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빛을 비춰라

 

고후 4:6-11

2005년 2월 27일, 현풍제일교회

 

지난 22일에 우리는 영화 배우 이은주 씨가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유야 어떠하든, 25살 꽃다운 나이에, 꽃같이 아름답던 그녀가, 추운 한파에 아름다운 꽃이 지듯이, 갑자기 죽어버렸다는 안타깝고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보다 더 인기가 없는, 아니 인기가 전혀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더구나 그녀보다 더 못난, 아니 얼굴이 정말 못 생긴 사람들도 잘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녀보다 더 돈이 없는, 아니 알거지와 마찬가지인 사람들도 잘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기 절정에 있던 그녀가, 예쁘고 참하던 그녀가 왜 자살했단 말입니까? 유서에는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고 쓰여 있지만, 그녀는 최소한 먹고사는 것으로 걱정할 만큼 그렇게 구차하게 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그녀가 목숨을 끊었으니, 그러면 그녀보다 여러모로 못한 사람은 자살할 용기도 없으리만큼 못난 바보란 말입니까? 더욱이 그녀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말을 들으면, 더욱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형편에 처하더라도 자살만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설교의 서두부터 그녀 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유는 그녀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녀를 비난하는 것은 고인을 두 번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기 정상에 있던 그녀가 자살한 이유는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때문이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병과 싸우다가 죽었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녀 말고도 인기인들 중에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아무리 어려워도 자살하지 말라는 뜻으로 제가 자살한 이은주 씨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은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제발 자살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니 자살하시지 않으리라 굳게 믿습니다. 자살하는 당사자는 자살함으로써 풀기 어렵고 괴로운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는지는 몰라도, 남은 자의 슬픔은 너무 큽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도 자기 혼자 힘으로, 자기 결정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사람이 죽을 때에도 역시 자기 혼자 힘으로, 자기 결정으로 죽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자살할 이유가 충분하더라도, 자살은 하나님에게 큰 범죄가 될 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에게 큰 상처를 남기는 범죄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죽을 자리에 용감히 뛰어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살은 이해하고 용서할 수는 있을지언정, 인정하고 칭찬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중에는 정말 자살하고도 남을 만큼 극도의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 편지 속에 나오는 성도들은 심하게 짓눌리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궁지에 몰리고, 맞아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찌부러지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망하지 않고, 죽지 않았습니다. 이은주 씨가 아무리 어려운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나오는 성도들만큼 그리 심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다 같은 인간인데도, 아니 다 같은 성도인데도, 왜 어떤 사람은 망하고, 왜 어떤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 본문 바로 앞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극도의 괴로움 속에서도 성도가 절망하고 죽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잘 났거나 정신적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성도의 마음에 비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마음에 비취는 사람은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비록 어려움이 닥쳐도, 슬픔이 닥쳐와도, 결코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늘 비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언제나 밝습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감사와 기쁨으로 넘칩니다. 4장 15절의 말씀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본문 4장 6절은 말합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이 말씀은 천지창조의 사건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둠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셨고, 그 빛을 보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둠을 보시고, "좋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빛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지, 절망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이지, 빛을 없애고 어둠을 창조하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만물에 생기와 생명을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만물을 환희 밝히고, 만물을 영화롭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물이 밝고 소망차게 살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의 빛을 만물 위에 비추셨습니다.

만물 가운데 비취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과 마음이 죄로 가려져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볼 수 없습니다. 로마서 1장 19절 이하에서 바울은 "세상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만물 가운데 환하게 드러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지고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만물 가운데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이 영광이 너무나 크고 놀랍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최고의 본분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광,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결국 쇠망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한이 없고 끝이 없지만, 인간과 세상의 영광은 한이 있고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세상의 인기와 영광을 누리는 사람이 쉽게 넘어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사람의 인기에 목을 매는 사람은, 세상의 영광이 쇠하고 사람의 인기가 사라질 때, 결국 자신의 목도 매달기 쉽습니다. 무궁한 영광을 노래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영원한 영광을 돌리지 않기 때문에 쉽게 절망감, 허무감, 우울증에 빠지고 맙니다. 그 결과가 바로 자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사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서 환한 얼굴을 보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사십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지낸 후에 십계명을 받아들고 내려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까?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로마 베드로 성당에 가보면, 미켈란젤로가 새긴, 머리에 뿔이 난 모세 조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어찌 사람의 머리에 사슴처럼 뿔이 나 있습니까? 그것은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났다는 본문을 로마사람이 쓰던 라틴말로 옮길 때, "빛"을 말하는 히브리어와 "뿔"을 말하는 히브리어를 혼동해서 잘못 번역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이 머리에 뿔이 난 모세의 조각상을 보게 되면, 모세가 화 때문에 머리에 뿔난 것으로 착각하지 마시고,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췬 것으로 잘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만물보다, 모세의 얼굴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가장 환하게 비취었습니다. 본문 4장 6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 하나님 자신이기도 한 말씀은 누구를 말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계속 말합니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말이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중재자가 되셨다는 말입니다. 만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계속 말합니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 말은 또 무엇을 말합니까? 말씀이시고, 창조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은 곧 생명과 빛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또 말합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이 말을 무엇을 말합니까? 생명과 빛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신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므로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 자신, 말씀 자신이신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으니, 그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얼마나 환히 비췄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은 증거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는 말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날 밤에도 하늘의 가장 큰 별이 환하게 빛을 비취었고,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그 빛을 따라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누추한 마구간이 하늘의 영광으로 가득 찼고, 그래서 하늘의 천사들이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노래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환한 영광의 빛으로 변모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너무나 밝게 빛났기 때문에 아무나 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영원한 빛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취던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우리에게도 비춰졌습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도 볼 수 있고, 그 빛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빛을 밝히 비출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 사랑의 빛, 기쁨의 빛, 소망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고, 온 세상을 향해 그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빛은 어디에 나타납니까? 바로 얼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났듯이,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빛났듯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얼굴에 빛납니다.   

성도인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았고, 그래서 이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름지기 참 성도라면, 그의 얼굴이 밝고 깨끗할 수 밖에 없습니다. 피부색이나 얼굴의 모양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밝고 깨끗하면, 자연히 얼굴도 그렇게 나타납니다. 얼굴이 아무리 못나도, 얼굴이 아무리 검어도, 성도의 얼굴은 항상 밝은 빛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소망의 빛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비결은 세수를 자주 하고 고급 화장품을 바르고 번쩍거리는 장식품을 붙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얼굴에 비취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받아들여야만, 그럴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만, 그럴 수 있습니다.  

오직 이런 사람만이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당연히 자살은커녕 절망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역경 중에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역경 중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다가, 영광스럽게 삶을 마감할 수 있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밝게 빛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패배한 사람처럼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승리한 사람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보여도 영원히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온 누리를 환하게 비추는 영광스러운 생애가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