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일어나라

 

사 60:1-4

2005년 1월 9일, 현풍제일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인간의 모든 지각과 조건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새해가 밝아왔건만, 사람들은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랜 불황도 불황이지만, 오랫동안 움츠린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는지, 누운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는커녕 아직 기지개조차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해가 되자, 정부는 나름대로 경기 활성화 대책을 내어놓고 있지만, 서민 경제는 아직도 꽁꽁 얼어붙어 있습니다. 경제 침체보다 실로 더 심각한 병은 절망입니다. 조금 가난하고 구차해도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습니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실패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싸워야 할 진정한 적은 경제불황이나 실패가 아니라 절망입니다. 만약 절망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면,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대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고 맙니다. 지금도 절망을 이기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목숨을 끊으며, 자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방화와 강도 짓을 통해 남을 해치기에 이릅니다.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 때에 그런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는데, 며칠 전에 서울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급한 절망 때문에 빗어진 비극입니다.     

우리 눈을 바깥으로 돌리면, 작년 한해 동안 지구촌 사람을 가장 절망케 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인도네시아 근처에서 일어난 엄청난 해일의 피해입니다. 1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고, 엄청난 재산의 손해를 입었습니다. 수많은 난민과 고아가 생겨났습니다. 더욱이 범죄와 질병이 남은 사람들의 목숨까지 노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절망을 털고, 혹은 남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절망감입니다. 물론 이번 해일이 일어난 곳은 대개 불교를 믿는 나라들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 모든 재앙을 자신의 업으로 여기고 운명에 순응할 것입니다.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번 재앙을 인류가 감당해야 할 필연적인 비극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회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번 재앙을 인간을 심판하고 교육하려는 선한 알라 신의 섭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비록 이번에 피해를 본 분들 중에 기독교인들은 비교적 적었지만, 가장 당혹스러운 사람들은 역시 기독교인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좋게 창조하셨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대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처럼 큰 재앙을 허용하시거나 막지 않으시는지?"를 알지 못해, 쩔쩔 매게 됩니다.

