해진 시간에 꼭 성경을 읽으시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족과 교회와 국가를 위해 기도하시되, 여러분이 꼭 인도해야 할 대상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고 인도하고 전도하는 자는 여러분이지만, 언젠가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으실 것입니다. 미리 낙담하지 마시고, 결과에 대해 염려하지 마시고, 여러분은 오직 기도만 하시고, 권하기만 하십시오.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하므로, 한 영혼을 얻기도 천하를 얻기보다 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와 정성은 천하는 얻지 못해도, 한 영혼은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정성이 언제, 어떻게 열매를 거둘 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때를 분명히 아십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어김없이 열매를 거두십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외아들을 둔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어느 날 아내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여보, 학교에서 귀가하던 우리 아이가 교통사고로 그만..." 아버지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아들의 몸은 이미 차갑게 굳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땅에 묻고 돌아와 아들의 방에 있는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책상 위에 놓인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것을 보고 통한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하나님, 제 아빠가 예수님을 믿게 해주세요. 아빠가 예수님을 믿을 수만 있다면, 제 생명을 드려도 좋아요." 아버지는 즉시 아들이 다니던 교회로 달려가 하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온 세계를 다니며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제대학생선교회 부총재 스티븐 더글라스의 한 친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한 어린이가 일기장에 뿌린 복음의 씨앗도 때가 되어 놀라운 결실을 맺거늘, 하물며 여러분의 가슴에 뿌린 기도의 씨앗이 언젠가 꼭 열매를 맺지 않겠습니까?

미국의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 무디는 소년 때에 구둣방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무디가 교회의 성경교실에 등록한 지 2주일 후, 성경교사인 킴볼이 구둣방에 들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깊은 관심을 갖고, 네 영혼을 위해 걱정한다." 그 순간 뜨거운 감동이 소년의 내면을 뒤흔들었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불과 이 주일 전에 나를 안 사람이 내 영혼을 걱정한다고? 그래, 이제는 내가 나 자신을 걱정할 때다." 무디는 바로 지하실로 내려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바쳤고, 그 후에 그는 위대한 전도자가 됐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영혼을 걱정하는 말 한 마디도 큰 열매를 맺을 수 있거늘, 하물며 이웃과 가족의 영혼을 위한 여러분의 따스한 몇 마디는 얼마나 큰 열매를 맺겠습니까?

오래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매우 추운 어느 아침에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그만 철길에 차가 처박혔습니다. 주인은 차를 꺼내려고 온 힘을 기울였으나, 쉽지가 않았습니다. 때마침 뒤쪽에서 열차가 기적을 울리고 쏜살같이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차 주인은 귀가 어두워 평소에 보청기를 끼고 있는데, 마침 그날은 보청기를 끼지 아니하여 소리를 듣지 못하여, 결국 달려오는 열차에 치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들을 수만 있었다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참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자기 잘못으로 죽었으니, 죽음의 책임도 그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어린이가 기차가 오는지도 모르고, 기적 소리도 듣지 못하고 정신없이 철길에서 놀고 있는데, 옆에 있는 어른이 소리를 지르거나 건져주지 않아서 그 어린이가 치여 죽었다면, 어린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당연히 어른에게 있지 않습니까?

일제 시대에 최봉석 목사님은 평양 거리를 다니며 "예수 믿고 천당 가자"고 소리쳤다가 순경에게 제지를 받았습니다. 최 목사님이 순경에게 "자동차가 빵빵거리는 것은 왜 가만히 두시오" 하니, 순경이 "사람이 치이지 말라고 그렇게 하는 것 아니오?"라고 했더니, 최 목사님은 "나는 당신들의 영혼이 치이지 말라고 전도하는 것 아니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파수꾼의 책임을 엄중히 가르치십니다. 만약 파수꾼이 외적의 침입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했는데도,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고 방어를 하지 않아 죽었다면, 그 책임은 당연히 백성에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파수꾼이 외적의 침입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지 않았다면, 백성의 죽임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파수꾼에게 돌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의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전도해야 합니다. 더욱이 멸망하는 불신자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화가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도해야 하지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기쁨과 하나님께 받을 놀라운 상급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전도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말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기에 힘씁시다(딤후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