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회를 아름답게!

고전 12:12-27

 

전의교회(이규헌 목사/2001.1.7)

 



부족한 종이 사랑하는 친구 동역자가 섬기는 전의 교회에 설교자로 초청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되어, 하나님과 성도님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뒤늦게나마 새해에 하나님의 풍성한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기원하며, 아름다운 교회를 지어 입당하신 여러분에게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향이 부산인 고로 저는 기차를 타고 자주 고향에 오르내립니다 작년 어느 날 서울행 기차를 타서 오른 쪽 창문가에 앉아 졸고 있었는데, 누가 깨운 것도 아닌데 갑자기 눈이 떠지면서 창문 밖을 내다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조용한 시골 마을 같은데, 종탑이 우뚝 솟은 교회당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교회당이 많은 편인데, 그 날따라 우연히 본 교회당의 모습은 첫눈에 매우 아름답게 들어왔습니다. 일어서서 자세히 보니, 그 교회당은 바로 여러분의 땀과 기도로 세우신 전의 교회당이었습니다. 하도 반갑고 기뻐서 기차 객석에서 핸드폰으로 이 목사님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축하와 소감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때 교회당을 보고 받은 첫 인상은 '아름답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아름다운 것입니까? 웅장하고 화려한 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 가 보았는데, 너무 화려하고 웅장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야, 굉장하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아름답구나"라는 느낌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차라리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으로 조각한 작품(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조각상)이 아름다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다고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요즘 키가 작은 사람들이 키 큰 사람들, 이른바 롱다리 앞에서 기가 죽곤 하는데, 그럴 필요가 뭐 있습니까? 누구나 제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있는 법입니다. 작은 것은 알차고 오밀조밀하고 귀엽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크고 작은 것에 있지 않고 바로 조화의 멋, 어울림의 멋에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좀 먹고 살만하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것을 대단히 추구합니다. 그래서 외모를 다듬고 성형 수술까지 합니다. 제품도 포장이 아름답지 못하면 잘 팔리지 않습니다. 배고픈 시절에는 무조건 많고 큰 것이 좋았지만, 지금은 깨끗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교회당을 크게 짓는 데 주로 신경을 썼다면, 요즘은 아름답게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당도 아름다워야 합니다. 전의 교회당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독특한 멋을 가지면서도 마을의 배경과 조화를 잘 이루기 때문일 것입니다. 디자인이 참신하면서도 마을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교회당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말씀드리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아름답게!" 라는 제목을 붙이니, "인류를 아름답게"라고 선전하던 어느 화장품 광고가 생각납니다만,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는 것은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 성도들의 아름다운 연합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도들은 참되고 착할 뿐만 아니라, 또한 아름다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아름다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8편의 기자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늘 위에 드리운 주의 영광이 하나님의 이름을 아름답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특히 밤하늘을 볼 때마다 광막한 우주 공간에서 수많은 별들이 제마다 빛을 발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놀라운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크고 작은 무수한 별들을 지으시고, 그 별들로 무한히 펼쳐진 공간에 아름답게 수를 놓으신 참으로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아름답다고 고백하는 말은 없습니다만,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144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로 아니면 영원 형벌 받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를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이 찬송가는 온 인류를 위하여 무죄한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는 그 갸륵한 희생을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희생이 아름답습니까? 예수님의 희생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산산히 깨어진 공동체를 다시 조화롭게 회복해 준 거룩한 속죄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또 찬송가 89장은 예수님을 아름다운 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샤론의 꽃 예수, 나의 마음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내 생명이 참 사랑의 향기로 간 데마다 풍겨나게 하소서. 예수, 샤론의 꽃, 나의 맘에 사랑으로 피소서." 이 찬송도 미움과 부패로 얼룩진 세상에 참 사랑을 전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아름다운 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왜 꽃이 아름답습니까? 단순히 그 자태와 색깔과 향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꽃 봉우리만 딱 떼어놓으면,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주위의 들과 산, 줄기와 잎새와 잘 어울리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자태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함께 읽으신 본문은 사도 바울이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소중한 본문입니다.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어떻게 하면 지체들이 서로 분쟁하지 않고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아름다운 예수님의 몸을 이룰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편 133편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고백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형제, 자매들이 서로 함께 만나 동고동락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어떤 교회는 큰 교회당을 짓는 과정에서, 아니 다 지은 후에 서로 다투고 갈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교회당을 지었다는 말입니까? 