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주님이 쓰시는 사람

마 21:1-9

 

2001년 4월 8일, 독일 프라이부르크 한인교회(오성현 목사) 주일설교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평강을 기원합니다. 부족한 사람이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된 것을 큰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튀빙엔 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저를 자상하게 지도해 주셨던 몰트만 교수님의 75회 생신을 기념하는 세미나와 축제(4월 6일-8일)가 스튜트가르트(Stuttgart) 옆 마을 받볼(Bad Boll)에서 진행됩니다. 몰트만 교수님의 초대를 받아 13년만에 독일 땅을 다시 밟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국에서 제 강의를 들었던 오성현 목사님이 저를 오늘 주일 예배의 설교자로 초청해 주셔서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오 목사님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도 83년부터 87년까지 유학하는 동안, 칼스루에(Karlsruhe) 한인교회를 2년 간 섬긴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 한인교회에 대해서는 남달리 애정이 갑니다.

사람은 쓸모 가치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거룩하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온 우주와 바꿀 수 없는 귀한 영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오직 유용가치 혹은 이용가치에 따라 사물과 사람을 판단하는 데 길들여져 왔습니다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쓸모 없는 자들을 더 불쌍히 여기시고, 그래서 더 귀히 여기신다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쓸모 없는 자, 연약한 자를 더욱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니 모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은 우리가 열매 없이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비록 생명은 그 자체로서 소중하고 아름다우며 거룩하지만, 주님은 모든 생명이 풍성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즉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에게 영광과 기쁨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으며,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선한 일을 행하지 않은 잘못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의 자리에서 배제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있는 그대로 사랑을 받기를 원하지만, 기왕이면 크게 쓰임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군중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주님을 크게 환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만, 예루살렘 입성 때에 종려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누구를 말합니까? 예수님을 크게 환호한 군중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물론 이 날에 군중의 환호가 없었다면, 예수님의 행차도 초라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이 사건을 이처럼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종려나무를 들고 주님을 환영하던 그 군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그 손으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어떻게 쓰임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물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협력하도록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것도 쓰임이라면, 쓰임입니다. 역사의 무대에서, 그리고 영화나 소설에서 악역을 한 자들이 없다면, 드라머는 시시해지고 주인공의 가치도 크게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그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십자가의 무한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희생도 가능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가롯 유다를 향하여 "차라리 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고 평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비난한다면, 그에게 맞아 죽어도 쌉니다. 이보다 더 큰 모욕은 없습니다. 길에 핀 들풀도 다 존재할 이유와 가치가 있는데, 사람이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말은 정신적인 사형 선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오늘 나는 이 본문에서 아무런 자랑과 원망도 없이, 묵묵히 주님을 위해 봉사하였던 나귀 새끼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는 그날 주님에게 쓰임을 받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21:3)

왜 주님은 이날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까? 아니 왜 그 나귀는 주님에게 쓰임을 받았습니까?

 

(1) 나귀가 주님에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내게로 끌고 오너라."(21:2) 들에 뛰노는 야생마를 잡아서 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길들여지지 않고 매여 있지 않는 동물을 쓸 수는 없습니다. 나귀는 오래 동안 짐을 지고 나르는 일에 쓰임을 받았고, 또 다시 쓰임을 받기 위해 매여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자유는 빵보다 더 귀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 쟁취의 역사, 해방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자유가 없는 평등보다는 평등이 없는 자유를 더 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유는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모든 책임과 헌신, 구속에서 벗어나서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절대적인 자유란 피상적인 관념이나 허구적인 망상입니다. 인간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행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진리에 매일 때에만 진정 자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절대적인 자유인은 없습니다. 루터는 그의 유명한 논문 "노예의지에 관하여"에서 인간을 말에 비유하였습니다. 인간이라는 말 위에 하나님이 아니면 마귀가 올라타 있으며, 아무도 올라 타 있지 않는 그런 말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더 높은 주인에게 속해 있고, 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 해방과 자유를 외치는 사람도 더 높은 가치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열렬한 자유주의자, 시장경제주의자들은 대개 돈이나 쾌락 등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주창하는 자유도, 속을 들여다보면, 미국의 자본이나 권력을 보호하고 확장하려는 욕심을 포장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참된 주인을 모실 때만, 참으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더 높은 가치와 이상에 매여 있을 때만, 저열하고 부패한 것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자유를 원하신다면, 진정 자유로운 길을 가기를 원하신다면, 진리와 길로 오신 주님에게 매이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주님에게 소중하게 쓰임을 받으시려면, 주님에게 꼭 매여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기를 노력하십시오. 항상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고,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도록 노력하십시오.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크고 귀하게 쓰십니다.