성경에도 여러 가지 설명들은 있지만, 사실 딱 떨어지는 정답은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구히 변명과 해명을 하시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번 해일을 일으킨 장본인은 하나님이 아니므로, 하나님이 책임지실 일도 아닙니다. 사실 이번 재앙에 대해서는 사실 사람이 해명하고 책임일 질이 훨씬 많습니다. 지금 지진과 해일이 일어난 곳은 지진대가 걸쳐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항상 준비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많은 과학자들이 여러 차례 경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해일이 눈앞에 닥쳐올 때까지 방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진과 해일에 대비하는 훈련을 평소에 해온 어느 섬 주민들은 큰 피해를 겪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연을 이용하고 파괴할 줄만 알았지, 자연을 두려워하고 존경하지 않은 것도 재앙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몰디브라는 작은 섬나라는 주위의 산호초를 잘 보호해 온 결과, 이번에 상당히 피해를 줄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처럼 눈앞의 작은 편리와 이익을 구하다가 더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이번 재앙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 인간이 먼저 해명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건이 이미 일어난 마당에 누가 해명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지 따지는 일이 뭐 그리 급한 일이겠습니까? 일단은 재앙을 수습하고, 다시 일어나는 일이 시급합니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어서, 속히 복구가 되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삶의 터전을 복구하는 것도 어렵고 시급한 문제지만, 그보다 더 어렵고 시급한 것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 정신적 충격을 심하게 받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연 재앙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를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이처럼 갑자기 큰 고통이 닥쳐오지는 않았지만, 크고 작은 사건들과 재앙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를 서서히 파괴하는 절망의 세력들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인격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학교와 교회를 파괴하는 어둠의 자식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파괴하는 어둠의 권세들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은 우리를 영원한 저주와 죽음, 영원한 심판으로 인도하는 악의 세력입니다. 악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악과 싸우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악에 들지 말게 하소서"라고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악은 무엇보다 죄를 통해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매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죄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곧 교만과 태만(절망)과 기만입니다. 이 세 가지 죄가 다 심각하고 두려운 것이지만,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장 저지르기 쉬운 죄는 교만과 절망입니다. 교만과 절망은 서로 정반대가 되는 것이지만, 동전의 두 면과 같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성급히 차지하려는 것이요, 절망은 하나님의 소망을 성급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특히 국내외의 여러 환난 중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심각한 죄는 바로 절망입니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합니다. 행복도 사실 외부에 있기보다는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말합니다. 마음이 이처럼 중요하다면, 부정적인 마음을 먹기보다는 기왕에 긍정적인 마음을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컵에 물이 반잔 있을 때, "물이 반잔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아직도 물이 반잔이나 남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낳습니다. 어떤 아이가 시험을 치러 가는 길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아이고, 오늘 시험에 떨어질 징조인가 봐!"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야, 오늘 좁은 문에 들어갈 징조인가 봐"하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낳습니다. 나그네가 오랜 시간 동안 사막을 건너 지친 끝에 무덤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때도 "이제 올 것이 왔군. 저 사람들도 우리처럼 지쳐서 여기 죽어 묻혔을 거야!"하고 낙담하기보다는 "무덤이 여기 있는 것을 보니 마을이 멀지 않았군!"하고 용기를 내는 것이 더 낳습니다. 그러므로 실패와 성공은 남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내려야 하는 결정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처럼 남이 모두 아무리 실패했다고 말해도, 자신은 아직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도 결국 살고, 남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보좌까지 울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롬 15:13)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은 넘어뜨리시지만, 낙담한 자와 실패한 자는 일으켜 세우십니다. 아니 죄인까지도 끝내 포기하시지 않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넘어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곳곳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간의 범죄 때문에 전쟁에서 패망하자, 여호수아는 낙담하여 엎드려서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수 7:10)고 말씀하신 후, 승리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분문에서 바벨론에서 되돌아왔지만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낙망한 동족에게 이사야는 말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예레미아도 "일어나라.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렘 31:6)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달리다굼 - 소녀야, 일어나라."(막 5:41)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과부의 아들의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눅 7:14)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죽은 소녀에게 "다비다야, 일어나라."(행 9:40)라고 했고, 천사가 옥에 갇힌 베드로 옆구리를 치면서, "일어나라."(행 12:7)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때에 죽은 자들에게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 5:14)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죽은 후에 다시 일어날 행운을 갖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위해 일어나야 합니다. 죄인들도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죽었다고 판정을 받거나 며칠 동안 죽은 상태로 있다가 기적으로 회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육체는 죽음과 함께 눕지만, 영혼은 육체로부터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은 긴 터널을 빠져나가 빛나는 곳으로 간다고 합니다. 종종 빛이나 천사들이 그들을 안내하였다고 합니다. 그곳이 더 좋아서 돌아오기가 싫었지만, 이생에 다 하지 못한 일이 있어, 혹은 천사가 다시 되돌아가라고 하여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사나 죽으나, 우리는 반드시 일어나야만 합니다. 일어나지 않고는 베길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급히 낙망하고, 일어나지 않는 겁니까? 왜 지래 겁먹고, 왜 지래 넘어지고, 왜 지래 자빠집니다. 왜 자빠져도, 곧 일어나지 않는 겁니까? 일어나십시오! 왜냐하면 이사야의 말대로 우리에게 빛이 비추고,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울지라도, 하나님이 임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제가 정한 우리 교회의 표어는 "20주년을 준비하는 교회"입니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1.일어나 빛을 발하라. 2.내 집을 채워라. 3.배우고 전하라 4.죽도록 충성하라. 우리 교회는 아직도 연약합니다. 질적으로, 영적으로 허약합니다. 아기와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많습니다. 대구와 현풍은 전도하기 가장 어려운 곳입니다. 이처럼 부정적으로만 보자면, 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한숨만 쉬고 있을 겁니까? 언제까지 돈타령, 세월타령, 나이타령, 목사타령, 교인타령만 할 겁니까? 이제 우리 교회는 성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활발히 움직이고 뛰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지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영영 후퇴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올해 우리는 모진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일해야 합니다. 제발, 일어납시다. 아니 일어나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아니 주님의 굳은 약속입니다. 주님이 힘을 주시니, 우리도 힘을 냅시다. 주님이 빛을 비춰 주시니, 우리도 좌절감을 딛고, 일어납시다. 뜁시다. 우리도 높이, 널리 날아 봅시다. 하늘은 높고, 그래서 우리가 바라볼 이상도 높습니다. 땅은 넓고, 그래서 우리가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아직 죽기까지는 한참 남았습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아니 죽을 힘을 다해 우리 교회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