로마의 베드로 성당이 왜 아름답지만은 않습니까? 그것은 그 옛날 카톨릭 교회가 성도들 간의 화목하고 아름다운 사귐보다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짓겠다고 면죄부를 파는 등 온갖 잘못된 행위를 하다가, 그만 종교개혁의 암초를 만나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가 분열하는 사태를 초래한 건물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다 아름답지만, 사람의 몸만큼 아름다운 것도 드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그리고 조각한 작품이 상당히 많습니다. 왜 몸이 아름답습니까? 아름다운 여성의 몸, 건장한 남성의 몸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몸은 다 아름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20조 이상이나 되는 세포들이 제 각기 협동하고 사랑하면서 몸을 조화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생명과학이 밝힌 바에 의하면, 각각의 세포는 한 인간을 그대로 복제할 수 있는 독립된 생명체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각각의 세포가 서로 분쟁하지 않고 협력하기 때문에 만물보다 뛰어나고 아름다운 몸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몸이 아름다우려면 건강해야 하며, 몸이 건강하려면 모든 세포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몸이 조화를 이루려면 각각의 세포가 서로 동고동락하고 협동해야 합니다.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바로 그런 생명의 원리를 따라야 건강하고 아름답다고 사도 바울은 가르칩니다. 15-16절에서 보듯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하는 발을 보셨습니까?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귀를 보셨습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떨어지려고 하는 지체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스로 열등감을 가지는 지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회 안에서 지나치게 자신만을 내세우고 남을 무시하는 교만한 지체들 때문에 그럴 때가 더 많습니다. 21절이 말하듯이, "손에게 너를 쓸데 없다"고 말하는 눈은 없으며, "발에게 너는 쓸데 없다"고 말하는 머리도 없습니다. 만약 몸 안에 분쟁이 일어나 어느 세포가 협동 정신을 깨고 자신의 이익과 자랑만을 내세우고, 남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팽창하려고 하면, 그 세포는 언젠가는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고 몸 전체를 죽이는 암 세포가 되고 맙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도 모든 지체들이 열등감과 교만감이 없이 서로 사랑하고 협동하여야만, 교회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살던 당시에는 그리스나 로마 사람들도 국가 사회를 몸으로 비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몸의 비유를 사용한 것은 협동과 사랑의 정신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있고 잘 난 사람들이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치려고 몸의 비유를 끌어다 사용하였습니다. "힘이 없는 자들은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라", "노예나 천민들은 상전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논리를 주입하려고 몸의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칭할 때, 그의 생각은 전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 사람들과는 달리 이렇게 말합니다.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아름답지 못한 지체를 더욱 아름다운 것을 입혀라"(22-23)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얼굴이 몸에서 가장 예쁘고 소중하다고 생각하여 얼굴을 보호하려고 가장 비싸고 가장 아름다운 옷을 덮어 주십니까? 그리고 엉덩이나 발이 가장 천하다고 생각하여 엉덩이나 발을 드러내어 놓고 사십니까? 오히려 약하고 천한 그런 부분들을 아름답게 가려주지 않습니까? 이처럼 교회 안에서도 약하고 덜 귀한 지체들을 더 귀하고 아릅답게 꾸며주신다면, 무슨 분쟁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방 사람들은 거꾸로 귀한 사람들일수록 더 귀하게 여기고, 천한 사람들일수록 더 천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천하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더 돌보셨으며, 천국이 부자와 권력자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런 정신을 버리고 세속의 풍습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을 세속적인 가치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섬김을 받기를 좋아하셨습니까? 오히려 그분은 약한 자들을 섬기려 오셨으며,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온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도 먼저 된 자, 지도자가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입니다. 우리 몸의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합니다"(26).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 몸의 앞선 지체들은 뒷선 지체들을 위하여 많은 희생을 치릅니다. 여성의 자궁에 아기가 잉태하는 과정을 보더라도, 먼저 달려나가는 수많은 정자들이 뒤에 오는 정자들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대부분 희생한다고 합니다. 난자에 먼저 도달하려고 정자들끼리 서로 누르고 짓밟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몸도 그러하거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교회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된 자가 먼저 희생하고, 앞선 자가 뒷선 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서는 먼저 온 신자들, 토박이 신자들이 텃세를 부리는 바람에 나중 온 신자들이 시험을 받고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몸입니다. 아니 어디 그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가장 아름다운 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가르친 대로, 교회 안에서 세상의 권력자들처럼 우쭐대지 마십시오. 세상의 잣대에 맞춰 괜히 열등감에 빠지지도 마십시오. 오히려 세상에서 높고 앞선 자가 낮고 약한 성도들을 섬기십시오. 나의 고통보다 남의 고통에 더 민감하려고 애쓰십시오. 나의 기쁨보다 남의 기쁨을 더 기뻐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꽃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하면 애써 전도하려고 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시리라 믿습니다. 교회당만이 아니라 교회, 즉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전의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우뚝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