 

(2) 나귀가 주님에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멍에를 메는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21:5) 멍에는 자유의 반대입니다. 멍에는 주인이 짐승을 부리기 위하여 장치한 도구입니다. 누가 멍에를 지기를 좋아하겠습니까? 하지만 멍에를 매지 않는 말은 농업이나 이동에 유용하게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멍에는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신 주님이 쓰신, 아니 그의 사역에 동참한 자는 바로 멍에를 맨 나귀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멍에로써 우리의 멍에를 벗겨 주셨습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주님께로 나갑니다." 우리의 고통과 근심, 죄와 죽음의 멍에를 벗겨 주시기 위하여 주님은 친히 십자가의 멍에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져야 할 가장 큰 멍에도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에게 지어진 십자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막 8:34)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부자유나 어두운 숙명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매임으로 생기는 고난이다. 십자가는 우연한 고난이 아니라 필연적이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자신의 완고한 고집을 죽인 자만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죄와 허물을 지고 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남의 짐을 대신 지는 사람이다. 주님의 멍에와 짐은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생활은 불행과 절망이 아니라 영혼을 싱싱하게 하는 안식이요 기쁨이다."(나를 따르라)

사도 바울은 모든 것에서 자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발견한 후, 아니 주님에게 사로잡힌 후, 그는 더 이상 율법에 매일 수 없었습니다. 주님과 하늘을 환상 중에 본 후, 그는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에게만 매여 살았습니다. 세상 학식과 가문, 혈통을 통하여 권세를 부리고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그가 회개한 후에는 주님만을 섬기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노예와 종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심지어는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서 자유롭게, 멋지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자유를 자신의 이익과 향락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주님의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으로 자유하였던 그는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3) 나귀가 주님에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온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귀는 말보다 몸집이 훨씬 작고 낮은 짐승입니다. 주님은 로마 장군처럼 준수한 말을 타시지 않고 나귀, 그것도 나귀의 새끼를 타고 가셨습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21:5) 주님은 온유하신 분이므로, 온유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로마의 평화(Pax Romana)에 대한 암묵적인 도전과 비판입니다. 참된 평화는 폭력과 무력을 통해 오지 않습니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고, 무력은 더 무력을 불러들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폭력의 악순환입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에 참 평화가 없는 것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폭력으로 폭력을 이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폭력으로 평화를 가져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젖과 꿀이 흘러야 할 땅이 계속 피와 눈물이 흐르는 땅이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주님은 참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참 평화는 온유한 자를 통해서 이 땅에 실현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마 5:5) 지금 오래 동안, 온 세상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는 공룡과 같은 거대한 짐승이 아니라 개미와 같은 작은 동물입니다. 포악하던 군주들, 독재자들은 잠깐만 영화를 누렸을 뿐이고, 힘없는 민초들이 여기저기서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 몽골 제국, 히틀러 제국과 같이 온 지구를 호령하고 지배하던 그 큰 권력들도 지금은 한치의 땅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혹심하게 박해를 받던 힘없는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도처에 건재해 있으며,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를 쓰십니다. 주임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를 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평화의 짐, 멍에를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30) 주님의 멍에만이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줍니다. 아무런 멍에도 지지 않으려는 사람은 결국 무거운 멍에를 지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가벼운 멍에, 십자가의 멍에, 희생과 온유과 섬김의 멍에를 지는 사람은 모든 무거운 짐을 벗고서 참으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마치는 말

주님에게 참으로 쓰임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에게 기꺼이 매이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기쁘게 지십시오. 주님처럼 온유와 평화의 사람이 되십시오. 참으로 여러분 생애,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학문, 여러분의 교회가 주님의 손에서 크게 쓰임을 받는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쓰시겠다"고 하실 때, 기꺼이, 기쁘게, 온유하게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쓰소서!"라고 응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